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한 번만 닿아라 (2)
“있었냐구요? 그게 죽어라. 열심히 싸운 저에게 할 말이에요? 이런 취급할 거면 대체 왜 부른 거예요!”
김아진의 말에 의하면 유지한은 꽤 적극적으로 최진성을 원한다고 했다.
최진성을 보내는 게 아니면 협상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유지한이 얼마나 고집을 부렸는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최진성은 그렇게 데려온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최진성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유지한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지?”
“네?”
“이런 취급 하려고 데려온 거다. 김아진인가 하는 놈에게 못 들었냐? 서로 감시를 붙인다고. 대놓고 우리 쪽 정보를 빼 가려고 하는 녀석에게 친절하게 대해 줄 리가 없잖아.”
어라?
왜 짜증 나지만 맞는 말 같지?
“그리고 이 정도 취급이면 감사하게 생각해라. 아니면 넌 진짜 내 손에 죽었어.”
“아, 염라대왕도 울고 갈 뒤끝이네!”
최진성이 어깨에 닿은 유지한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다 듣진 못했으나, 유지한 일행들이 하는 말을 대충 듣긴 했다.
최진성이 자신의 역할을 물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넌 우리와 함께 움직이면 돼.”
최진성의 의문에 대답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지천우였다.
유지한이 못마땅한 눈으로 지천우를 바라봤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김다솜을 제외했는데, 감히 저런 놈이 같이 움직인단 말인가.
유지한이 그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지천우가 유지한을 설득했다.
“저 녀석은 유현우에게 갈 수 없어.”
“뭐래? 아깐 같이 간다며?”
“우릴 지킬 녀석 하나쯤은 필요하잖아.”
“아, 이해.”
“뭘 이해해요! 내가 댁들보다 약하구만!”
중층부 유저의 절반은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두 사람이 날로 먹으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최진성이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어휴, 마음대로 하세요. 팔려 온 저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습니까.”
“팔려 온 거 아니면서.”
“형이 뭘 알아.”
“고유…… 으으읍!”
최진성이 기다렸다는 듯 지천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천우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천우가 최진성이 고유 결계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었다.
“뭐, 뭐 하세요! 출발하죠! 거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최진성이 말하기 무섭게 지면에서 지렁이 같은 몬스터가 올라왔다.
하세영이 대검으로 지렁이의 몸을 반으로 잘라 내며 소리쳤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요!”
하세영의 말에 유지한과 지천우가 날아드는 마법을 피하며 탑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본 최진성은 자신이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유지한과 지천우를 지키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쫓아가기도 힘들잖아!”
싸움도 잘하니, 당연히 도망치는 능력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실력자가 작정하고 도망치는 경우는 잘 없어서 인식을 못 하지만 말이다.
간신히 두 사람을 따라잡은 최진성은 유지한과 지천우가 정말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무시하며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짜 안 싸우네.’
최진성은 둘 중 한 사람이 말할 때까지 같이 달리라고 했다.
최진성이야 그렇다 쳐도, 사실상 메인 딜러나 탱커를 담당하고 있는 두 사람이 싸우질 않자 순식간에 유저들이 밀리는 게 눈에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긴 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와 유저들이 싸울 수 있었던 건 그 만큼의 능력을 갖춘 유저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죽여! 거기 똑바로 하라고!”
“빌어먹을, 끝이 없어!”
“물러서지 마세요!”
하세영이 대검을 휘두르며 지휘를 했으나, 역시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은희의 화살을 피한 몬스터 하나가 다른 유저를 노렸다.
부상이 심한 그가 검을 휘둘렀으나, 끝내 몬스터를 베어 내는 데 실패해 검을 놓치고 말았다.
“위험해!”
몸을 튼 최진성이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앗.
검에서 새어 나간 불길이 남자와 몬스터 사이를 갈랐다.
그러나 거리가 있어서 녀석을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
그걸 안 최진성이 움직이려 하자, 유지한이 최진성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잠깐……!”
넘어질 뻔한 최진성이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서걱.
다행히 최진성이 죽이지 못한 몬스터를 김다솜의 소울테이커가 베어 냈다.
간신히 따라잡은 최진성이 못마땅한 눈으로 유지한을 바라봤다.
“쓸모없는 짓 하지 마.”
“쓸모없는 짓이라니, 방금 못 봤어요? 죽을 뻔했다니까요?”
최진성이 한 번에 몬스터를 죽였다면 끝났을 일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몬스터와 남자 사이를 가르지 않았다면, 아마 김다솜이 몬스터를 죽이는 시간을 벌지 못해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거였다.
최진성은 그걸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네가 하는 짓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잘 봐라.”
“…….”
“누가 네 도움이 필요하지?”
최진성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유저들을 훑어봤다.
유지한 일행들이 강하다는 건, 같이 모인 유저들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쓸모가 없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넌 처음부터 강했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거야 뭐, 다 똑같지 않겠어요.”
“그러니 동정하지 마. 해야 할 일을 해. 그게 남겨진 자들을 위한 의무다.”
