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급강하
그 이후로 몇 번, 동대륙 순양함의 주포가 서대륙의 지대공 포대가 있는 곳을 훑었다. 서대륙에도 대형함에 대비한 지대공 포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형함이 온다면 동대륙으로부터가 아니라 우주에서 올 것이라는 판단에 대륙의 중심에 위치하여 수평선 너머의 동대륙 구축함을 타격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두 척의 동대륙 순양함은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해안가 중심으로 펼쳐진 지대공 방어망을 무력화했으니, 서대륙군은 탄도탄을 요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동대륙군 함선들이 진입할 때도 적잖은 곤란에 직면해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까.
“몽블랑에서 퇴각을 건의합니다. 현재 이쪽에 저 순양함을 격침할 수단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지금 유진이 몰고 있는 함선이 킬리만자로였다면 또 모르겠다. 선체에 무식한 크기의 레일건을 때려 박은 그 함선은, 위력만큼은 저 순양함에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정도였다. 출력 한계 문제로 유효사거리까지 순양함과 필적하진 못하지만, 상황에 따라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방법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몽블랑은 그렇지 못했다. 클리어 플래닛 포스트에서 받은 레일건 포탑이 있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어뢰정의 크기에 맞는 소형 포탑일 뿐이었다. 구축함까지는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겠으나, 대형함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경순양함 정도면 되더라도 유효타를 먹이기가 크게 곤란해진다. 대형함으로 분류되기 충분한 저런 순양함에는 어림도 없지.
그런 순양함을, 아직 제대로 된 우주 개발을 시작하지도 못한 행성에서 건조했다는 것이 바로 OSBF에서 이 프로스트 테라와 줄을 만들어두려는 이유에서였다. OSBF의 세력 자체는 프로스트 테라보다 크겠지만, 자국민의 생활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이를 악문다면 한 행성의 반쪽짜리 역량으로도 저 정도는 나오는 것이다.
만약 OSBF도 어떤 행성의 대륙 하나를 먹었다면 모를까, 행성권 내의 세력에서는 고작해야 도시가 몇 개인 지금은 안 된다. 역량을 집약하는 능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니까.
- 현 시간부로 퇴각을 건의하는 것 또한 적전 도주 시도로 간주하겠다. 퇴각도 전투도, 이쪽의 판단하에 실시한다.
다시 등장한 하일리거 대령의 목소리가, 이젠 아예 묵살을 넘어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일이 크게 수틀린다면 용병 어뢰정들이 마음먹고 구축함을 프래깅으로 격침하여 도망칠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진 용병으로서의 신뢰가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용병에겐 신뢰를 잃어도 다른 스테이션이나 은하로 가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으로, 그렇게 갔다간 이름까지 바꿔야 한다. 유진처럼 연방과 반란군에게 동시에 쫓길 정도의 위기가 아닌 이상, 자기 이름을 바꿔가며 초짜 취급을 받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길 각오하기는 쉽지 않다.
- 제정신 아닌 것 같은데. 실제 동맹도 아니면서, 대체 왜 퇴각을 안 하는 거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보이잖아. 명백한 열세라고.
선내 통신망으로 셀린이 투덜거렸다. 우주 전투에서 함선의 체급은 절대적인 차이. 숫자가 압도적이라면 한 체급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으나,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우주가 아니라 대기권이라 지상 포대라는 변수가 있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동대륙의 순양함이 바보같이 굴지만 않으면 실제로 적용되지 않을 변수였다.
그렇다고 동대륙군이 순양함을 막 쓰길 바라는 것도 웃기다. 모습을 등장하는 순간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기밀을 지켜가며 건조했음을 뜻한다. 그렇게 기밀을 철저하게 지키며 건조한, 두 척뿐인 순양함을, 그렇게 쉽게 굴리겠는가.
“뭔가 있겠지. 저걸 상대할 방법이나, 아니면 상대해야만 하는 이유가.”
- 그게 대체 뭔데?
“아마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서대륙과의 교감을 끝냈을지도 몰라. 그래서 동대륙을 압박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고. 진실은 그 장본인들만이 알겠지만.”
추측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유진은 기습 선제공격까진 아니어도 서대륙과 OSBF가 이미 교감을 끝낸 후 뭔가 일을 벌이려 했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중재 조건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일이나, 아마 전체적으로 서대륙에 유리하게 조정하려 들었으리라.
문제는, 동대륙도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는 점. 순양함 두 척이면, 전함 한 척에 비해선 분명 한참 못할지라도 매우 강력한 전력이다. 전쟁을 벌이면서도 역량을 쥐어짜 제작했고, 그러면서 기밀까지 지켰으니 당하는 쪽에선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
그리고 그렇게 뒤통수를 친 동대륙에서도, 그저 위협이나 적절한 승리 정도로 마칠 생각은 없을 게 분명했다. 국민을 쥐어짜 건조했는데, 그게 만족할 대승을 거두지 못했다면 그 결과물 이전에 내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
“문제가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손실이 상당할 겁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탈할 수도 없어.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 가만히 있어야지.”
