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찻잔 속의 함대 결전(7)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그러면서 복장은 그녀가 자신에게 맞게 커스텀한 경량 강화복인데, 그 움직임에 따른 소음이 놀랍도록 조용했다. 아마 혼란에 빠져 상황을 정리하느라 바쁜 해적들의 소음 탓도 있겠지만, 고요한 곳에서 움직여도 아주 작은 소리만 들릴 게 확실했다.
“함장님, 괜찮은 겁니까?”
“우리도 준비는 해야지.”
근처의 교인 승무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으나, 유진은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 애니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선 상황이었다. 거기에 주변 환경도 그녀에게 최적화되었다. 클리어 플래닛 포스트 때와 비슷하다.
[째앵! 콰앙!]
“아악!”
“산탄 지뢰다! 산탄 지뢰가 터진다!”
“야 이 병신아! 지나온 길에 지뢰는 무슨 지뢰! 엄폐물 똑바로 들어! 똑바로 들라고!”
해적들에게 닿기 전에 쿠킹한 수류탄을 내던지자, 그게 누군가의 등 뒤에서 터졌다. 해적 대부분이 강화복을 갖추진 못했으나, 머리 위가 아니라 해적들 사이에서 터진지라 살상력을 가진 파편이 넓게 퍼지진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혼란을 배가하긴 충분했다. 이미 초토화된 1선은 말할 것도 없고, 추가 타격을 받아내면서 전진하기 위한 엄폐물이 이리저리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강화복을 모두에게 맞춰줄 수가 없으니, 일종의 바디벙커를 들려 앞세워 이동식 엄폐물 삼는것.
숫자의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훌륭한 대처였겠으나, 일은 그리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두 번째 수류탄이 터지는 시점에서 몇몇 해적들은 복도 양옆의 빈 방이나 탕비실 따위로 기어들어가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들의 사기 저하는 빠르게 나타났다.
“이 병신새끼들아! 숫자는 우리가 열 배는 많다고! 정신 안 차리냐! 쫄지만 않으면 이기니까 엄폐물 똑바로 들고 전진해!”
그 와중에 기본적인 개념이 박힌 지휘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해적의 말처럼, 그들이 쫄지만 않으면 고작 열두 명뿐인 러쉬모어의 승무원 숫자로는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애니가이렇게 나섰으나, 해적들이 죽음을 감수하고 달려들면 그녀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적과 죽음을 감수하는 공격은 거의 물과 기름 수준으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였다. 특히 본래 한 개 해적단이 아니라, 지금처럼 척 봐도 어중간한 규모의 해적들이 연합한 형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콰드득! 콰직!]
“으아악! 씨바아아알! 꺽! 꺼억!”
서있는 해적 중 그나마 경량 강화복을 갖춰 입은 자에게 애니가 접근했다. 직후 몸을 뒤집듯 유연하게 움직여 해적의 목을 두 다리로 휘어 감았고, 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직감한 해적이 욕설을 내뱉다가 목이 꺾여 그대로 사망했다.
“저기! 저기야! 쏴! 쏴!”
[지지지직! 쿠쿵! 쿠쿠쿵!]
그쯤, 지나치게 밝게 나오고 있던 적외선 조명에 적응한 해적들이 애니를 발견하여 사격을 개시했다. 사격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앞쪽에 있던 몇 명뿐이었으나, 그들의 화력만으로도 경량 강화복에 상당한 충격을 줘 넘어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 충격을 받은 경량 강화복이 애니가 입고 있는 게 아닌, 방금 그녀가 죽인 다른 해적의 강화복이라는 점.
- 유진.
“쏴!”
[지이이이이익!]
애니는 그 넘어진 강화복 뒤쪽에 있었다. 경량 강화복이라도 일단 강화복인지라, 해적들의 화력은 이미 죽은 해적의 강화복을 앞뒤로 뚫어도 애니의 강화복까지 뚫진 못했다. 그렇게 화력이 몰려있는 사이, 유진과 교인 승무원들이 일제사를 가한다.
[퍼퍼펑! 퍼퍼퍼펑!]
“엄폐물 들어! 엄폐물 똑바로 들라고!”
불꽃이 튀기고, 사방이 파편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파편은 금속도 있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유기체도 상당했다.
문제는, 그러고서도 처치한 해적의 숫자가 고작 스물이 약간 넘는다는 점. 전투력을 상실한 이들까지 더하면 그보단 더 많아지겠으나, 그렇다고 서른이 넘진 않았다.
- 불 끕니다.
“사격 중지, 상황 어두움으로.”
한계까지 밝아진 적외선을 내뿜던 조명이, 이번엔 갑자기 최소가 되었다. 당연히 해적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고, 미리 알고 있던 유진을 포함한 교인 승무원들조차도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빠졌다.
