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지키지 못할 약속은 (4)
최수현이 임우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씨, 번호 차단한 거 어떻게 알았지?”
“야! 그 정도로 연락을 안 받으면 어린애라도 알겠다. 인마! 너 내 메일도 스팸에 집어넣어 놨지! 그것도 풀어!”
“아, 싫다고.”
“아니. 이 자식이?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아이고, 자식새끼 키워 봤자 인생 헛산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었네.”
“누가 아들이야! 너 같은 부모 둔 적 없다고!”
진짜 부모라고 해서 임우현보다 나은 것도 없긴 하지만.
최수현은 차마 임우현의 앞에서 그 말까지 내뱉지는 않았다.
임우현은 직원을 시켜 가져오게 한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오물거렸다.
“나랑 당신이 연락하면서 안부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연락을 주고받아야 살았는지, 뒈졌는지 정도는 알 거 아니냐.”
“인터넷 검색해.”
최수현은 임우현과 자신의 안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상대는 청월 길드의 대표였다.
그런 그가 최수현이 한국에서 뭘 하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를 몰라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였다.
임우현이 최수현을 손가락질하며 빙긋 웃었다.
“넌 받아들이게 될 거야.”
“뭐래?”
“그 나이 먹고 반항하는 거면 사춘기가 너무 길지 않냐?”
“할 말은 다 했냐? 나 진짜 일어난다.”
더 들어 줘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최수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임우현이 등을 돌리는 최수현에게 말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메일 차단 풀어 봐.”
“…….”
“다음번엔 한강에서 유람선이라도 타면서 저녁이라도 먹을까?”
“됐거든?”
최수현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 * *
“……결아. 한결아! 정신이 들어?”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은영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인데.
“우, 우는 거야?”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버퍼링이 온 거처럼 조금 늦게 정신을 차리렷다.
“아, 너무 오랜만에 일어나서. ……누나를 보니까 반가워서 그래.”
“갑자기 울어서 놀랐어.”
“별거 아니야.”
나는 신경 쓰지 말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래, 이건…….’
내 일이다.
이쪽으로 돌아온 이상 괜히 티를 내서 좋을 건 없었다.
“…….”
“…….”
나와 은영 누나 사이로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 기억이 났다.
“누나, 그…….”
“돌아왔으니까 됐어.”
의외로 담담한 은영 누나의 태도에 괜히 더 눈치가 보였다.
“화난 거 아니지?”
“났었지, 엄청 났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더 강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은영 누나가 있는 힘껏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게 아니라, 말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은영 누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 역시…….’
내가 거기서 확실하게 라케시스를 죽였다면, 그리고 끼어든 그놈까지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 이은희가, 하세영이 죽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같아.”
“응?”
“내가 더 강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이젠 그런 일 없을 거야.”
“……그거 지난번에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정말 마지막이야.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아.”
은영 누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반쯤 걸터앉으며 은영 누나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야? 그, 무슨 일이 있었어?”
내 질문에 은영 누나는 내가 쓰러지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압축해서 설명해 줬다.
나는 대략 한 달이 좀 넘게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열도는 옛 일본 영토를 절반 정도 회복했고, 한국과는 동맹을 체결했다.
타락한 위드그라실이 존재하지 않는 열도에는 다시 게이트들이 나타났다.
“우선은 청월 길드에서 가장 먼저 움직였고, 나머지 길드는 차근차근 움직일 예정이라 들었어. 다른 국가에서도 지부 설립을 고민하는 거 같은데, 특히 미국 쪽에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라고.”
겉으로는 사과의 의미를 담아 열도에 있는 게이트를 정리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명목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그동안 버려두다시피 했던 열도에 이제라도 손을 대 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열도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중요한 게 두 가지 정도가 있어.”
“두 가지?”
“그게 음…….”
막상 말을 꺼냈으나 뭔가 사정이 복잡한 듯,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물을 꺼내 홀짝였다.
근데 병원 신세 너무 많이 지는 거 아니냐고.
“북한 문제인데.”
“북한?”
“응. 며칠 전에 북한에서 쿠데타가 있었다고 해.”
“푸웁…… 뭐?”
나는 하마터면 물을 뱉을 뻔했다.
쿠데타라니, 은영 누나가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열도 일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쿠데타야?”
북한이야 늦든 이르든 건드리긴 해야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사고가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일어난다고?’
아직 자세한 내용을 듣지는 못했지만, 이건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이런 짓을 벌일 인간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박진우겠군.’
내 말에 은영 누나가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 즈음인가 비공식적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는 연락을 받았대. 우리 측에서는 고려하겠다고 대답을 한 사이, 권경택이라는 녀석이 김해진의 부인인 리서영과 손을 잡고 김해진을 살해했고. 그런데 그 리서영이라는 녀석은 중화 길드 출신의 화교라고 했어.”
“중화 길드 측 간첩이겠네.”
퍼스트 게이트 사건 이후, 북한은 중국의 의존도가 말도 못 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럼 지금 북한은 권경택이 장악했어?”
