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결정 (4)
다짜고짜 선을 긋는 유지한에 한미래가 황당하다며 눈을 껌벅였다.
“아니, 왜?”
“일본인이잖아! 이 치료제가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좋은 일 시키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너 일본 유저랑 뭐 있었어?”
이은희가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유지한이 일본 유저를 싫어할 만한 일이 있었던 거 같지는 않았다.
그건 한미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지한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짜증을 냈다.
사실 한미래의 말대로 유지한이 일본 유저를 싫어해야 할 이유는 크게 없었다.
그렇긴 한데.
“뭔가 그냥 싫은데?”
“뭐야 너, 괜찮냐? 어쨌든 감수해.”
이은희는 이미 유지한으로부터 원하지 않은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유지한이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유저를 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이걸 살아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환수가 된 채로 죽지 않았다면 사토 아키나리가 제격이야.”
“확실히 걔는 좀 유별나긴 하더라.”
한미래도 잠깐이긴 하지만 10구역에서 사토 아키나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토 아키나리는 한미래가 보기에도 무척 독특한 인물이었다.
“10구역 원정 이후에 사화 엔터에 합류했어. 뭐, 사토가 몸담고 있던 벤터스 엔터가 완전히 무너진 것도 있긴 하지만.”
벤터스 엔터로 넘어온 사토는 주로 외부 지역 파견을 많이 나갔다.
사토는 이은희와도 몇 번 부딪혔다.
이은희는 사화는 아니지만, 유현우에 의해 암묵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화라 불렸던 유저들도 이은희를 거의 자신과 같은 급으로 대우했다.
그야 이은희의 실력을 본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화 엔터 내에서도 이은희는 사화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토가 이은희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벤터스 엔터 출신이었던 사토는 자신이 사화 엔터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긴 일이지, 차별은 무슨. 얼마나 있었다고.”
오히려 사화 엔터에서는 벤터스 엔터 간부 출신인 사토를 배려해 꽤 높은 직급에 앉혀 놓았다고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은희는 그 실력에 벤터스 엔터의 간부는 고사하고 살아남은 게 신기했다.
실력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운이 좋아 살아남아서 차지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7구역은 사토 아키나리가 마지막으로 파견 간 장소였다.
공을 세우겠다며 무리해서 단독으로 7구역으로 향했다고 들었다.
“그거 말고도 쓸 만한 유저 리스트라면 몇 명 더 뽑아 줄 수 있어.”
“역시 사화 엔터 출신. 믿음직한데?”
“별로, 너한테 듣고 싶진 않네.”
이은희는 지천우가 악의가 없고 자신을 적대할 만한 유저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 신뢰는 별개의 문제였다.
한때 같은 편이 되어 싸운다고 해서 모두가 동료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적의 적도 싸울 때는 일시적으로 아군이었다.
지천우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가 됐든 이동하지.”
유저 몇 명들을 사화 엔터로 돌려보내고, 김다솜을 만나 어둠의 조직과 협상을 해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었다.
유지한과 일행들은 곧바로 7구역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7구역은 10구역에서 한참을 돌아가야 하지만, 중층부 전체가 폐허가 돼 버린 탓에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환수만 잘 처리하면 직선거리로 갈 수 있게 됐다.
“심하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지천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층부는 멀쩡한 건물을 찾는 게 쉽지 않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거기에 차원의 균열이 일어난 적까지 있었으니, 지금의 중층부는 그저 쓰레기와 무너진 건물들의 무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100년 전쟁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그야 뭐, 차원이 반쯤 괴멸할 뻔했으니까.”
틈새에서 나온 유지한은 중층부를 보고 난 후에야 무엇을 상상하든 장막에서 본 것 이상일 거라는 슬라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이런 폐허는 유지한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오히려 중층이 차원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유지한과 지천우는 조금 뒤쪽에서 앞서가는 한미래와 이은희를 따라가고 있었다.
“중층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나면,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려.”
“나도 안다.”
“만약 문이 열리면 넌 가장 먼저 상층에 올라가야 해.”
“……뭐?”
유지한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며 지천우를 바라봤다.
유지한은 이은희에게 지천우가 하는 말을 조심해서 걸러 들으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상한 말을 던지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각오를 했으나, 진짜 이상한 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내 이명은 ‘세계의 사랑을 받는 자’야.”
“사기캐냐고.”
“하하. 그런 얘기를 많이 듣긴 했지. 강해진 이후에는 좀 줄어들긴 했지만 말야.”
지천우는 남들보다 빠른 성장을 거듭해 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사기라고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사랑을 받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잖아.”
무너진 건물을 뛰어넘은 지천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이명의 영향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세계는 지천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희생의 대가가 지천우가 사랑했던, 혹은 의지했던 동료였다고 해도 말이다.
지천우에게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뭐, 예상하긴 했다.”
유지한은 알고 있었다.
절망 속에서 단 하나의 희망을 부르짖는 자야말로 가장 큰 절망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지한의 눈에는 이은희가 그러했고, 지천우가 그렇게 보였다.
