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까라면 까 (5)
“초월자 부대인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유지한이 아이템 창에서 꺼낸 초코바를 씹어 먹었다.
최수현이 그런 유지한을 향해 자신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사 먹…… 아놔.”
뒤늦게 여기가 북한이라는 걸 깨달은 유지한이 혀를 차며 최수현에게 초코바를 던졌다.
“그런데 그 남포 부대인지 하는 곳은 내버려 둬도 괜찮겠냐?”
남포는 평양 바로 밑에 있는 항구 지역이었다.
중국인이 주둔하고 있다는 곡산 부대도 둘러본 결과 최수현의 생각보다 크기가 작지는 않았다.
산 안에 있는 곡산 부대와 다르게 항구 부대라고 한다면 규모가 작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자칫 잘못하면 거짓말이 들통나는 건 물론 일이 귀찮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유지한도 최수현과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린다.”
이대로 평양에 가도 아슬아슬할 마당에 남포까지 들러서 뒷정리하고 갈 여유가 없었다.
“뭐, 이럴 때는 박시우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최수현이 보천석을 꺼내 박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천석 너머에서 박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남포 부대라, 중화 길드가 북한 내부까지 침투해 있는 걸 생각한다면 규모가 작진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박시우도 두 사람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 남포에 중국인 주둔 부대가 있다는 건 확실한 건가?
─ 그렇겠지? 설마 그 여자가 우리를 떠보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럼 좀 소름인데.
─ 사실일 거다.
유지한은 자수영과 하는 모든 대화 내내 관심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44 특수 부대를 포함해 남포에 중화길드 부대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녔다.
─ 유지한은 여기 있어야 하니 내가 움직일까?
─ 아니, 괜한 의심을 사는 건 좋지 않다. 내가 가지. 평양 일은 민석준에게 맡겨 놓으면 될 거다.
─ 네? 예? 어어? 아니, 제가 뭘……. 아닙니다. 그렇죠. 대표님이 까라면 까야죠.
─ 뭐, 남포 부대에 가는 건 좋은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설마 가서 사이좋게 대화로 해결할 생각은 아니겠지?
산골짜기에 있어 정보에 느린 국산 부대와 달리 항구 근처인 남포 부대는 중국 본토에 있는 정부와 상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컸다.
유지한처럼 위장하고 싶어도 박시우의 얼굴은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 남포 부대가 평양에 도착한다면 일이 귀찮게 될 수도 있다. 요점은 평양에 도착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 어디 도로라도 끊어 버릴 생각이냐?
─ 그냥 쓸어 버리면 될 걸 뭘 어렵게 생각하지?
어차피 불법으로 점거한 놈들이다. 중국이든 외부인이든 무장 단체와 다르지 않다.
박시우의 화끈한 대안에 진자헌은 입을 벌렸고, 유지한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유지한은 고지식한 박시우의 말투나 행동과는 별개로 이런 화끈한 방식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 콜, 그럼 남포 부대는 너에게 맡기지.
─ 이틀 후, 평양 광장에서 노동당 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 김해진은 불참이겠군.
─ 그래, 권경택이 대신 나와 공식적으로 발표를 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한국 헌터 협회라 해도 언론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실상의 리미트 기한이나 마찬가지였다.
─ 대충 알아들었다.
유지한은 박시우와 더 할 말이 없는 듯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몇 시간 후, 자소영으로부터 출발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운동장만 한 공간에 이백 명이 좀 넘는 초월자들이 각을 맞춰 서 있었다.
거기에 비각성자 군인까지 포함하면 오백 명 정도가 넘었다.
한국 군대에도 초월자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군대에 있는 군인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길드 헌터의 의존도가 더 높았다.
협회에 소속된 헌터들은 군대 여부와 상관없이 국방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산에 창세의 나무가 쳐들어왔을 때 헌터들이 대거 부산에 몰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유를 보장받는 한국 헌터와 다르게 중국의 각성자들은 말 그대로 군사력이자 군인이었다.
물론, 모든 중화 길드 헌터들이 이렇게 군 생활을 하는 건 아녔다.
일정 기간의 군 생활을 마치면 다른 헌터들처럼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도 있었다. 다만 다른 국가의 헌터들과 다르게 그 출신이 군인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자소영이 태연하게 중국 부대를 내려다보는 유지한을 따로 불렀다.
“출발 전에 잠시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그게 저, 상원 부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만 그 내용이 좀 심각해서 조언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원 부대라는 말에 유지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북한에 오기 전 유지한이 외워 놓았던 지도에 의하면 상원은 곡산에서 평양을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소도시였다.
‘설마 거기까지 중국 군부대가 주둔해 있을 줄이야.’
이 정도면 거의 북한은 껍데기만 북한이지, 알맹이는 중국이라도 봐도 무방했다.
“말해 봐라.”
“네! 상원 부대의 보고에 의하면 몇 시간 전 상원읍 인근에서 S급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하여 우리 부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양으로 가는 임무는 당국이 귀관의 부대에만 내린 특수한 임무다.”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양으로 가려면…….”
“상원을 지나쳐야 하지. 상원 부대에 지원을 가겠다 전해라. 자 상위. S급 몬스터를 상대해 본 적은 있나?”
