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신님이라고 (4)
정곡을 찌르는 김다솜의 말에 내가 발끈했다.
“원수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어?”
검도 챙겨 주고, 싸우는 방법도 알려 주고? 어?
왕 게임을 할 때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원수를 지면 내가 졌지, 유지한이 나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냐?
“…….”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건데.”
“아뇨. 그냥요. 둘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한결 씨는 지한 오빠의 신님이라면서요. 영혼을 나눈 존재이기도 한데 죽이겠다고 하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뭐……. 지한 오빠의 그건 거의 입버릇이긴 하지만요.”
“내가 무슨 걔랑……. 됐다. 됐어. 그보다. 너야말로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네.”
나는 유지한과 다르게 과거를 말하지 말 것이나 비밀을 말하지 말 것 같은 종류의 금제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쪽의 금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김다솜의 성격을 생각할 때, 김다솜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람이 신인 것보다 토끼 인형이 신인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드, 듣고 보니 그렇네.”
“오히려 인간처럼 생긴 게 친근하고 더 좋은걸요. 그건 그렇고…….”
아이템 창에서 소울 테이커를 꺼낸 김다솜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파아아앗.
반원형으로 돌던 여러 개의 칼날이 꽃잎처럼 펴지더니 그 앞으로 푸른 실드가 생겨났다.
실드는 날아오는 노아의 마탄을 정확하게 막아 냈다.
“어머,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다짜고짜 총부터 휘두르다니 그게 벤터스의 방식인가요?”
“그건 내가 묻고 싶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말이죠. 그걸 일일이 당신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니면 전부 죽고 싶으신가요?”
지면에 발을 내리찍은 김다솜이 노아와 다른 유저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나와 대화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분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노아가 총을 내려놓으며 두 손을 살짝 들었다.
노아의 항복 표시에 주변에 있던 유저들도 눈치를 보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물러나는 건가요? 평소의 저였다면 어림도 없지만, 지금의 저는 기분이 좀 좋으니 특별히 넘어가 드리도록 하죠.”
“과연 피의 여제……. 붉은 마녀라고 불릴 만하군.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 옆에 있는 녀석은 일행이다. 도올을 쓰러트리기 위해 데려오긴 했지만…….”
노아는 구덩이 안쪽에 죽어 있는 도올을 흘끔 바라봤다.
여기 오기 전 시전되었던 스킬은 김다솜의 짓이 분명했다.
그만한 스킬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환수이니 도올은 마냥 약한 환수가 아니었다.
소울 테이커를 거둔 김다솜이 나와 조금 뒤쪽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서아현을 바라봤다.
“일행은 서아현뿐인 줄 알았는데요.”
“사정이 좀 있어서 말야.”
나는 김다솜에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요?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가도 되죠?”
“나야 상관없는데…….”
“나도 상관없다. 다만 하세영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하세영의 이야기가 왜 나와?”
하세영은 사화 엔터 소속으로 벤터스 소속인 노아와는 관련이 없었다.
물론 같은 샹그릴라 토벌팀에 속해 있으니 아주 상관이 없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말이다.
“아? 그 아줌마도 여기 있어요?”
“아줌마라니……. 하세영?”
“네. 은희 언니가 사회 엔터로 넘어가기 전에 저랑 싸운 적이 있었거든요.”
“잠깐, 이은희가 사화 엔터로 넘어갔어?”
“어머, 말하는 걸 깜박했네요. 환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유지한은 그걸 내버려 뒀고?”
“사화 엔터로 들어가서 경쟁전을 뛰겠다고 선언한 건 은희 언니예요. 지한 오빠도 저도 그걸 말릴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건 한결 씨가 가장 잘 아시잖아요.”
이은희는 유지한과 만나기 전부터 해방군의 리더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지한과 얽혀 도움을 받은 유지한의 일행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유지한이 없었다면 왕 게임과 반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지는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설령 중앙 길드가 승리하고 왕 게임이 성공하고, 반란이 실패했다고 해도 이은희는 살아남았겠지.’
11층 전까지 힘 조절을 잘 못 했다고 해도 그 이후 이은희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최악의 경우 이은희에게는 하층부를 벗어난다는 선택지가 존재했다.
김다솜이 자신과 유지한은 이은희의 선택을 말릴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샹그릴라에 미래 언니가 붙잡혔다면서요? 저는 미래 언니의 안전만 확보되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기,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미래 언니가 신의님을 말하는 거죠? 다솜 씨는 신의님이랑 무슨 사이세요?”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인데요.”
“신의님이 왜 당신 같은 사람이랑…….”
“뭐라구요?”
“하하, 아니에요.”
김다솜이 노려보자 서아현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
파아아앗.
그때 위쪽으로 검은 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검은 연기는 샹그릴라 유저와 만났을 때 사용하기로 약속한 신호였다.
신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김다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뭐죠?”
“샹그릴라와 만났다는 신호야.”
“잘됐네요.”
“이동하지.”
