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가만두지 않겠어 (4)
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하세영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사실 모든 싸움이 그러했지만, 이번에는 농담이나 빈말이 아니었다.
“됐어요. 위로 올려 주기나 해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요.”
하세영은 으레 다른 유저들이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저는요. 눈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탑에 들어오기 전이나 후나. 그래도 유저가 된 이후에는 달라지려 노력도 해 봤는데, 그게 또 쉽진 않더라고요.”
“네가 눈치가 없다고?”
그럴 리가.
유지한만큼은 아닐지라도, 내가 아는 하세영은 충분히 눈치가 빠른 유저였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만 해도 그러지 않는가.
내가 공감하지 않는 표정을 하자 하세영이 그것도 이해한다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없진 않은데요. 눈치껏 하기 싫은 거죠. 반항이라고 해야 하나. 흔히들 그러잖아요.”
눈치 챙기라고.
그 눈치가 정말 눈치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중층부도 실력보다는 인맥, 다른 유저들의 평가더라고요.”
“너 의외로 외골수 같은 기질이 있으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이가 없네. ……뭐, 어쨌든요. 비록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리고, 유지한이 대표님을 죽이는 걸 막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저에게 손을 내밀어 준 분이에요.”
그 어떤 개입도 없이 오롯이 실력으로만 평가를 받는 건, 하세영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중층부에 있을 때는, 대표님과 있으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죠. ……돌이켜 보면 제가 대표님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유현우는 죽었잖아?”
죽은 자가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걸 판단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산자의 몫이었다.
“당신이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이거면 됐지.”
시간이 많다고 해서 진솔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세영의 말은 진심을 전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나는 팔을 붙잡고 있는 하세영을 내려다봤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어깨의 상처가 꽤 많이 벌어져 있었다.
“조금만 참아.”
힘의 정수를 사용한 나는 팔을 아래로 내렸다가 있는 힘껏 위로 들어 올렸다.
반동을 이용한 하세영이 몸을 위로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하세영의 주변으로 검은 손들이 나타났다.
나 역시 위쪽으로 뛰어오르며, 초월기를 사용했다.
푸른빛이 돌던 검신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급풍쾌검(急風快劍)의 초식을 밟았다.
칠흑의 검은 파괴를 위한 검이었다.
검에 스친 검은 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위쪽에는 또 다른 고유 결계가 있었다.
하늘 위에 멈춰 선 나는 위쪽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검을 사용했다.
파아아아앗.
엄청난 마력에 옆에 있던 구름 일부가 갈라졌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검이 고유 결계 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하세영의 주변으로 검은 별들이 생겨났다.
떨어질 뻔했던 하세영이 요령 좋게 별 위로 올라탔다.
별에서 광선이 나오기 전에 베어 버리고 별로 이동했다.
그때 나와 하세영의 근처로 흰 손이 다가왔다.
하늘검을 크게 휘두르자 손은 물론 주변에 있던 구름이 일제히 사라졌다.
손바닥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눈이 생겨났다.
[거, 더럽게 악취미네.]
나는 일부러 녀석이 들으라는 듯 신언으로 말했다.
[네놈이로구나. 내 계획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녀석이!]
[그래.]
이 녀석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라케시스’는 아니었다.
이 시련의 탑 자체가 과거의 공간이니, 녀석 또한 과거의 신이었다.
단적으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이런다고,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당연하지. 그리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었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
[너야말로 룰을 위반하고 있는 거 아닌가? 다른 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화타를 만났을 때 본 정황상, 폐쇄된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놈, 그 자식이 모든 걸 망쳤어!]
라케시스가 말하는 ‘그놈’은 유지한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유지한은 왕 게임에서 승리한 조건으로 몇 년 안에 머무르고 있던 하층부의 서버를 없애는 규칙을 추가했다.
라케시스가 그 서버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면 그야 화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 중층부까지.
내가 유지한을 빠르게 상층에 올려 버린 이유였다.
유저를 벌레 보듯 바라보는 것과 벌레 하나를 작정하고 죽이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여차하면 나를 포함해 다른 유저들이 유지한 하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해야 할지도 몰랐다.
유지한은 지천우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지천우는 그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자신이 살아남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할지 몰라도, 유지한은 아니었다.
아무리 본능이 있다고 해도, 유지한은 다른 유저들의 목숨을 발판 삼아 올라갈 만한 성격이 못 됐다.
여차하면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유지한은 그렇겠지.’
나 역시 유지한 하나를 살리자고 다른 유저들을 장기 말로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당신, 대체 뭘…….”