“그게……. 단독으로는 없습니다.”
“그런가.”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다. 아직 초월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몬스터는 확인이 됐나?”
“예. 보스는 S급 몬스터인 교룡이라고 합니다. 다만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정대로 출발한다.”
유지한이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형화되어 있는 A급 이하 던전과 다르게 S급 던전은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직접 상대를 해 보기 전까지는 무엇 하나 장담하기 힘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할 거 없다. 아니면 내 실력을 못 믿는 건가?”
“아닙니다! 제가 어찌 중교님의 실력을 의심하겠습니까? 금방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유지한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곡산 부대를 이끌고 상원읍 근처에 도착했다.
마력의 일렁거림을 느낀 유지한이 부대에 멈출 것을 지시했다.
“자 상위는 상원 부대와 합류하도록.”
“네?”
“둘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S급 몬스터입니다. 각성자 부대이니 백업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규룡을 처리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할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저는 중교님이 걱정돼서…….”
“내가 자네가 걱정할 만큼 약하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유지한이 차가운 시선으로 자수영을 바라보자 자수영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규룡을 처리하고 상원으로 내려가겠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자수영의 경례에 유지한이 등을 살짝 돌리며 최수현에게 가자는 듯 손짓했다.
유지한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자 최수현이 한숨을 쉬며 아래로 내려갔다.
던전 브레이크 필드에 발을 들이자 곧바로 상태창이 나타났다.
유지한은 상태창을 읽지도 않은 채 옆으로 치워 버렸다.
“하씨, 평양에 가기 더럽게 힘드네.”
곡산 부대가 이동하는 걸 확인한 최수현이 점멸을 사용해 나무 위에 선 유지한의 옆에서 나타났다.
최수현이 위쪽을 흘금 바라봤다.
“나는 그렇다 쳐도 진자헌을 두고 와도 괜찮겠냐? 배신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는 거 아냐?’
“진자헌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다.”
“어떻게 장담해?”
“첫째, 진자헌이 자소영에게 내가 류양 중교가 아니라는 걸 말해도, 자소영이 진자헌의 말을 믿을 가능성은 적지. 의심이야 할 수 있겠으나 확신은 못 할 거다. 둘째, 설령 진자헌의 밀고로 정체가 발각된다 한들 진자헌은 중화 길드의 손에 죽는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가 혼자 살아남아 우리에게 협조했던 건 사실이니 자소영이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중화 길드는 헌터나 개인의 목숨보다 사상과 길드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적에게 협조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진자헌은 어떤 방식이든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살기 위해 한 번 버린 자존심 두 번, 세 번 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녔다.
“일리가 있네. 자, 그럼 규룡인지 하는 녀석을 쓰러트리긴 해야 하는데.”
“주변은 맡기지.”
원래의 류양 중교는 최수현과 마찬가지로 마탄을 사용하는 마탄의 사수였다.
유지한도 마탄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S급 몬스터를 상대로는 마탄보다 검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 자소영과 일행들을 쫓아내 버린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건 캐리어를 내려놓은 채 라이플을 조립하고 있던 최수현은 유지한의 말에 깜짝 놀랐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남이 보면 너랑 나랑 오래된 줄 알겠군.”
“얼마 안 되긴 했지. 그래도 너 캐릭터는 확실한 편이잖아. 설마 네가 아무에게나 그렇게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잖아.”
“그건 맞지.”
“야, 최소한 그럴 때는 겸손이라도 떨어라.”
최수현의 잔소리에 유지한이 꼭 그래야 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됐다. 너한테 무슨 말을 하냐.”
“서포트는 맡기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간다. 방법은 논할 필요도 없겠지.”
유지한은 최수현과 전략에 있어 상담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판단했다.
최수현은 이쪽 방면에서는 베테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녔다.
펄럭.
유지한이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던지며 아이템 창에 집어넣었다.
동시에 나무 기둥을 발판 삼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교룡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녔다.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은 녀석은 산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가오는 유지한에게 교룡이 소환한 크고 작은 신수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신수의 발톱이 유지한의 머리 위까지 닿은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마탄이 신수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파아아악.
사방에서 쏟아진 마탄들이 정확하게 유지한의 주변에 있는 신수들을 쓰러트렸다.
최수현의 방식은 열도에서 지긋지긋하게 많이 봐 왔다. 그리고 그건 유지한을 서포트하는 최수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지한의 짐승의 형태를 한 신수가 두 팔을 벌리며 가로막았다.
몸을 살짝 튼 유지한이 천마검을 쥐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악.
어둠 속에서 검 보랏빛 검격이 일더니 신수의 몸이 조각조각 나며 갈라졌다.
뭔가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 교룡이 유지한이 있는 곳을 향해 입을 벌렸다.
유지한의 머리 위로 교룡의 브레스가 쏟아졌다.
주변에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타 없어질 만한 불이었으나 브레스가 끝난 자리에 유지한은 없었다.
타앗.
어느새 교룡의 근처까지 접근한 유지한이 천마검을 교룡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열도에서의 싸움은 승리했지만, 완벽하게 이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만약 그 타이밍에 박시우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유지한도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지한의 천마검의 날이 규룡의 뿔을 향해 날을 빛냈다.
“천마검(天魔劍) 흑일섬(黑一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