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이은희 (3)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진짜 가서 보기만 할게. 만약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내 말에 이은희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이은희를 달랜 후 앞으로 세계의 끝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검은 자로 공간을 단절한 느낌이 들었다.
칠흑 같은 공간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 마력 탐지를 사용했으나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엇이 있는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절벽처럼 끊겨 있는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손을 살짝 뻗었다.
“자, 잠깐……!! 너 뭐 하는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던 이은희가 깜짝 놀랐다.
손을 가져다 대려던 내가 몸을 살짝 돌렸다.
“있잖아. 세계의 끝에 관심을 가진 유저들이 있긴 있어?”
중층부의 유저 수는 그리 적지 않았다.
그중에 호기심에라도 세계의 끝에 관심을 가진 유저가 없을 리는 없었다.
“있기야 있겠지?”
“흐음.”
나는 세계의 끝 너머로 손을 뻗었다.
내 행동에 담담한 척하던 하세영도 흠칫 놀랐다.
“아무렇지 않은데?”
막상 손을 가져다 대니 마치 검은 벽처럼 막혀 있었다.
다른 차원이고 이질적인 공간이고를 떠나 안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걸 본 이은희도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어, 어라? 뭐야? 그냥 벽이야?”
“음. 일단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세계의 끝이라고 알려진 부분을 계속해서 만져 보았다.
힘을 주어 보았지만, 안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뒤로 살짝 물러난 나는 부러진 아틸라의 검을 꽉 쥐었다.
아틸라의 검에 심검을 덧대자 마력으로 만든 검신이 나타났다.
허리를 살짝 틀어 아틸라의 검을 세계의 끝을 향해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날아간 마력이 세계의 끝에 닿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위로 마력 탐지를 사용했으나 스킬을 사용하기 전과 후에 별다른 차이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안 되는 건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야, 야! 너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세상에 저기에 검을 휘두르는 놈은 처음 봐.”
나는 기가 막혀 하는 두 사람을 무시한 세계의 끝에 기댔다.
내 공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끝은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은희가 나오라고 손을 휘휘 저었으나 나는 이은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그래? 이거 그냥 벽이라니까?”
“아니, 너 뒤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하세영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 어라?”
내가 아틸라의 검을 휘두른 곳이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동시에 이은희가 내 뒤에 있는 눈동자를 향해 화살을 당겼다.
벌어진 공간 사이에서 나온 검은 손이 이은희의 화살을 막아 냈다.
퍼어어엉.
근거리에서 폭발이 일며 주변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몸을 돌려 부러진 아틸라의 검을 찔러 넣으려던 그때.
[오랜만에, 만나는군.]
머릿속에 뜻밖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소리라고 하기보다는 마력 파장에 가까웠다.
나는 이 신언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노덴스?’
설마 하며 세계의 경계로 고개를 돌리자 틈새에서 점점 많은 검은 손들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점점 사라지는 시야 사이로 손을 뻗는 이은희의 모습이 보였다.
“금방 다녀올게.”
왜인진 몰라도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 * *
“……진! 차성진!”
순식간에 사라진 차성진을 본 이은희가 허무하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차성진을 완전히 집어삼킨 세계의 끝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 벽으로 돌아와 있었다.
@─ 금방, 다녀올게.
뭐가 금방 다녀올 거야.
이럴 줄 알았다고.
이은희의 불안한 감은 틀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은희가 세계의 끝 앞으로 걸어갔다.
하세영이 그런 이은희의 팔을 붙잡았다.
“놔.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상관이 없다구요? 세계의 끝에 가서 뭘 하시려구요? 당신이 세계의 끝에 관심을 보이는 건 상관없지만 이 이상은 안 돼요.”
“……뭐?”
이은희는 갑작스러운 하세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세계의 끝에 관심을 보인 건 이은희가 아니라 차성진이였다.
이은희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그사이 하세영이 세계의 끝으로 다가가려는 이은희를 끌어냈다.
이어지는 하세영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저는 사화로서 차기 사화가 될 당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야.”
“네?”
“사화라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은희는 차성진이 사라진 세계의 끝을 뒤로한 채 하세영을 올려다봤다.
하세영의 말에 의하면 유현우는 차성진을 사기 사화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의 끝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하세영이 말하는 차기 사화도 전부 이은희가 아닌 차성진의 이야기였다.
이은희의 말에 하세영이 되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표님께서 당신을 차기 사화로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어쨌든 이 이상 세계의 끝에 관심을 보이는 건 그만둬 주세요.”
“세계의 끝에 관심을 보이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루인이었잖아.”
“루인이요?”
“그래.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잖아.”
