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촬영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난 윤대웅 대표와 백기훈 매니저님과 함께 식사를 함께 했다.
회사 법인 카드를 사용하면 후에 나의 식비 예산으로 정산이 되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히 대표님의 사비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회사 근처에 그리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적당한 일식집.
모든 자리가 룸으로 되어있어 프라이빗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긴장 풀려서 그런지 재희 씨 야무지게 드시네요.”
“저, 사실 배가 너무 고팠어요.”
[촬영 중에 꼬르륵 소리 마이크에 다 들어갔을 것 같던데]
‘헐, 그건 안돼….’
“하하, 많이 먹어. 그나저나 기훈이 자네는 재희한테 계속 존댓말 하는 건가”
“아, 네. 습관이 돼서 말이죠.”
“매니저님 말 놓으셔도 돼요. 그게 더 편하지 않으세요”
“아, 뭐 천천히 해보도록 하죠.”
이렇게 셋이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사실 조합보다 더 내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오늘 녹화를 잘 끝냈는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차를 타고 식당으로 오는 길에 악마는 내게 생각보다 훨씬 잘 한 것 같다고 말했고.
내가 생각해도 말실수를 하거나 과하게 버벅거린 적은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고.
매니저님과 대표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나저나 저 오늘 잘 했나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뭘 어떻게 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재희 씨 오늘 정말 잘 했어요. 사실 평소에 얌전하셔서 말씀을 잘 못하면 어쩌지 걱정을 좀 했었는데 걱정 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 그래요”
백기훈 매니저는 촬영이 이어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모니터링했다.
“그래, 재희 너 오늘 생각보다 훨씬 잘 했어.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도 잘 하고 모난 행동도 안 했지.”
[맞아, 잘 했어. 근데 그건 알아둬야 해. 네가 방송이 처음이라 다들 배려를 해준 덕분이었어. 윤대웅 이 녀석도 마찬가지고.]
‘음, 확실히 날 배려해주는 게 느껴지긴 했어.’
윤대웅 대표님은 당연했고 MC들과 다른 게스트 선배님들도 내가 토크 지분을 잘 챙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만약 오늘 촬영장에 나와 비슷한 연차를 가진 간절한 연예인이 나왔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연차가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지분에 욕심이 없어 보였다.
본인이 원하는 영화 홍보는 충분히 했고 이야기도 잘 나눴으니 남은 건 이 귀여운 신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내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잘 한 덕도 있겠지만.
악마의 말대로 모든 출연진이 날 배려해준 덕이 컸다.
첫 방송이라 그런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게 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게 되었다.
“대표님께서 힘 많이 쓰셨어요. 오늘 게스트 선배님들께 재희 씨 잘 좀 부탁한다고.”
“아, 정말요”
[오 그래 어쩐지 다들 네 이야기 너무 잘 들어주더라. 토크 중간에 치고 들어오지도 않고.]
“그런 말은 뭐하러 해”
“에이, 재희 씨도 알아야죠. 굳이 재희 씨 활동 다 끝난 이 타이밍에 마이스타일 출연 한 것도 게스트 미리 알아보고 대표님께서 PD님한테 부탁한 거잖아요.”
“큼…. 뭐, 첫 예능이니까. 처음부터 난이도 높일 필요는 없잖아.”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윤대웅 대표님께서 날 위해 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야! 역시 우리 대표님은 다르시네!]
‘너 조금 전까지 대표님한테 ‘녀석’이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위대하신 윤대웅 대표님이시지.]
‘음…….’
윤대웅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관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연예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는 초짜 대표가 아니라.
이미 이 바닥을 20년도 넘게 굴렀던 베테랑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하지만 내가 매번 오늘 같은 판을 만들 수는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방송 나갈 때 긴장 단단히 하고.”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 잘 하겠습니다.”
[누구랑 너무 다르네 그치]
‘응, 그러게 말이야.’
윤대웅 대표는 JH 엔터의 김정혁 대표와는 너무나도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소속 아티스트와 엔터테인먼트는 필연적으로 그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다.
보편적으로 한 쪽이 잘 되면 다른 한 쪽도 잘 되기 마련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윤대웅 대표가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은 당연히 회사를 위한 일이다.
그것은 동시에 날 위한 일이기도 했고.
이렇게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내가 던질 요구도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다.
* * *
유재희와 윤대웅의 마이스타일 촬영이 끝나고 며칠 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스톤 엔터테인먼트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대표실은 물론 기획실, A&R 팀의 프로듀싱 룸 등 망원동의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추는 중이었다.
“예산 때문에 미쳐버리겠네 진짜….”
이윤정 기획 팀장은 스톤 엔터테인먼트의 전반적인 업무를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확실한 업무 분담이 어려운 신생 기획사라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우리 회사 돈이 너무 적네요.”
“대희 씨, 그런 건 조용히 말 해.”
“아, 죄송합니다.”
유재희는 아직 엉성하지만 첫 신보를 공개했고.
그에 따른 여러 흔적을 남겼다.
라디오 출연과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마이스타일 예능 출연.
그리고 스톤 엔터테인먼트의 공식 유튜브 채널엔 각종 비하인드 영상이 공개되었다.
물론 조회수와 댓글의 수는 아직 처참했지만.
이 또한 후에 유입될 팬들을 위한 소중한 떡밥이 되리라.
아무튼 유재희는 시작을 알렸지만 메이지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이종인에 의해 곡은 확보가 되었지만.