별을 밟고 넘어온 하세영은 나와 라케시스가 하는 듯한 대화를 들고는 흠칫 놀랐다.
나는 입술 근처로 손가락을 가지고 갔다.
뭘 물어보고 싶은지는 알겠으나, 지금은 당장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하세영에게 육신환을 던졌다.
하세영이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육신환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 약은…….”
“저도 알아요. 다른 유저들이 먹는 걸 몇 번인가 봤어요.”
몸이 빠르게 회복되자 하세영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런 이상한 약이나 만들고, 괴팍한 의사라니까요.”
나는 하세영이 한미래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걸 크게 부정하진 않았다.
“고유 결계 안쪽에 은희 씨가 있어요.”
“…….”
“전 은희 씨에게 들은 이야기로밖에 당신을 몰라요. 그래서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얼마나 친했는지도 모르구요.”
아래쪽에서 수 없는 공격과 마력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아래에 있는 유저들은 당장은 위로 올라올 수 없었다.
하세영은 내가 이은희를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친해.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소중해.”
“그럼 됐어요.”
하세영은 내가 처음 고유 결계를 향해 낸 공격으로 우리 둘이 저 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거 같았다.
“한 가지, 약속해 주시겠어요?”
“들어 보고.”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헛된 희망을 주는 것보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다.
“더 나은, 중층부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 약속할게.”
중층부뿐만이 아니라 그 위까지도.
나는 시련의 탑에 있는 모든 것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왜 대표님이 당신을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거 같네요.”
하세영이 아래쪽을 살짝 내려다봤다.
이만큼 올라왔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하늘검을 꽉 쥔 채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짓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라케시스가 만들어 놓은 검은 별들이 없는지라 하세영이 따라서 올라올 수는 없었다.
하세영이 대검을 밑으로 꽂아 넣자, 발밑에 있던 검은 별이 바스러졌다.
사라지기 직전의 별을 밟은 하세영의 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하세영이 옆으로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세상이 반으로 갈리는 것 같은 빛이 라케시스의 여러 개의 팔 중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어리석은 것!]
“드디어, 처음으로 말을 걸어 주는군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녀석은 중층부에 나타난 이후, 단 한 번도 유저들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처럼 인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화라는 건 서로 수준이 맞은 자들끼리나 하는 거였다.
인간이 곤충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하지 않듯이, 하세영이 느끼기에 신들이 유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딱 그랬다.
대검을 꽉 쥔 하세영이 고유 결계를 사용했다.
하세영의 고유 결계가 라케시스의 몸에 닿았다.
영롱한 빛을 머금은 오로라가 하늘에 떠올랐다.
하세영이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빛이 쏟아졌다.
‘쓰러트릴 필요까진 없다.’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정말 적어도 이 녀석에게 한 방 정도는 먹여야 분이 풀릴 거 같았다.
라케시스의 손 몇 개가 하세영에게 다가왔다.
손끝에서 생겨난 마법들이 하세영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무수한 별처럼 쏟아지는 공격들을 전부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대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상처가 심해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하세영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사화 엔터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바르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걸 부정하는 순간, 하세영이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거 같았다.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정작 유현우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 신에게 도전하려 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사화 엔터를 지키고, 위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했던 걸까?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기회를 얻은 게 아니라, 그냥 잃어버린 게 아닐까?
‘닿지 않아도 돼.’
나라는 존재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단 한 명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사라져!!”
남아 있는 마력을 끌어모은 하세영이 피투성이가 된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대지를 가르는 마력이 라케시스의 몸에 닿았다.
처음으로 거대한 몸에 상처가 났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구름에서 완전히 나온 녀석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을 마주친 순간 하세영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하세영도 여기까지 오는 내내 수도 없이 삶과 죽음의 순간을 반복해 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온몸이 부러져, 피투성이가 돼도 멈추지 않았던 하세영은 처음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여신의 눈빛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하세영이 목숨을 걸고 냈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을…….”
“그렇지 않아.”
위로 날아오른 지천우가 떨어지는 하세영의 몸을 안았다.
하세영과 지천우 주변으로 흰 깃털들이 흩날렸다.
“네가 한 짓은, 여태까지 한 일들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아.”
“네가 뭘, 안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어쩌면 그 약속을 지키는 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천우는 하세영을 안은 채,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손을 바로 세웠다.
검의 모양 때문인지 마치 성호를 그리는 것 같아 보였다.
“너는 최선을 다했어.”
“…….”
“이제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