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오늘은 유재희와 박윤기 PD, 그리고 윤대웅의 미팅이 있을 예정이었다.
박윤기 PD는 피아노 연주자가 섭외 되어 안도감이 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아직 먼 이야기였지만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인 퍼스트 마이크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다른 프로그램을 론칭할 생각이었고.
그 프로그램에 유재희와 그때 본 잘생긴 보컬을 짧게 출연 시킬까 했다.
그게 힐링물이던 오디션 프로그램이던 간에 일반인을 출연시켜 프로그램을 만드는 시도를 자주 하던 박윤기 PD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보컬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송 쪽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오늘 있을 미팅부터 잘 끝내야 했으니까.
미팅 장소는 성수동에 있는 TY 엔터테인먼트의 합주실이었다.
TY 엔터테인먼트는 윤대웅이 소속된 기획사였고.
오늘은 미팅 겸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기 위해 합주실에서 모이게 된 것이다.
박윤기 PD가 직접 섭외를 했지만 유재희의 연주가 윤대웅의 마음에도 들어야 하니까.
운전대를 잡은 박윤기 PD는 오늘이 정말 기대됐다.
자신의 세 번째 작품인 퍼스트 마이크.
이번엔 꼭 잘 돼야 한다.
박윤기 PD는 몇 년 전 취재 겸 망원시장을 방문했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거기엔 당시 자신이 기획하고 있던 첫 작품의 기획서가 들어 있었고.
결국엔 가방을 찾지 못했고 타이밍을 놓쳐 데뷔가 불발 되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바닥을 굴러야 했고.
꾸역꾸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아직도 그렇다 할 대표작은 없었다.
앞서 만든 두 개의 작품은 성적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퍼스트 마이크가 자신의 원대한 첫 발자국이 되어야 했다.
왠지 예감이 좋았다.
운이 좋았던 건지 가수 캐스팅이 너무 수월했고.
불발 되었던 피아노 연주자도 늦지 않게 갈아 치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논란 있는 놈 보다는 급하게 섭외 되었어도 재희 씨가 나아.”
기분 좋은 예감과 함께 부드럽게 코너링을 하고 나니 저 멀리 TY 엔터테인먼트가 보였다.
* * *
[이야, 너한테는 되게 오랜만이지 않아 이런 느낌.]
‘그러게 말이야. 엔터테인먼트라니. 진짜 오랜만인 것 같다.’
조금 전 TY 엔터테인먼트 앞에 도착한 나는 박윤기 PD에게 전화를 걸었고.
주차를 하고 난 후 데리러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박윤기 PD가 오기 전까지 사옥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JH 엔터테인먼트를 나오게 된 지 반년이 좀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악마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겠지만.
나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복학하고 동아리에 들어가고 공연까지 했다.
홍차와의 이슈, 김종필을 정리하게 된 일.
게다가 예전과 달리 나를 알게 된 사람도 많아졌다.
사건이 있고, 나의 환경이 변하게 된 이 반년의 기간은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되돌아보니 그 전의 일이 너무나도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에 다시 오게 되는 것이 정말이지 어색했다.
“재희 씨!”
“아, 안녕하세요 피디님.”
박윤기 PD가 나오는 것을 보니 사옥 안에다 차를 댄 것 같았다.
“자, 일단 들어가시죠. 날이 많이 덥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박윤기 PD는 경비원에게 허락을 받고 TY 엔터테인먼트 사옥 안으로 향했다.
JH 엔터테인먼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회사였다.
JH 엔터는 가수를 배출하는 회사가 아닌 반면 TY 엔터테인먼트는 여러 가수와 배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층 로비에서부터 소속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전시해놓았다.
거기에 어쩐지 푸근한 노란 빛 조명과 바닥, 벽의 재질까지.
음악적인 실속은 좋았지만 눈에 보이게 내세울 건 없던 JH 엔터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그 외에 실속은 좋지 않은 회사였지만.
“잘, 지내셨나요”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우린 잘 모르는 사이었기에 분위기가 어색했나보다.
박윤기 PD의 안부 인사를 듣자 비로소 어색한 이 공기가 폐에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아, 네. 뭐, 보내주신 악보 보면서 연습하면서 별일 없이 지냈습니다.”
“아, 맞아. 피아노는 좀 칠만 하던가요 대웅 씨한테 물어보니 난이도가 꽤 높은 곡이라던데….”
“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놓이네요.”
나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박윤기 PD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왼편에 바로 보이는 합주실.
합주실 내부에서는 이미 익숙한 목소리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오, 네가 좋아하는 그 양반 안에 있나보네]
‘응, 이제 진짜 만난다…….’
박윤기 PD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대웅 씨. 안녕하세요.”
“아, PD님. 오셨어요”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도 박윤기 PD를 따라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연주자분….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대웅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허벅지에 손바닥을 몇 번 문지를 후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크…. 소녀 팬 납시셨구먼.]
두근대는 나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의 소녀 감성을 악마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곧 합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우선 내가 방송에 출연하겠다는 건 어느 정도 결정이 난 사안이고.
오늘 중점적으로 해야 할 회의는 무대에 대한 것이었다.
“자, 우선은 앉아서 이야기 해볼까요”
윤대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와 박윤기 PD, 윤대웅은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윤기 PD는 태블릿 PC를 꺼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자, 재희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 앞에서 무대를 하실 거예요.”
“네.”
“여기 보이시죠 여기가 무대 앞 쪽이에요.”
“아하, 네, 이해했어요.”
