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임우현 (4)
송은영의 지적에 임우현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돌하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길드 대표라면서요. 아시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길드의.”
청월 길드가 대한민국에서 꾸준히 1위를 해 오던 길드는 맞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 임우현이 길드 대표가 된 이후부터라고 했다.
청월 길드의 국내 성장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국만큼 협회가 탄탄하게 관리를 하는 나라가 적기 때문에 사실상 길드의 독점은 거의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월 길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며 길드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알면서 그런 얘기가 나와?”
“그럼요.”
몸을 살짝 숙인 송은영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대표님은 죽어 본 적 있으세요?”
“뭐라고?”
“그러니까.”
송은영이 손을 가지고 와 엄지로 자신의 목을 살짝 그었다.
길드 대표는 말이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송은영의 태도에 임우현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살다 살다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죽어 본 적 있냐는 질문을 받을 줄은 또 몰랐네.”
“그러니까 오래 살고 볼 일인 거죠. 그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쪽 그렇게 나이 안 많아 보이니까.”
“동안이라는 거지? 칭찬이지?”
뺨에 손을 올리는 임우현에 송은영은 칭찬이 맞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청월 길드의 고위 헌터일 거라는 추측을 하긴 했으나 설마 길드 대표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다.
청월 길드의 대표는 박진우보다 얼굴 보기 힘든 사람으로 유명했다.
라온 길드의 대표인 강문국은 원래 협회 출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박시우는 일단 형이 박진우니 언론이나 행사에 얼굴을 자주 비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 죽어 본 적 있거든요.”
“오우. 정말?”
“예. 믿든지 말든지 자유긴 하지만요. 서른 번 넘었을 때부터 안 셌어요.”
“지리산 게이트의 이야기인가. 그건 흥미롭군.”
딱히 어디서 그런 경험을 했는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 번에 정답을 찾아낸 임우현의 태도에 이번에는 송은영이 살짝 당황했다.
임우현을 유심히 바라본 송은영은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쭉 느꼈던 위화감이 어떤 건지를 깨달았다.
임우현은 최수현과 닮아 있었다.
아니지, 최수현의 사수가 임우현이니 최수현이 임우현을 닮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 같았다.
“거기까지 알고 계세요?”
“그 현상이 지리산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니까. 짐작은 하고 있었어. 그나저나 의외네. 보통은 살인 청부라는 말을 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말야.”
“당신이 말한 이 여자나, 당신이나. 어차피 박진우보다 약하잖아요.”
“야! 비교할 인간을 비교해!”
임우현이 주먹을 테이블 위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박진우는 임우현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괴물이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임우현이 중얼거렸다.
“비교할 거면 이하린이랑 비교하든가.”
“이하린이요? 아, 그런데 이하린이랑 싸우면 이겨요?”
송은영은 임우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임우현이 국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영향도 있었다.
그래도 청월 길드 대표에 S급 던전의 공대장을 할 정도니 어느 정도 실력은 확실하겠거니 하고 추측을 할 뿐이었다.
“어, 아니……. 싸워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싸울 일도 없고, 그보다 안 싸우고 싶은데.”
이하린의 마법은 마법이라고 하기보다는 거의 폭격 수준이었다.
“박시우 정도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말하는 투를 보니 왠지 별로 자신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던 임우현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얘길 왜 하는 거지? 뭐,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 커피 한 잔 더 할래? 기왕이면 디저트도 좀.”
“상관없어요.”
돈을 쓰는 건 어차피 송은영이 아닌 임우현이었다.
임우현이 직원을 불러 커피와 디저트를 추가로 시켰다.
송은영은 초콜릿 무스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후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그 지세은이라는 여자를 죽여 달라는 게 부탁인 거죠? 그런데 길드 대표를 죽이는 건 아무래도 좀 파장이 크지 않아요?”
“지세은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고?”
“암살 같은 종류만 아니라면 싸울 수는 있어요. 죽일 수 있을지는 확답을 못 하겠지만요. 그보다 제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제안한 거 아니었어요?”
임우현이 최수현의 사수라고 한다면, 임우현은 절대 급하게 약속 장소를 변경해 자리에 나온 게 아닐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송은영이 담당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시점부터 임우현은 이럴 생각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리산 게이트까지 조사했다면 말 다 한 셈이었다.
임우현이 못 이기겠다며 두 손을 살짝 들었다.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럴 거 같았어요.”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 대신…….”
“가덕도 던전은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해요.”
송은영은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며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임우현은 이후 송은영에게 자신의 개인 번호가 적혀 있는 명함을 건넸다.
* * *
2구역 시가지.
검은 망토에 후드를 눌러 쓴 유지한과 서유라에게 유저들이 다가왔다.
“네놈이 소문의 킬러인가 보지?”
“킬러는 무슨. 갈 길 가지?”
“무슨 목적으로 2구역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 앞으로 현상금이 걸려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아, 1억이던가.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나?”