“아니, 박영천 중장이라는 녀석이야. 원산부대 책임자라고 들었는데……. 북한 인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어, 권경택도 쿠데타를 일으킬 때 박영천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라고 하니까.”
“그런데 박영천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건, 포섭이 실패한 데 더불어 박영천이 권경택과 김해진의 뒤통수를 쳤다는 거네?”
그것 말고는 박영천이 권력을 장악한 이유가 설명되질 않았다.
은영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외부 개입이 있었거든.”
“외부 개입? 중화 길드?”
“나다 새끼야.”
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와 은영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최수현이 올라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짜고짜 와서 하는 말이 저런 이야기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야! 최수현! 너 내가 한결이 깨어났으니까 바로 오라고 연락했잖아!”
“중간에 시끄러운 놈한테 좀 붙잡혀서. 아, 일어났냐? 사람이 그 개고생을 하고 왔는데 팔자 좋게 잠이나 자고.”
“막 깨어난 애한테 할 말이야?”
“누나 됐어, 형도 여전해서 좋네! 뭐. 그런데 아까 나다 어쩌고 말하지 않았어?”
“아. 박영천 그거. 내가 했다고.”
최수현이 오는 길에 사 왔다며 편의점 봉투를 나에게 휙 던졌다.
봉투 안에는 초코바며 라면, 사탕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 환자한테 이런 걸 선물로 주는 녀석이 다 있어.”
“환자는 얼어 죽을, 너 의사가 하는 말 못 들었냐? 멀쩡한데 의식만 없었다잖아.”
“팔다리가 부러져야만 환자는 아니잖아.”
은영 누나와 최수현이 투덕거리는 걸 보니 이것도 여전한 듯싶었다.
나는 봉투 안에서 꺼낸 초코바를 입에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먹고 싶었다.
“내 얘기는 됐고, 그……. 박영천을 형이 포섭했다는 말이 그러니까…….”
“하아, 최수현 쟤 북한 다녀왔어. 미쳤지 진짜.”
“누가 보면 나 혼자 갔다 올 줄 알겠다! 박시우랑 유지한 그놈도 갔다!”
“간첩 신고 포상금이 얼마였더라.”
“허락받고 갔다고 허락받고! 그런데 넌 북한에 다녀오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북한 소식은 잘 아냐? 김해진이 망명 신청한 거 그거, 진짜 몇 명밖에 모를 텐데. S급 던전 빈자리 알아보러 다니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비밀.”
은영 누나가 말해 주지 않겠다며 입을 다물었다.
최수현도 별로 캐낼 마음은 없어 보였다.
“잠깐, 박시우랑 유지한이랑 셋이 갔다 온 거예요?”
“그래.”
“세상 안 어울리는 조합이네.”
용케 별일 없이 무사히 다녀온 게 신기한 구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은영 누나가 말한 외부 개입이라는 게 설마 세 사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최수현이 병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소리야?”
“박영천과 리서영이 손을 잡고 김해진을 몰아내려고 했던 배후에는 중화 길드가 있다. 애당초 김해진은 리서영을 중화 길드의 압박에 못 이겨 부인으로 맞은 거고, 박영천은 친중파 군인이니까. 리서영의 아들인 김진욱을 최고 지도자로 내세울 계획이었던 거지.”
“헐, 아들이 있었어?”
은영 누나도 그건 몰랐다며 되물었다.
“두 살인가 그래. 그런데 리서영이 임신을 핑계 삼아 중국에 머물렀단다.”
중국에 갈 핑계야 넘치고 넘쳤다.
의료 시설이라든지, 태교나, 임신부의 안정 같은 것들은 말 그대로 좋은 핑곗거리였다.
“아들을 데리고 온 것도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겠네?”
“그렇지. 그러니 진짜로 아들을 낳았는지, 임신했다는 기록이 사실인지, 그 아들이 정말 김해진의 아들인지 아무것도 모르지. 뭐, 차차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까.”
“확인?”
“어, 박시우가 리서영을 데려오고 있거든.”
“제정신이야? 대체 왜…….”
“리서영의 아버지가 우리 쪽 중국 첩자였으니까. 뭐, 본인은 그것도 모른 채 살고 있었던 거 같지만. 어쨌든 그건 박시우가 알아서 해.”
한국 첩자였다는 말에 은영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은영 누나는 북한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자세한 내막을 알 턱이 없었다.
“김해진은?”
“죽었어.”
최수현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리켰다.
자살은 아닌 거 같고, 누군가에게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는 의미 같았다.
“김해진이 망명 요청을 했다는 건 사전에 박영천과 리서영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걸 알았다고 보는 편이 맞는데……. 망명 요청에 시간을 끌었다는 건…….”
정말 검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면 최수현과 두 사람이 북한에 가는 일은 없었을 거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생각보다 의사 결정이 빠른 편이었다.
상황이 유리하게 변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래, 김해진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 대신 박영천이라는 녀석을 내세운 거고? 녀석은 한국 정부에 우호적인 사람인가 보네?”
“뭐, 지금은. 녀석은 북한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놈이니까.”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박진우는 정말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