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판도라의 상자 (2)
이하린이 테이블 위에 인원수만큼 새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나머지 전자 기기는 전부 반납들 하시고. 연락은 이걸로 하면 돼.”
“저기. 인터넷은 되는 거겠죠? 제가 게임 출석 체크가 하루라도 끊기면 안 되거든요.”
“그 말만 안 했으면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하린의 중얼거림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의 존재 이유가 고작해야 게임이라니.
“그래도 한 달 동안 인터넷이 안 되는 건 좀…….”
채설하도 게임과는 별개로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속삭였다.
하긴 한 달 동안 서울 한복판 건물에서 인터넷도 사용하지 못한 채 있어야 한다는 건 감금보다 고문에 가까웠다.
탑에 비유하자면 온갖 정보를 알려 주던 상태창을 금지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에이, 다들 너무 나갔다. 그치? 그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하고 써.”
다행히 인터넷은 된다는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수현이 가지고 있던 전자 기기들을 하나씩 꺼내며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형, 대체 뭘 얼마나 가지고 다니시는 거예요?”
최수현을 시작으로 다른 유저들도 하나둘씩 자신의 휴대폰이나 디지털 시계 같은 걸 풀었다.
가장 먼저 휴대폰을 챙긴 최수현이 새 휴대폰을 이리저리 살폈다.
화면을 오래 보고 있길래 뭔가 싶어서 최수현을 흘끔 바라봤다.
“야, 해킹 툴을 심었으면 숨기는 정성이라도 보여라. 좀.”
최수현의 말을 듣고 나 역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본 앱과 함께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파란색 앱이 깔려 있었다.
“해킹이 아니라 합법적인 보안 프로그램이거든? 인터넷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그 조건이야.”
“이럴 줄 알았어.”
한마디로 내부에서 진행하는 모든 것들을 통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봤자 누군가가 작정하고 정보를 빼돌리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일단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배신할 가능성은 작았다.
다들 길드 대표로 온 자들이니 말이다.
잃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보수적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임시로 만든 숙소를 포함해서 한동안 이런저런 설명이 이어졌다.
대충 설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최수현이 빨리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바쁘다면서. 얼른 가라.”
“흥, 말 안 해도 갈 거든? 그럼 나중에 봐요. 다들.”
이하린이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왁자지껄했던 회의실 내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판도라의 상자라 최수현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는데.’
제목만 봐도 내부에 있는 자료들이 장난이 아니긴 했다.
“저, 그런데 최한 길드 건이 아니라면 저희에게 대체 뭘 시키려는 걸까요? 잘은 모르지만, 이 자료, 보는 것만으로도 실해 위협을 당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최재형의 부하인 오형식과 채설하가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뒤늦게 두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주고받았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 나 청월 길드 나온 지 몇 년인데 아직도 형님 소리냐?”
“한번 형님은 죽을 때까지 형님이죠. 그보다…….”
“보면 알아.”
최수현이 태블릿에 있는 자료를 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최수현은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하린이 두고 간 이어폰을 챙긴 최수현이 이어폰을 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되지 않아 책상을 끌고 구석으로 가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거, 작정하고 본격적으로 해 보겠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조용히 저장된 자료들을 열었다.
[중화길드_최한 길드_투자 금액 보고서_최종안]
[최한길드_간첩 의혹 헌터 목록]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문제가 되는 최한 길드와 중국 중앙 정부가 운영하는 중화 길드의 문제였다.
회의실 내부의 분위기가 다른 의미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그냥 자료를 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다들 헌터라 그런지 갑작스러운 감금 생활에도 하루 정도 지나니 금방 각자 적응을 했다.
사실 던전에 있는 것보다야 서울 한복판 협회 건물만큼 천국인 곳이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요령껏 자료가 있는 회의실과 건너편 복도에 있는 숙소를 왔다 갔다 하며 생활했다.
나는 복도 끝에 있는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고층이라 그런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뷰가 장난이 아니었다.
최수현이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앉았다.
“뭐야, 다 봤어요?”
“절반 정도 봤다.”
“못 해도 한 달은 필요할 거라더니. 일주일 만에 반절을 처리했다고요?”
“동영상은 손도 못 댔어.”
사흘이 지나면서 회의실의 분위기가 한 번 더 바뀌었다.
이런 종류의 자료들은 앞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개인의 호기심 순으로 손을 대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수현이 커피 컵을 열어 그 자리에서 아메리카노를 절반 정도 마셨다.
내가 알기론 하루에 서너 잔은 가볍게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위는 괜찮은 건지 몰라.
“젠장, 이거 개인 정보 보호법 위반이라고!”
“이제 와서요? 그보다 저는 말도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서 그거 하나로 정리하는 형이 더 신기한데요?”
“정리가 될 리가 있겠냐.”
최수현이 그냥 던진 말이라며 같이 온 쿠기를 뜯어 입에 넣었다.
“그거, 제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궁금하신 거죠?”
“…….”
“형이랑 저랑 눈치 싸움할 필요는 없잖아요. 시간 차이일 뿐, 결국은 다 알게 될 텐데.”
“하아, 그래. 봤냐?”
“둘째 날에 봤어요.”
“생각보다 일찍 봤네, 그럼 전부 다 봤겠네?”
“넵.”
태연한 내 대답에 최수현이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최수현이 저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형이 왜 초아 씨에게 미안해서 그랬다는지 이제야 알 거 같네요.”