박윤기 PD는 전체적인 무대의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리허설부터 본 무대, 심지어는 대략적인 대기 시간까지.
박윤기 PD가 알려준 내용은 생각보다 세세했다.
[이야…. 진짜 방송 타는 거야 기대 되는데]
악마도 이번엔 꽤나 기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녀석은 과거에 방송을 많이 해봤겠지만.
이 시대에서 방송은 악마도 처음일 테니까.
박윤기 PD의 설명이 끝나고 이번엔 윤대웅이 나섰다.
“이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피아노와 보컬의 합이에요.”
“네.”
“그렇기 때문에 재희 씨랑 제가 많이 맞춰봐야 하는 건 당연하고. 카메라를 좀 잘 봐주셔야 하는데 그건 많이 안 해보셨죠”
“아, 카메라 앞은 처음이라….”
“음, 그럼 그건 너무 크게 강요 안 할 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네, 우선은 알겠습니다.”
“이럴게 아니라 합주 해보면서 이야기 할까요”
“네, 좋습니다!”
난 패기 넘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가슴이 떨려왔지만 잘 해내야 했다.
박윤기 PD가 날 섭외했고 난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합주가 망한다면 바로 잘릴지도 모른다.
방송은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게 당연하니까.
잘 해내야 했다.
“본 무대에서는 그랜드 쓸 건데 오늘은 연습이니까 저걸로 연주하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윤대웅이 내게 직접 말을 걸 때마다 미칠 것 같았지만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팬심을 내비추기에 나는 일을 하러 온 거였고.
괜한 분위기를 만들면 멋진 공연을 만드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
음악은 언제나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난 윤대웅이 말해준 전자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악보도 준비 되어 있었고 전원은 이미 켜져 있었기에 바로 피아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손을 풀고 피아노를 칠 준비를 마치니 윤대웅이 마이크를 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이 곡은 피아노와 윤대웅의 목소리.
그리고 오늘은 오지 않았지만 다음엔 베이시스트와 기타리스트, 드러머까지 온다고 했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단 둘이서만 테스트 겸 합주를 해보기로 했다.
“재희 씨 준비 되셨나요”
“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네.”
나는 양 손목을 한 번 돌린 후 연주를 시작했다.
일주일이 안 되는 시간동안 연습을 많이 해두어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난 느린 속도로 코드와 아르페지오를 편성했다.
윤대웅은 나의 연주 위에 아주 탄탄한 발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야…. 저 양반 역시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구만.]
악마의 입에서 이정도의 칭찬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너무 놀라 실수를 할 뻔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들어줄만 한 정도라던가 나쁘지 않다는 말을 했겠지만.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다’.
이 말을 들으니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 귀는 틀리지 않았다.
난 계속해서 연주를 이어나갔고 윤대웅과의 기분 좋은 합주는 순조로웠다.
초반 도입부는 어려울 게 없는 연주였다.
본격적인 고난이도의 연주는 이 다음 파트에 바로 나타난다.
느린 BPM으로 구성된 인트로가 끝나면서 난 같은 코드의 건반을 빠르게 여러번 누르며 텐션을 높였다.
악보에 나와있듯 이 부분은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연주해야 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부분이었기에 대충 친다고 해도 그걸 알아차리는 대중들은 적겠지만.
이런 부분을 세심하게 해내야 곡의 디테일이 살아나는 법이다.
난 터치를 최대한 섬세하게 이어나가며 기민한 속주를 이어갔다.
이 곡은 프레디 머큐리가 속한 밴드의 유명 곡을 오마주해서 만든 곡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멈추지 마 또한 그 곡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이었기에 어려운 연주 투성이었지만 꽤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난 악보에 시선을 고정하는 중이었다.
익숙한 느낌의 곡이었지만 확실히 난이도는 높은 곡이었다.
내가 받은 10년 후의 피아노 연주 능력으로도 바로 커버하기 어려운 정도의 곡.
어지간한 곡이라면 온전히 즐기며 연주를 했겠지만.
지금은 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중요한 첫 합주이니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야 했으니까.
윤대웅은 마찬가지로 노래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우리 둘은 전혀 교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서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듣기만 하기에는 멋진 연주와 노래를 해낼 수 있었다.
여러 옥타브를 넘나드는 연주와 이 곡의 주된 무기인 재빠른 컴핑.
심심하면 나타나는 긴 글리산도와 짧은 슬라이드에 쉴 새 없이 풀어지는 텐션까지.
뭐 하나 쉬운 연주가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신경 쓸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난 최대한 여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 이유는 윤대웅의 보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피아노가 전면에 배치되는 곡이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윤대웅이다.
그렇기에 윤대웅의 노래에 어울리게 즉각즉각 힘을 조절해야 했다.
그리고 나의 세심함을 알아챘는지 그럴 때마다 윤대웅은 내 쪽을 바라봤다.
정말 사소하고 작은 부분이라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윤대웅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디테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시 BPM이 느려지는 마지막 아웃트로까지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윤대웅 또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래했고.
곡이 끝나자마자 윤대웅은 나에게 다가왔다.
“바로 이거야! 아주 좋았어요!”
얼마나 발성이 큰지 그 소리에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헉, 네.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윤대웅은 악수를 청하며 환해진 얼굴로 날 바라보며 칭찬했다.
환희로 가득한 윤대웅의 표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여태 음악을 하면서 행복했던 날이 정말 많았지만.
오늘은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정도로 내 인생에 있어 행복한 날이었다.
그 탑스타의 음악에는 악마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