유진과 애니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조차도, 전황은 시시각각 급박하게 바뀌어 갔다. 서로의 탄도탄 선두군이 지나치는 순간.
[쿠구궁! 콰과과광!]
하늘에 불꽃놀이가 퍼지는 것처럼,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탄도탄 중에서 핵탄두 대신, 적의 탄도탄을 요격할 목적으로 근접 신관과 대공 파편탄두를 장착한 탄도탄 때문이었다. 그 비싼 탄도탄에 뭐 하는 짓이냐고 기함을 토할 일이었으나, 프로스트 테라는 이미 전쟁으로 인한 광기가 일상을 채워가는 행성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로 전략핵을 쏴댈 리가 있나.
“이제 시작되겠군.”
- 곧 사거리 안으로 들어온다. 표적을 놓치는 일은 없도록.
얼마 후면, 구축함과 어뢰정 사거리 안쪽으로 살아남은 탄도탄들이 들어온다. 서대륙군의 모든 함선이 이륙했으니, 탄도탄이 많아도 그 자체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탄도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 탄도탄의 목표가 기존처럼 서대륙의 주요 도시나 전략적 요충지였다면.
“유진, 살아남은 탄도탄 몇 개의 탄두가 분리되었습니다.”
“아주 작정을 했군. 저 한중간에서 터뜨리면 저쪽 대륙도 결코 무사하진 못할 텐데. 광적응 차폐막, 방어막까지 작동해줘.”
“알겠습니다, 유진.”
차폐막이 작동하여 전면 관측창의 빛 투과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자마자, 연쇄적으로 수십 개의 전략핵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거기에 휘말린 다른 탄도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에 선했고, 해안가에 한꺼번에 쏟아질 방사능도 제대로 된 엄폐물 없이 쬔다면 심각한 수준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전력을 총동원한 시점에서 이미 지상의 대피가 시작되어 지금쯤이면 끝났을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함선은, 아무리 작은 상륙정 수준일지라도 EMP와 방사능에 대한 내성이 있었으므로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당분간 저 건너를 관측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장거리 레이더도 전략핵 탄두의 연쇄적 폭발 너머를 확인할 수는 없었으며, 그러므로 동대륙 함선들의 상황을 살필 수는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연막이다. 하지만, 전략핵 탄두 수십 개를 단순히 연막용도로 쓰려고 했을 리가 없었다.
[지지지직! 지지직! 콰앙! 쾅!]
- 순양함이다! 저 미친 새끼들이 블라인드 파이어를 하고 있다!
- 쏴! 쏴! 대응 사격!
- 뭐 하는 거야! 대기해! 쏘지 말고 대기하라고!
몇 분 사이에 순양함이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한 듯, 레이저 주포가 한 번 죽 그어버리자 그 사선에 걸려 있던 어뢰정과 상륙정들이 불꽃으로 산화했다. 척 봐도 레이저가 그어버린 궤적마다 수십 개씩, 궤적이 넷이었으니 백이 넘는 함선들이 터져나갔다.
그나마 OSBF 구축함과 고용된 용병 어뢰정은 그 사선에 걸리지 않았으나, 일부 어뢰정이 혼란에 빠져 멋대로 반격하는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레일건 몇 발, 얇은 레이저 몇 줄기가 허공을 그었으며, 그 전과가 어떤지알 길은 없었다.
문제는, 이쪽에서 발포를 시작하니 서대륙군 함선들도 덩달아 발포를 시작했다는 점. 결국, 정말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블라인드 파이어, 안 보고 사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린 어떻게 합니까?”
“저고도로 빠져야지! 마천루에 너무 가깝진 않도록 고도 내린다! 3백 미터, 그 정도가 좋겠군. 급강하한다, 조심해!"
[씨이이익!]
- 몽블랑! 대형에서 벗어나지 마라! 복귀하지 않으면 적전 도주다!
구축함으로부터의 경고가 요란했으나, 유진은 그냥 상큼하게 무시해주었다. 이 상황에서 정말로 적전 도주라면서 몽블랑을 쏠 리도 없었거니와, 곧장 이어질 일 때문이기도 했다.
[지직! 지직! 쿵! 쿠우웅!]
“그쪽도 고도를 낮추는 게 좋을 거다! 눈먼 포격에 죽기 싫으면!”
이쪽에서 쐈는데 저쪽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여전히 육안으로도, 레이더로도 관측이 안 되는 전략핵 탄두의 폭발 너머에서, 탄두와 레이저가 날아들었다. 순양함의 것만이 아니라, 구축함과 어뢰정의 사격까지.