유지한이 아이템 창에서 불가살이의 검을 꺼낸 후 검을 살짝 틀어 검 끝으로 다가오는 유저들을 겨눴다.
“내 목에 왜 1억이나 걸렸는지.”
유지한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유저들을 내려다봤다.
유지한의 살기에 근처에 있던 유저들이 움찔거렸다.
“기, 기죽지 마! 이놈. 저 녀석만 죽이면 이 빌어먹을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유지한에게 현상금을 건 곳은 다름 아닌 엔터테인먼트였다.
엔터라고 해도 남아 있는 곳이라고는 사화 엔터와 벤터스뿐이었다.
현상금을 건 엔터는 사화 엔터가 거의 확실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원래라면 시간이 좀 들어도 차근차근 랭킹전을 하며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환수 사태가 일어나고 난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빌어먹을.’
이 환수 사태는 유지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환수 사태가 일어난 이후 유지한은 빠르게 전략을 틀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랭커가 될 방법은 유저를 죽이는 것이었다.
기존에 랭커들은 대부분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고, 유지한은 그런 유저들만 상대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엔터 소속 유저들과는 척을 지게 되었다.
환수 사태가 터지기 전 이은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랭킹전을 뛰겠다며 연합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지한이 아무리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중층에서 일어난 일의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 뭐라고?
─ 강한결.
─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 뭘 어떻게 알아! 네가 질리도록 욕하고 다녔잖아!
─ 그건 그, 그렇긴 한데……. 그놈이 왜?
─ 있어.
─ 다시 한번 말해 보…….
─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유지한은 이은희에게 맹세의 언약을 빙자한 금제가 걸려 있음을 확신했다.
환수 사태가 터진 후 몇 번인가 이은희를 만나긴 했으나 당시의 유지한은 한창 엔터 유저들을 죽이고 다니느라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다.
유지한은 그 뒤 강한결을 찾으려 했으나 그렇다 할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가면 넘어가 주지.”
“우, 웃기지 마라!”
사내가 손을 뻗자 숨어 있던 유저들이 유지한과 서유라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불가살이의 검을 쥔 유지한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몇몇 유저들이 실드를 펼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불가살이의 검이 유저들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위쪽에서 사내 하나가 검을 휘두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유지한이 남자의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너는?”
“레오…….”
“아니지. 곧 죽을 놈의 이름 따위 관심이 없다.”
“무례한 놈이군!”
두 자루의 검을 쥔 그가 멀리 떨어진 유지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검은 허공을 갈랐으나 어째서인지 유지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본능적으로 막아 낸 유지한이 사내를 흘끔 바라봤다.
“흠, 그걸 피하다니. 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그가 다가오는 유지한을 향해 두 자루의 검을 쉴 틈 없이 휘둘렀다.
불가살이의 검을 살짝 내려놓은 유지한이 남자를 향해 직선으로 걸어갔다.
“어째서……! 맞지 않는 거냐!”
태연하게 걷는 유지한을 본 다른 유저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검은 망토를 집어 던진 서유라가 유지한의 주변에 있는 유저를 향해 발을 크게 휘둘렀다.
코앞까지 다가온 유지한을 본 사내가 두 자루의 검을 유지한에게 내리찍었다.
한 손으로 검을 막아 낸 유지한이 남자를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멍청한 놈.”
“뭐, 라고? 이 새끼가!”
유지한의 도발과 동시에 남자의 검이 푸른 기운에 휩싸였다.
검에서 나온 날카로운 바람들이 유지한이 걸치고 있는 망토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의 검을 쳐 냄과 동시에 유지한이 몸을 뒤로 살짝 내뺐다.
보이지 않는 참격이 유지한이 피한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성이 나쁘군.”
“무, 무슨…….”
환수 사태 이후 2구역은 사실상의 무법지대가 되었다.
여기저기 유저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지한이 발밑에 있는 검을 차올린 후 다른 손으로 쥐었다.
남자의 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지한이 두 자루의 검을 내리그었다.
“네, 네놈 내 참격이 보이는 거냐!”
“안타깝게도 말이야.”
유지한이 남자를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하층부의 박승환.
그도 남자와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참격에 마음을 졸였지만, 지금의 유지한은 아니었다.
마력 탐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저 본능적으로 어디서 참격이 날아올지 전부 보였다.
“죽어라.”
남자의 검보다 빠른 속도로 검을 쳐 낸 유지한이 위를 잡으며 검을 내리그었다.
콰아아앙.
유지한의 손에 있는 싸구려 검이 사내의 몸을 가르고 지나가며 발밑을 무너트렸다.
“커흑…….”
사내가 쓰러지자 유지한은 피투성이가 된 검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동시에 서유라가 주변에 있는 유저들의 정리를 끝냈다.
남은 유저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싸울 의사를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죽은 유저들이 환수되는 걸 생각하면 쓸데없이 싸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었다.
불가살이의 검을 집어넣은 유지한이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서유라가 유지한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봤다.
동시에 그쪽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설마…….’
유지한은 폭발이 일어난 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