324화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5)
유지한의 천마검이 다이다라봇치의 몸 이곳저곳을 잘라 냈다.
[왜, 너는, 으어억, 나의 분노가 통하지 않는 거냐!]
다이다라봇치가 빠르게 재생하며 유지한을 공격했으나, 유지한이 놈의 몸을 잘라 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다이다라봇치는 자신을 공격한 상대의 감정을 건드려 분노와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흥분한 녀석들은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었다.
다이다라봇치가 원하는 건 그런 인간의 불길한 감정들이었다.
확실히 저 녀석은 예사롭지 않았다.
초월기를 사용하고 있던 나에게까지 감정이 밀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분노와 복수, 상대를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유지한에게 다이다라봇치의 감정 증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저 자식, 괜찮은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하게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내가 유지한의 걱정을 하다니, 인간이 되긴 했구나 싶었다.
아라카와강 너머에 있는 벽이 흔들렸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더니 뜻밖에도 뒤에 있던 스미다강의 물들이 요동쳤다.
스미다강의 물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그 위로 뭔가가 올라왔다.
“이런 미친.”
다이다라봇치를 상대하고 있던 유지한이 포롱이를 붙잡아 하늘에 뜬 채 몸을 돌렸다.
스미다강을 중심으로 거대한 벽이 올라왔다.
물안개들이 사라지자 그 형태가 점점 뚜렷해졌다.
소수를 제외한 열도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벽이 나무 그 자체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창세의 나무를 숭배하지만, 동시에 창세의 나무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신주쿠에서 벽 일부를 파손시켰다고 해도 벽이 나무라는 걸 본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신주쿠성은 폐쇄되었고, 벽은 주술로 인해서 형태가 가려져 있었다.
창세의 나무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다이다라봇치를 어떻게 잡아먹을까 궁금했는데.
‘과연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군.’
벽이 스미다강에 나타나 버린 이상 다이토구 사람들은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땅 일부를 잘라 내서라도 이 녀석을 흡수하겠다는 나무의 의지였다.
스미다강 쪽을 막자 아라카와강 변에 있는 벽이 꿈틀거렸다.
“시작됐군.”
저주받은 숲 주변에서 크고 작은 나무줄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다이다라봇치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위해 다가왔다.
유지한이 다이다라봇치를 상대하고 있는 사이, 다이다라봇치의 생명력을 흡수하려는 나무뿌리들을 잘라 냈다.
[크크,케케케케.]
“환장하겠네.”
잘려 나간 나무뿌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그 사이에서 검은 악마들이 나타났다.
저주받은 숲 아래에서 흰빛이 일더니 거대한 구미호가 나타났다.
“저 멍청이가…….”
창세의 나무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탐하는 존재였다.
다이다라봇치만큼은 아닐지라도 저렇게 커다랗게 나타나면 나무의 표적이 될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나무뿌리들이 다이다라봇치에서 백면금모구미호에게로 방향을 바꿨다.
내가 롱기누스의 창을 꺼내 냅다 집어 던졌다.
창이 폭발하며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섬광이 터져 나갔다.
동시에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의 초식을 밟아 나무뿌리들을 전부 잘라 냈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다. 그런데 녀석이 모든 걸 망쳤다.”
거대해진 백면금모구미호가 발톱으로 남아 있는 나무뿌리들을 찢어 버리며 말했다.
던전을 빠져나온 백면금모구미호는 오랫동안 틈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변질한 자아를 극복한 구미호는 이성을 가진 개체가 되었다.
구미호의 목적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저 나무만 없었더라면……!! 나는……!”
나무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열도는 구미호가 살아남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녔다.
결국, 힘을 과시하며 안식처에 숨어들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
“뭐지?”
“쌍수도를 나에게 넘겨. 그러면 내가 저 나무를 베어 주지.”
아라카와강 너머 벽 일부가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거대한 나무가 생겨났다.
송도에서 봤던 나무는 열화판, 즉 가짜에 불가했다.
‘만약, 창세의 나무가 타락한 위드그라실이라면.’
한 세계에 두 그루의 위드그라실이 존재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벽에서 자라난 나무는 송도의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심지어 저건 나무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검은 나무 기둥 사이에서 섬뜩한 붉은 빛을 머금은 잎들이 풍성하게 자랐다.
‘루시엘은 이걸 홀로 상대했다고?’
나도 그가 타락한 위드그라실을 쓰러트렸다는 것만 들었을 뿐, 위드그라실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새삼 그놈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무에서 태어난 검은 악마들이 백면금모구미호에게 달라붙었다.
내가 열심히 베어 주고 있지만, 감당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크아아아아!”
아홉 개의 꼬리를 흔든 백면금모구미호의 몸이 금색으로 변했다.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검은 악마들을 떼어 낸 구미호가 꼬리를 펼쳤다.
빳빳하게 선 꼬리 뒤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황금의 광선들이 일제히 벽에서 태어난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나무 근처에서 여러 번의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잔재가 천천히 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나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배리어가 백면금모구미호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 냈다.
힘이 바닥나기 시작한 백면금모구미호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걸레짝! 뭐 하는…… 윽, 뭐 하는 건데!”
다이다라봇치를 붙잡고 있던 유지한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백면금모구미호의 모습이 나와 비슷할 정도로 작아졌다.