이은희는 차성진이 사라진 세계의 끝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하세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서로 벽을 보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누가 있었다는 거예요? 루인? 처음 듣는 이름인데.”
“차성진?”
“그건 또 누구예요.”
“아니, 그러니까……. 너랑 나랑. 그 녀석이랑 영귀를 죽였잖아.”
단기 기억 상실에라도 걸린 걸까? 이은희는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차성진과 함께 영귀를 잡은 기억이 생생했다.
“영귀를 죽인 건 저랑 당신이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
“세계의 끝을 확인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허락했구요.”
“정말로?”
“제가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이은희도 하세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사실이 아닌 건 엄연하게 다른 문제였다.
이건 마치 차성진의 존재 자체가 하세영에게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은희는 하세영을 뿌리치며 세계의 끝 근처로 달려갔다.
퍼억.
신경질적으로 세계의 끝을 향해 발길질했다.
차성진의 말대로 세계의 끝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검은 벽에 지나지 않았다.
아스트라를 꽉 쥔 이은희가 세계의 벽을 바라봤다.
사실 차성진이 세계의 벽 너머로 빨려들어 갈 때 이은희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은희가 쏜 화살 일부는 세계의 끝에 부딪혔다.
이은희는 주먹으로 벽이나 마찬가지인 검은 공간을 내리찍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유지한이 차성진을 죽이려 하든, 그가 유지한의 신이든 그런 건 이은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세영의 눈치를 본 이은희는 아스트라를 아이템 창에 집어넣으며 등을 돌렸다.
* * *
“이건 또 뭐야!”
벽 너머의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검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혹시나 한 마음에 마력 탐지를 사용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수많은 개체의 환수들이 느껴졌다.
적어도 이건 인간의 마력은 아니었다.
다행히 녀석들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하세영이 말하는 세계의 균열이라는 건 세계의 세 개의 끝에서 흘러나온 환수를 말했다.
이 많은 수의 환수들이 대체 어떻게 세계의 밖을 떠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세계의 밖과 중층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는 건 만약 균열이 심해지면 이곳에 있는 환수들이 전부 중층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허공에 몸이 반쯤 떠 있는 상태에서 발밑으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발밑에 있는 손들을 보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야야, 잠깐만!”
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구울이었다.
나는 심검을 이용해 발밑을 기어오르는 구울들을 베어 냈다.
마력이 담긴 공격이라 그런지 효과는 있었으나 문제는 구울의 숫자였다.
마력 탐지로 느껴지는 숫자만 수백이 넘었다.
참다못한 내가 머리 위로 부러진 아틸라의 검을 붕붕 휘둘렀다.
“야! 너 어디서 보고 있지? 좀 도와달라고!”
[여전한 모양이군.]
[시끄러워.]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언을 이용해 대답했다.
잠시 후, 발밑에서 작은 빛이 생겨났다.
빛이 점점 퍼지자 다가오려던 구울들이 슬금슬금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내 앞으로 커다란 문 하나가 나타났다.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환영한다는 듯 나를 반겼다.
나는 미지의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이네, 이 풍경.”
노덴스의 공간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올려다보는 게 힘들 정도로 커다란 통나무 집 안에 그는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노덴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동시에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빛이 집 안에 퍼졌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강한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덴스의 세계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강한결의 모습에서 차성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차성진의 모습으로 강한결을 보는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화하기에 가장 부담이 없는 모습일 것 같아서 골랐다만, 혹시 불편한가?”
“아니, 그렇진 않아. 그냥 어색할 뿐이지.”
노덴스의 집 안에는 보랏빛을 띠는 돌고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녀석은 마치 허공을 바다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라색 돌고래가 우리 쪽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나와 노덴스 앞으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나타났다.
나는 의자를 끌어와 앞에 앉았다.
“너무 편하게 앉는 거 같은데.”
“그럼 편하게 앉지, 불편하게 앉아? 그보다.”
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허리춤에 있는 하늘검을 노덴스의 위에 올려놓았다.
“하자가 있는 검을 주면 어쩌자는 건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반은 맞는데? 도대체 왜 안 뽑히는 거야?”
나는 노덴스의 앞에서 다시 한번 하늘검을 뽑는 시도를 했다.
농담이 아니라 하늘검을 뽑기 위해 정말 별의별 시도를 다 했다.
신경질이 나서 집어 던져 보기도 하고, 아틸라의 검을 이용해 부숴 보려 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하늘검은 그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꿈적도 하지 않았다.
노덴스는 나에게 하늘검을 준 존재였다.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에 따르는 개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게 엑스칼리버면 내가 인정을 한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