“네가 말해 줬으니 나도 말해 주지. 남의 이명을 대가 없이 듣고 넘어갈 만큼 양심이 없는 놈은 아니라서 말야.”
“양심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뭐라고? 죽을래?””
“죽여 줄래?”
“……이, 미친 새끼.”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지천우에 유지한이 질린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앞서가던 한미래와 이은희가 근처에 있는 환수들을 정리했다.
“난 말야, 초월자가 된 이후로는 마음에도 죽을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렸거든. 죽여 준다면 더없이 환영인데.”
지천우는 희망을 노래하는 유저가 아니었다.
지천우 말고 더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죽어도 지천우는 살아 있을 테니까.
“하아, 내 이명은 세계를 부수는 자다. 뭐, 네놈이랑 정반대긴 하지. 그렇다고 해서 죽여 달라는 소린 하지 마라.”
“…….”
“네놈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으니까.”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아니야?”
“하기 싫다고.”
유지한이 말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넌 이상한 소리만 해서 별로 재미가 없다만.”
“네 이명은 그게 아니야.”
“뭐?”
유지한이 무슨 소리냐며 지천우를 바라봤다.
그 순간 유지한이 발을 디뎠던 잔해 위에서 환수가 튀어나왔다.
한미래와 이은희가 길을 막고 있는 환수를 정리하면서 간다고 해도 모든 환수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식인 꽃처럼 생긴 환수가 유지한을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
먼저 레이피어를 뽑아 아래로 뛰어내린 건 지천우였다.
지천우의 레이피어 끝에서 나온 빛이 환수의 몸을 뒤덮었다.
유지한과 지천우는 재빨리 건너편 건물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이명이 바뀔 수도 있는 건가?”
“이명은 물론이거니와 금기 또한 그래.”
그 두 가지는 유저의 성향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절대적인 칭호였다.
“넌 세계를 부수는 거로 만족할 생각이야?”
“…….”
“난 네가 더 나아갔으면 좋겠어.”
“이상한 기분이군.”
“뭐가?”
“세계의 축복을 받은 네놈이, 나에게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니 그건 마치…….”
지천우 본인이 가장 이 세계를 증오하고 있다고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지한은 차마 지천우를 위해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천우는 틀리지 않은 말이라며 유지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앞서간 한미래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중층이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지금의 중층은 사실 그 구역의 의미가 반쯤 퇴색되기도 했다.
구역을 나누는 경계들이 전부 잔해에 파묻혀 버렸으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구역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유저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통해 대충 구역을 짐작했다.
한미래가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박아 놓은 노란 기둥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7구역이야.”
한미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으로 환수들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지천우가 레이피어를 뽑은 채 다가오는 환수들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한자가 많은걸?”
“사토 아키나리야.”
“어떻게 써?”
“뭐?”
“그러니까 사토 아키나리. 어떻게 쓰는데?”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스트라의 활을 꺼낸 이은희가 환수를 경계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사토 아키나리를 한자로 어떻게 적냐고 물어보게 될 줄 알았는가.
이은희가 환수를 향해 아스트라의 활을 옆으로 휘둘렀다.
활에 맞은 환수의 몸이 확 하고 날아가 처박혔다.
“이, 이름 보이는 거 아니었어?”
“이름은 보이지.”
“그럼 보면 되잖아!”
“너 말야, 설마 한글로 친절하게 사토 아키나리라는 글씨가 쓰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설마, 에이. 아무리 멍청해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이은희가 몸을 돌려 지천우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지천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뒤에 있는 환수의 머리에 꽂혔다.
동시에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뭐라고?”
“농, 농담이야.”
지천우가 1위 유저이긴 하지만, 유지한 일행도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었다.
다가오는 환수의 촉수를 얼려 버린 한미래가 백 텀블링을 하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사토인지 뭔지 하는 녀석 찾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한자로 써 달래. 내가 걔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알아?”
이은희가 한미래에게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했다.
옆으로 검을 휘두른 한미래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쓰면 되잖아.”
“내가 일본어를 어떻게 알아.”
“너 대기업 다녔다며.”
“영어는 할 줄 아는데……. 그, 그보다 주로 중남미 부서였다니까? ……왜 이런 얘길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한미래가 이은희의 뒤에 있는 환수들을 활을 쏘아 밀어냈다.
“그러는 언니는 일본어 할 줄 알아?”
“당연하지. 그것도 못 해?”
“왜 할 줄 아는 건데. 한국 의사 아니었어?”
“SNS에서 일본 애들이랑 키배 뜰려고 배웠는데?”
“나, 탑 바깥에서 언니를 만난 적이 없어서 다행이야.”
일본어를 배운 계기도 황당할뿐더러, 이은희는 한미래의 일본어가 허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미래가 발로 근처에 있는 흙을 평평하게 만든 후 화타의 검 끝을 지면으로 가지고 갔다.
“걔 이름이 뭐라고?”
“사토 아키나리.”
“어떤 한자를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뭐……. 이 중에 하나겠지.”
한미래가 슥슥 사토 아키나리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한자들을 적어 내려갔다.
위쪽에서 다른 환수를 막던 유지한이 아래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소꿉놀이하냐! 뭐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