유지한이 아래에서 튀어 오르는 개구리를 발로 차 날려 버린 후, 검은 탑 입구로 향했다.
“하아, 알았다고요.”
최진성이 삐죽 입술을 내밀며 유지한과 지천우를 따라갔다.
최진성은 조금이나마 유지한의 주변으로 유저들이 모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비록 하는 말은 조금, 아니 많이 험하긴 하지만.
‘이 누구보다도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어.’
심지어 다른 유저들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물론, 유지한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형보다 낫네요.”
“왜 가만히 있던 나한테 시비야?”
최진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천우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형에게 없는 거잖아요.”
지천우는 모두를 위하는 척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저 목표를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유지한은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협력하기 싫으면 말아라.
혼자서도 가겠다.
그리고 정말 혼자서 갈 때도 있었다.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불평도 없었다.
지천우만 봐 왔던 최진성이 유지한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지천우도 그걸 모르고 있진 않은 모양인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서 이번엔 가만히 있잖아.”
“당연하죠.”
“…….”
“이번에도 그런 실수 하면 가만 안 둬요.”
지천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지천우의 생존은 필연적인 거였지만, 환수됐던 최진성이 유저로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건 최진성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우연이었다는 거였다.
지천우는 최진성의 말에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탑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대한 석상이 움직였다.
악마의 얼굴에 검은 창을 들고 있던 녀석이 가장 먼저 탑으로 들어가려던 세 사람을 노려봤다.
최진성이 검을 뽑으려던 그때, 위쪽으로 흰빛의 화살들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앙.
유성우가 녀석의 머리에 쉴 틈 없이 쏟아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석상의 발이 또다시 다가왔다.
촤아아악.
거대한 실이 석상의 다리를 감쌌다.
“지한 오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김다솜이 소울테이커를 조종하며 손을 움직였다.
마력으로 만든 실이 소울테이커의 끝에 달려 있었다.
실을 매단 소울테이커가 위로 올라가자 커다란 다리가 잘게 쪼개지며 조각났다.
유지한이 탑 입구에 있는 검은 철창을 바라봤다.
“너 저거 자를 수 있냐?”
“어차피 부려 먹으실 거잖아요.”
뒤쪽에 있던 최진성이 지면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유지한과 지천우가 조금 걸음을 느리게 하자, 최진성이 두 사람을 빠르게 지나쳐 가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됐다.
정확하게 철창 앞에서 멈춘 최진성이 꽉 쥐고 있던 검을 살짝 틀었다.
청룡검의 검날에 빛이 들어오며 검 전체를 감쌌다.
‘좀 의외긴 했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고유 결계가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 최진성은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스킬이라는 건 유저의 행동이나 사고, 그리고 모시는 신에 따라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다.
소테르 신은 암흑 파괴 신이라고 들었다.
만약 신의 속성과 관련된 스킬을 얻는다면 당연히 그런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의 조직에 합류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혼자 사용해 본 스킬은 최진성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검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부는 바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거 같은 깨끗하고 맑은 검법이었다.
그리고 최진성이 가지고 있는 청룡검에 딱 맞는 검법이기도 했다.
“천풍검법(天風劍法).”
깨끗하게 뻗어 나간 검이 입구를 막고 있던 두꺼운 철창들을 잘라 냈다.
이은희와 김다솜이 석상을 막고 있는 사이, 셋이 먼저 탑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따라갈게요!”
놓쳤다고 생각한 건지 석상의 피부가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탑에 들어온 유지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템창에서 포롱이를 꺼내려던 그때, 벽을 중심으로 푸른 불꽃들이 생겨났다.
“아무것도 없군.”
탑 내부는 허무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발밑에 있는 검은 대리석에서는 일렁거리는 불꽃에 의해 유지한의 모습이 살짝 비췄다.
유지한이 아이템창에서 불가살이의 검을 꺼내 쥐었다.
‘지천우도, 최진성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탑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건 혼자인가?
‘아니다.’
유지한은 가장 먼저 탑에 들어왔고, 뒤를 이어 지천우와 최진성이 탑에 들어온 걸 분명하게 봤다.
최진성은 놓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지천우는 아니었다.
유지한은 지천우가 탑에 들어오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들어오는 순간 흩어진 건가?”
밖에서 보는 것에 비해 탑의 내부는 그렇게 크진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홀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유지한이 유일하게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밑에서부터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지한은 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문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문은 가짜인가 보군.”
베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베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을 내려놓은 유지한이 몸을 확 돌렸다.
“저예요. 지한 오빠.”
유지한의 뒤에서 나타난 김다솜이 두 손을 들며 싱긋 웃었다.
“탑으로 들어왔군.”
“금방 따라간다고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지한 오빠?”
유지한이 한숨을 내쉬며 김다솜의 목 근처에 불가살이의 검을 가져다 댔다.
검을 튼 유지한이 김다솜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이런 건 통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김다솜의 마력은 유지한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하다고 이런 환상.’
망할 슬라임 덕분인지 유지한은 환상에는 도가 터 버렸다.
재수가 없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