이러면 정말 난장판이다. 눈먼 사격이 자신을 때리지 않길 바라면서 같이 상남자의 맞대결을 하거나, 아니면 머리를 써서 어떻게든 회피하는 것, 둘 중 한 가지 행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
- 하강! 하강해! 이런 미친!
다음으로 움직인 것은 다른 용병 어뢰정이었다. 식별 코드를 보면 녹아버린 해골인가 뭔가 하는 작자들로, 몽블랑을 따라 고도를 급하게 낮추기 시작했다. 다만 그 움직임이 너무 급했던 탓에, 몽블랑이 다소 여유를 두고 낮은 고도를 확보했던 것과는 달리 녹아버린 해골은 마천루에 스치듯 부딪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보기 삼아, 다른 용병 어뢰정들은 침착하게 고도를 낮췄다. 그러다 재수 없는 어뢰정 하나가, 재수 없게 레이저 포격의 사선에 걸려서 추락하기 전까지만.
- 침착해라! 사선 아래로 내려왔다고!
- 각 함선 전투 준비! 동대륙군 함선들이 육박해온다!
- 전투 준비는 무슨! 빨리 고도 올려서 대기권 탈출해야지!
- 그럴 수 있으면 그러던가! 순양함 주포가 저 위쪽만 훑고 있는 거 안 보이냐!
혼란의 표본이라고 해도 좋겠다. 용병 어뢰정 간의, 그리고 구축함 간의 교신이 두서없이 이어지고, 개중에서 어뢰정 한 척이 급하게 다시 급상승을 시도하려고 했다.
“옵니다, 유진.”
“온다! 표적 지시는 자의적으로 하겠다! 셀린! 꼬맹아! 준비해!”
그리고 최대속도로 달려드는 동대륙 함선 무리에, 급상승을 시도하면서 어중간한 위치에 외따로 떨어져 있게 된 그 어뢰정은 눈에 잘 보이는 목표가 되어 일제 사격을 받았다. 빗나가는 것도 있었고 회피한 것도 있었으나, 그래도 어뢰정 따위가 순간 집중된 화력을 버틸 리가.
[콰쾅!]
“각개 기동! 대형이고 지랄이고 이건 난전이야!”
어뢰정 하나가 폭발하는 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동대륙 함선들이 사거리 내로 육박해 들어왔다. 서대륙 함선들도 안전지대를 찾아 내려왔으므로 OSBF 구축함과 용병 어뢰정만으로 맞서는 불상사는 피했으나, 이렇게 된 것만으로도 동대륙군의 의도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졌다.
이렇게 난전이 벌어지면, 살아남은 지상 포대도 함부로 포격을 가할 수 없다. 아직은 거리가 있고 서로 포격을 주고받는 상황이었으나,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는 곧 초근접전, 서로 꼬리를 무는 도그파이팅이 개시되리라는 점을 예언하다시피 했다.
- 유진! 표적이 너무 많아! 기동도, 너무, 복잡하! 윽!
[씨이익! 콰앙!]
“명중이야! 잘 쏘고 있으니까, 침착하게 해! 피하는 건 내가 한다!”
- 아저씨가 피하는 건 피하는 건데, 곧 엔진에 과부하 걸려요! 꺅! 자꾸 그렇게 막 기동하면 엔진 곧 터져요!
“곧이 언젠데, 꼬맹아!”
- 30분이요!
선내 통신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몽블랑은 요란하게 움직이면서 꾸준히 사격을 가했다. 반은 빗나가고, 나머지 반 중에서도 치명적인 타격이 되는 건 거의 없었으나.
- 씨발! 저기가 살길이다! 당장 따라붙어!
애초에 목적 자체가 적의 격침이 아니었으므로, 몽블랑은 오히려 앞으로 쏘아져 나아가며 순식간에 바다에 도달해 해수면 바로 위를 스치듯 날아 동대륙 함선들을 돌파했다. 인간의 한계 수준에 도달한 동체시력, 경험으로 인한 감이, 날아드는 레이저 줄기와 레일건 탄자를 피해내거나 맞아도 무방한 부위로 받아내는 조종이 되도록 했다.
그 뒤로 다른 용병 어뢰정들이 곧장 따라붙으니, 순간적으로 돌파 대형이 만들어지고 화망이 형성되었다. 그 뒤에서, OSBF의 구축함은 동대륙 어뢰정들의 집중 공격에 노출되어 아주 제대로 탱킹 역할을 하고 있었다.
“셀린! 앞만 노려! 앞만!”
- 아저씨! 곧 실드 에너지가 다 소모될 거예요! 잠깐은 버티겠지만, 영원히 버티지는 못해요!
“영원히는 필요 없어!”
그러곤 곧장 가속.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접근했던 동대륙군은, 설마 저쪽에서 튀어나오리라는 생각을 못 했는지 몽블랑을 선두로 한 용병 어뢰정의 종대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이게 의도한 바가 맞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온 몽블랑의 앞엔, 동대륙군의 순양함이 떡하니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