낙영비화검(落英飛花劍)의 초식을 밟으며 구미호에게 다가오는 검은 악마와 나무뿌리들을 쓸어 버렸다.
구미호의 앞에는 누가 봐도 낡아 보이는 검 두 자루가 있었다.
백면금모구미호의 모습이 젊은 여자로 바뀌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4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다. 자신을 벽 바깥의 세상에서 왔다고 했던 사내가 있었지. 그도 너와 똑같은 말을 했다. 나무를 베어 주겠노라고.”
구미호가 말하는 벽 바깥의 사내는 한국에서 온 헌터가 틀림없었다.
“내가 틈새를 나왔을 때, 이미 창세의 나무에 의해 멸망한 뒤였다. 녀석은 내가 인간으로 변한 몬스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자신들이 나무를 베어 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바깥의 것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녀석은 끝내 나무의 양분이 되었다.”
구미호가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저 자유를 찾고 싶었을 뿐인 구미호에게 창세의 나무가 만들어 낸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나는 하늘검을 집어넣은 후 바닥에 꽂혀 있는 쌍수도를 향해 다가갔다.
“녀석들은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나는 달라.”
내가 쌍수도 위에 손을 올리자 여자로 변한 구미호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하늘을 보고 싶었다. 이런 불길한 빛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 진짜 하늘이.”
“내가 보여 주지.”
쌍수도를 뽑아 대충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백면금모구미호의 몸이 다시 거대해졌다.
녀석의 꼬리가 거대해지며 다시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나는 다시 위쪽으로 올라갔다.
다이라다봇치의 몸이 바닥에서 솟아난 뿌리들에 의해 반절 정도 먹힌 상태였다.
나무뿌리들은 다이다라봇치의 몸을 사정없이 묶고 있었다.
일부 뿌리에서는 다이다라봇치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검은 꽃을 피워 내기까지 했다.
“너 저거 쓰러트린다고 하지 않았냐?”
“저런 녀석들은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힘을 전부 소진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려.”
유지한이 엄지 끝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무식하게 힘만 센 것도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다 내 업보긴 하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
유지한이 내가 백면금모구미호에게 받아 온 쌍수도를 흘끔 바라봤다.
나는 유지한과 거리를 벌린 채 두 자루의 쌍수도를 뽑아 들었다.
“네놈이 그럴 줄 알았다.”
“쌍수도는 너 줄 거야! 난 필요 없어. 단, 이 싸움이 끝나면.”
내 앞에는 나무를 상대로 최후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 백면금모구미호가 있었다.
유지한은 처음부터 구미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저 녀석은 어차피 몬스터다.”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약속했으니까.”
내가 쌍수도를 유지한에게 지금 당장 건네지 않는 건 구미호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게 아니었다.
이 최소한의 약속이라도 지키지 않는다면 인간 강한결로서의 뭔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두 자루의 쌍수도를 뽑았다.
마력을 불어 넣자 낡았던 쌍수도의 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쌍검을 사용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검을 배우는 입장에서 기초적인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
유지한처럼 제대로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쌍수도에게 그 정도의 숙련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쌍수도를 높이 치켜들며 마력의 크기를 키웠다.
[소테르 신의 축복 MAX 상태입니다.]
[집행자의 검의 효과를 최대로 받습니다.]
[쌍수도가 적을 인식합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힘을 얻습니다.]
발밑으로 생겨난 푸른 하늘의 크기가 점점 넓어지며 저주받은 숲 전체를 뒤덮었다.
포롱이를 붙잡고 있던 유지한이 천마검을 쥐며 벽에 자라 있는 나무에 뛰어들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하늘 한쪽으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천마수라검(天魔修羅劍).”
불길하기 그지없는 마력들이 천마검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유지한이 사용하는 힘은 단순히 악에 물든 분노 같은 게 아니었다.
가장 악의 근본에 가까운 힘. 그것이 유지한이 사용하는 천마의 힘이었다.
“아수라파천무(阿修羅破天舞)!”
나는 루시엘에게 검을 배우고, 신위에 올랐다.
강한결에게 빙의한 이후, 나만의 스킬인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검’을 얻었다.
천마의 힘은 유지한의 고유한, 유지한만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다.
오직 분노와 복수만을 본능으로 삼은 유지한의 스킬이었다.
천마검에서 나온 검은 용이 창세의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벽을 부숴 냈다.
─ 멍청이냐? 오른쪽 어깨에 힘 빼라고! 손목 부러트릴 일 있어?
─ 검은 한 자루면 충분하잖아!
─ 이건 기초 중의 기초다. 배워 두면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어.
─ 개소리.
─ 오호, 네가 오늘 조상님과 안부 인사를 하고 싶은 모양인가 보군.
루시엘에게 쌍검의 기초를 배우긴 했지만, 정작 그걸 써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원래 사용했던 것처럼 바로 자세가 잡혔다.
아마 루시엘이 이 꼴을 봤다면.
─ 봐라, 역시 몸으로 배우는 게 대장이라니까.
하고 손뼉을 쳤을지도 몰랐다.
개자식.
내가 그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데.
창세의 나무를 둘러싼 실드들이 완전히 부서졌다.
나무가 나와 다이다라봇치를 향해 날아왔다.
몸을 튼 내가 쌍수도를 크게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