“절대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형만 비밀이 폭로된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겠어요?”
아마 오늘 읽은 자료는 여기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외부에 발설하지 못할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점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말이다.
최수현의 비밀을 포함해 모여 있는 다른 유저들의 비밀, 그리고 처음에 말했던 길드와 협회의 비리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하린이 세컨드 게이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괜히 한 게 아니었다.
“리벨리 바이오 제약의 막내아들.”
“아오,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놀리는 거냐?”
“아니 뭐! 거기 적혀 있는 대로 말한 건데 왜 그래요! ……막내아들이자 호문쿨루스 계획을 폭로한 주범.”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수현의 죽은 둘째 형이 한 일이었다.
퍼스트 게이트 이후 제약 회사들은 이름만 이럴 뿐, 단순히 약을 만드는 회사는 아니었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각종 엘릭서나 특수한 물건들, 그리고 몬스터에 대한 유전적인 연구 등도 진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과학자들은 던전이나 몬스터라는 건 두려움의 대상을 넘어서 또 다른 연구의 가치, 신인류의 탄생이라 보는 자들도 있었다.
리벨리 제약은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의 대형 기업이었다.
“과거 라온 길드 소속의 S급 헌터이자 박시우의 약혼녀였던 유세연을 죽인 것도 이 인간들이잖아요.”
“그래, 라온 길드 내에서도 그녀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니었지.”
한국은 헌터 길드와 사업체는 분리해서 운영해야만 하는 법이 있었다.
그 때문에 기업가들은 길드에 투자나 협력을 하거나, 혹은 헌터에게 경호를 부탁하기도 했다.
유세연은 한동안 리벨리 제약 쪽 사람들의 경호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고모님의 최측근 경호원이었으니까.”
“지금은 미국에 있다면서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몰랐던 걸 협회에서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지.”
최수현이 컵 끝을 입술로 꽉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세연은 리벨리 제약의 내부 폭로자이자 죽은 최수현의 형과 협력한 이력이 있었다.
“큰형인지 하는 사람은 호문쿨루스 관련 기업 정보 싹 들고 중국으로 넘어갔고, 리벨리 제약은 국내는 정리하고,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
“그래.”
“그 과정에서 한국 협회 및 정부와 미국 정부가 리벨리 제약을 놓고 빅딜을 했고, 그 결과물이 송도 국제 학술 도시였고.”
송도 학술 도시는 말이 학술 도시였지, 한국의 해외 투자와 해외 진출을 목표로 세워 놓은 도시였다.
중화 길드가 빠르게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송도 국제도시를 핑계로 한국에 대한 미국 의존도가 낮아지는 걸 원하지 않았고, 한국은 한국대로 해외로 진출을 하거나 미국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한 게 전 협회장, 장세현. ……그런데 자료에는 실종이라고만 나오던데?”
“실종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확실해요?”
“진우 형님 말이니까 사실일 거다.”
“형은 그럼 그쪽 집안이랑 이제 인연이 없는 거네요?”
내가 커피를 홀짝이며 몸을 돌리자 최수현이 쿠키를 반 뜯어 입에 넣었다.
“너 나랑 관련된 자료 다 봤다면서.”
“아, 중간에 숫자랑 뭐가 엄청 어려운 말들이 있어서 몇 개 패스하긴 했어요. 그러고 보니 형 이름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몇백 장이 넘는 차트를 일일이 볼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적당히 넘긴 자료 중 하나였다.
“리벨리 제약이 미국으로 넘어가긴 했어도, 그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명 화학 쪽 그룹이었어. 미국에 상장되어 있었던 거고.”
원래 한국에 있던 회사가 사라지면서, 미국에 있던 생명 화학 그룹이 리벨리 그룹의 본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미국 그룹 쪽은 원래 둘째 형님이 물려받을 예정으로 이미 최대 주주셨지. 그 주식이 그대로 나한테 다 있다.”
“십몇 퍼센트 어쩌고 본 거 같은데, 그게……. 아니, 근데 그래도 되는 거예요?”
기업이 길드를 운영할 수 없는 거처럼, 헌터들도 일정 금액 이상의 지분을 가지는 건 불법이었다.
“해외는 예외일걸?”
그러고 보니 옛날에 박시우가 ACKO라는 곳에 투자했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말이지.
“그, 그래요? 그런데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요?”
“정확하게 17.32%.”
“그게 얼마나 큰지 감이 잘 안 오는데.”
“미국으로 넘어간 집안의 사람들 지분 다 합친 거랑 비슷해. 박시우가 가지고 있는 거랑 합치면 우리 쪽이 미세하게 크긴 해.”
“난 형이 그냥 벼락부자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최수현이 컵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그럼, 그 집안에서 형을 엄청 싫어하지 않겠어요?”
“싫어하는 수준이면 다행이지 않겠냐?”
최수현 때문에 도망치듯 미국으로 넘어갔는데, 알고 봤더니 내부 고발자에 미국 그룹 경영권 승계를 끝낸 둘째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둘째 아들이 죽기 전에 사생아인 최수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넘겨 버렸다.
심지어 최수현은 아직도 주식을 그대로 들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었다.
“형, 나 만나기 전에 던전에서 죽을 뻔한 적 있지 않아요?”
“그래.”
“그것도 이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