메이지가 컴백을 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유재희는 신인이라 전과 비교될 모습이 없었기 때문에 음악 방송에서 세트장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뮤직비디오 제작에도 최대한 돈을 아꼈다.
하지만 메이지는 달랐다.
연차가 꽤 됐고 그동안 보여준 모습이 많았기에 그보다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연예인은 보이는 게 전부다.
전에 비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스톤 엔터에 와서 초라하게 변했다는 말을 들을 지도 몰랐기에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
“돌겠네. 세트 비용은 고사하고 앨범 제작만 얼마를 써야 하는 거야…. 대희 씨. 촬영 팀은 알아봤어”
“네, 네 군데 알아봤는데 전부 단가가 좀….”
“하아…. 미치겠네….”
역시 돈이 문제였다.
세상에 자기 돈으로 사업하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돈을 끌어다 쓰기엔 위험 요소가 많아 함부러 예산을 편성하기 힘들었다.
“팀장님, 벌써 12시 넘어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내일 오전에 재희랑 회의도 있잖아요.”
“어, 괜찮아. 대희 씨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 봐.”
“아, 아닙니다.”
스톤 엔터테인먼트는 윤대웅이라는 든든한 어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신생 기획사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는 중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이윤정 기획 팀장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기획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퀭한 눈만 봐도 그녀의 업무량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팀장님 오셨어요”
“네….”
“아니, 아직 안 들어가신 거예요”
“네…….”
“쉬엄쉬엄 하세요….”
추수현 A&R 팀장은 머리도 감지 않고 어제와 같은 차림의 이윤정 팀장의 몰골을 보며 경악과 존경의 마음을 동시에 표했다.
회사라면 보통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맞지만.
이런 몰골로 회사에서 일 하는 걸 모두들 이해하는 눈치였다.
“이따 재희랑 회의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안 늦게 회의실로 갈게요.”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유재희는 윤대웅 대표를 통해 회의를 열어달라고 부탁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회의의 안건은 앞으로 유재희가 선보일 컨셉의 방향성이었다.
유재희가 어떤 걸 가지고 올지 아무도 몰랐지만.
이윤정 팀장은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회의까지 잡혀 조금은 짜증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유재희가 돕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 * *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응, 며칠 동안 검토도 했고. 더 추가 할 내용은 없는 것 같아.”
[아, 충분하지. 여기서 뭘 더 고쳐 이정도면 완벽해.]
이종인은 어젯밤 우리 집에서 잤다.
늦은 시간까지 우린 오늘 회의에서 쓸 PPT를 검토했고.
더 이상 수정할 것이 없을 때까지 안건을 보안했다.
이종인이 나와 함께해준 이유는 이 회의를 열게 된 계기가 이종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종인은 언젠가 나에게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난 나의 음악에 사용할 매체를 구상했다.
이종인은 그 이야기 때문에 걸 그룹을 덕질하는 은밀한 취미를 내게 들켜버렸지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줬기에 난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가자마자 유인물 복사할 테니까 넌 가서 회의 준비 해.”
“오, 정말 고마워. 부탁 좀 할게.”
“몇 분 오시지”
“대표님, 매니저님, 윤정 팀장님, 수현 팀장님, 이사님, 실장님…. 총 여섯 분이네.”
“오케이…. 오늘 잘 해보자고!”
[해보자고!]
* * *
회사에 도착한 난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우리 회사 회의실엔 빔 프로젝터가 구비되어 있었고.
오늘 회의에는 이걸 사용할 생각이었다.
[소리 잘 나오는지 테스트 해봐.]
“아, 맞네. 어디 보자…. 일단 화면은 잘 나오고….”
악마의 말을 듣고 음원 파일을 재생했다.
“아, 잘 나오네.”
[음질이 영….]
“어쩔 수 없지 회의실 스피커잖아.”
[너 그리고 김도화한테 매일 아침 문안 인사라도 드려라.]
“응, 이참에 그냥 누님이라고 부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야.”
김도화는 내 PPT에 쓰일 각종 이미지 제작에 도움을 줬다.
일이 바쁘다고 매일 징징대는 김도화지만.
내 부탁이면 다 제쳐두고 달려와주는 김도화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이번엔 밥 말고 더 좋은 무언가를 선물로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회사에서 정산 받을 것보다 앨범을 제작하느라 사용한 빚이 더 많았지만.
나중에 정산을 받으면 가장 먼저 김도화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겠다.
[다 됐네. 이미지 좀 깨지고 음질 후진 것 빼면 모든 게 완벽해.]
“기운 빠지게 말하는 화술 같은 건 그 세계에서 배우는 거야”
[아니 이건 그냥 팩트인데]
“에휴…. 무슨 말을 하겠니….”
-덜컥.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해”
“아, 아니야. 아무것도. 발표 연습 중이었어.”
악마와 대화하다 보니 이종인이 복사를 마치고 회의실로 도착했다.
“하하, 발표 연습은 무슨 긴장 되냐”
“아니, 뭐. 발표야 아무것도 아니지 공연에 비하면.”
이종인은 내 말에 씩 웃으며 테이블 위에 복사해온 유인물을 하나씩 얹어놓기 시작했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난 건가”
“응, 그런 것 같아. 그럼 직원분들 모셔올게. 종인이 너도 준비 해줘.”
“오케이.”
이종인은 PPT를 조작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고.
난 직원분들을 불러오기 위해 잠시 회의실을 떠났다.
그 탑스타의 음악에는 악마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