우리는 바로 검은 연기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김다솜은 소울 테이커의 칼날에 올라탄 채 날아가고 있었다.
하층에서 봤을 때 소울 테이커의 활용도는 저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쯤 되면 거의 김다솜을 위한 만능 무기에 가까웠다.
나는 조금 위쪽에 있는 김다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유지한은 지금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김다솜은 유지한과 한미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유지한을 찾을 생각이었다.
“랭킹전이요.”
“이 상황에서 랭킹전 시스템이 돌아가긴 해?”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요, 생각해 보면 기존의 시스템이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아현이 끼어들었다.
“아마도 엔터와 게임 마스터들이 관리하는 랭킹전을 말하는 걸 거예요. 사실 그건 랭킹전 시스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거든요. 일종의 통제인걸요.”
공적치는 환수를 죽여 나온 헤파이토스의 금화를 얻어 점수를 높이거나, 랭킹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서아현이 말하는 랭킹전 자체의 시스템이라는 건 보유하고 있는 공적치가 많으면 많을수록 랭킹이 올라가는 세계의 시스템을 말했다.
랭킹 시스템은 중층 전체에 깔린 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헤파이토스의 금화는 더는 나오지 않지만, 유저들이 공적치를 얻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다른 유저에게 빼앗는 거네.”
“네. 랭킹전 당시에도 룰이 있다고는 해도 의도적으로 공적치를 노리고 살인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당시 상위권으로 갈수록 그 횟수가 줄어들었던 이유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그 유저를 후원하는 엔터 소속의 유저에게 보복을 당하는 게 두려워서였다.
게다가 비슷한 수준의 유저들끼리 모여 있으니 그 안에서 특정 유저나 다른 유저들을 일대 다수로 몰살시키는 그림이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환수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나 후나 랭킹전 시스템 자체에는 변화가 없어요. 남들보다 보유 공적치가 높으면 랭킹이 올라간다는 대전제 말이에요. 거기에…….”
“환수로 인해 사망한 유저들이 빠지니까 랭킹은 더 빠르게 오르겠지.”
“네. 최근 들어 그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랭킹전을 하는 유저들이 늘어났어요. 당연히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좋지만은 않지만요.”
환수 사태로 인해 그동안 대형 엔터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자들이 이제는 주변의 눈치 없이 랭킹을 위해 유저들을 죽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현재 중층부에는 환수라는 공통의 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미래의 말처럼 다 같이 힘을 모아 환수를 쓰러트려도 부족한 상황에서 개인의 공적치와 랭킹을 위해 움직이는 유저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환수를 쓰러트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그런 짓을 한다면 싫어하는 유저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서아현의 말에 김다솜이 소울 테이커를 이용해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머리 위를 날고 있는 김다솜은 다소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지한 오빠를 유저만 살해하고 도망가는 다른 유저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주실래요? 지한 오빠는 근처에 있는 환수들도 정리하거든요?”
“환수를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걸리적거려서 치우는 거잖아.”
김다솜이 사흉을 쓰러트릴 정도라고 한다면 지금의 유지한도 웬만한 환수는 가볍게 쓰러트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다솜은 내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유지한의 행동 패턴이야 안 봐도 뻔하지 뭐.
“그래서 유지한은 왜 이 난리 통에 랭킹을 올리고 있는 거야?”
유저를 죽이는 가장 큰 목적은 당연히 공적치와 랭킹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한결 씨, 혹시 사화 엔터의 대표가 누군지 아세요?”
“킹을 죽였다는 걔?”
나는 반사적으로 유현우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사화 엔터의 대표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걸 봐서 김다솜도 유현우의 존재에 대해는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은 아니야.’
하층에서 김다솜은 유지한에게 익숙한 기운이 난다고 했다.
유지한과 김다솜이 연결 고리가 있었나? 생각해 보면 딱히 그럴싸한 연결 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김다솜은 유지한을 유현우와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네. 한결 씨도 한결 씨인데, 지한 오빠는 사화 엔터 대표를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솔직히 지금의 지한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중층부로 올라가지 말 걸 그랬나.”
“너는 잘하고 있어.”
“…….”
“유지한이 너를 믿지 않았다면 이런 역할을 맡기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마.”
“한결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힘이 나네요. 그럼……. 빨리 미래 언니를 구하고 지한 오빠와 합류해야겠어요!”
“유지한과 합류라니? 유지한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 아니었어?”
“아.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위치는 대충 알 수 있어요. 아이템이 있거든요.”
제발.
그런 건 미리 좀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김다솜이 소울 테이커의 칼날 아래로 내려오기 무섭게 반대편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사흉 중 하나인 궁기와 싸우고 있는 사토 아키나리와 일행들이 보였다.
마력 탐지를 사용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사흉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난장판이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 * *
샹그릴라의 은신처.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의자 위로 물을 쏟아부었다.
의자에 묶인 채 난데없이 물세례를 맞은 한미래가 눈을 위로 치켜떴다.
‘아, 잘 자고 있었는데.’
그냥 다 죽여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