그 와중에 들리는 소리.
[퍽! 빠각! 콰드득!]
“으악! 아아악!”
애니는 마치 신이라도 들린 마냥으로, 말 그대로의 무아지경으로 해적들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던 해적의 정강이를 짓밟아 부러뜨린 후 팔꿈치로 정수리를 찍고. 엄지와 검지 사이를 이용해 있는 힘껏, 드러난 목덜미를 쳐올려 목을 골절시키고. 그러는 사이 왼손으로 자연스럽게 뽑은, 인비지늄 합금으로 코팅하여 날을 세운 대검을 다른 놈의 경동맥에 긁기까지.
피가 튀기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경량 강화복을 입은 해적을 상대로는 외골격 관절이 끊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파열음. 다시 파열음. 시야가 회복될 때까지 해적들의 사기는 실시간으로 깎여나갔으며, 심지어는 시야가 확보한 이후에도 그러했다. 이쯤 되면, 진입한 해적들을 지휘하는 자의 사기도 바닥을 길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쏴! 쏴, 이 새끼들아!”
[휘이익! 파파팡! 파파파파팡!]
나름대로 애니에게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여러 번 터지는 섬광탄을 무작정 앞으로 던져놓고 보는 해적들. 그러고선 한다는 게, 일단 방향은 한쪽이니 총구를 무작정 그 방향으로 두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아군 사상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애니가 한 명씩 깎아 들어가는 상황이었더라도, 여전히 해적의 숫자가 이쪽보다더 많았다. 한두 명만 많은 것도 아니어서, 저런 무차별 사격에 몇 명 휘말려도 러쉬모어를 강탈할 수 있을 정도.
다만, 그것도 애니가 저 사격에 맞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애니, 괜찮아?”
- 괜찮습니다, 유진. 저는 이미 빈방으로 피한 상태입니다. 안으로 대피한 해적이 하나 있어, 제압 후 포박해놓았습니다.
“아직, 숫자가 많아. 어쩌지?”
- 저쪽이 의도적으로 본격적인 중화기를 사용하진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줄어들면, 아마 부수적인 피해 여부와 관계없이 사용할 겁니다.
요컨대, 해적들이 인원수가 적어서 만만한 러쉬모어를 가능한 한 깨끗하게 나포하여 순식간에 세력을 불리려 한다는 뜻이다. 유진 또한 수십 명의 승무원이 있는 구축함을 모는데 상대 구축함의 승무원이 열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같은 일을 시도하리라.
이렇게 한 가지 한 가지 정황이 쌓여갈수록,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정보를 누출했다는 게 확실해져만 갔다. 가장 의심되는 건 알-테켈테 스테이션의 관리자들. 관련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이 정도 규모를 동원하면서까지 다른 방향으로 이득을 꾀할 이들이 딱히 더 있으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다만, 그것도 일단 여기서살아서 나가야 대처할 수 있겠지.
“나머지는다 제압할 수 있겠어?”
- 방법이 있습니다만, 다른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진.
“어떤 도움?”
열두 명의 승무원 중 아홉이 여기에 있다. 애니를 돕는다고 한들 이중에서 있을 수밖에 없으며, 사실 유진으로서는 그러한 이유 탓에 현상유지 이상의 무엇인가를 해내는 것은 회의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애니 스스로 방법이 있다고 하니, 유진으로서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이 또 있는 게 아니었으까.
- 조타수와 하니엘이 필요합니다. 일렉트로니카를 통해, 외부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저쪽 구축함은 아마 격납고 대신 접현전을 대비한 승무원 모듈이 있는 형태이므로, 위치만 제대로 잡으면 이 복도를 완전히 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조타수! 꼬맹아! 들었지? 바로 움직여!”
망설임은 없었다. 현 상황에서 애니가 그게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게 방법이다. 결정은 함장인 그가 하겠으나, 그에게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 무슨 말이야! 하니엘을 내보낸다니, 여기선 내가 가는 게…….
- 안 됩니다, 셀린. 레이저로는 기회가 왔을 때 단번에 어뢰정을 격침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적 어뢰정의 사격도 자기 쪽 구축함 때문에잦아들 거고, 이렇게 접현거리로 붙은 상태에선 사이에 낀 상륙정을 타격할 수도 없을 겁니다. 상륙정 포수가 위험할 일은 없습니다.
“하방 포대는 대충 흩뿌리기만 하면 되니까, 셀린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없으니, 빨리!”
그야말로 극한의 인력 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아홉 명이 여기에 있고 두 명이 내려가니, 이제 배를 직접 운용하는 것엔 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 상황.
그나마도 남은 게 유사시 러쉬모어를 이동하거나 회피를 시도할 조종수가 아닌 포수였다. 즉, 이런 상황에서도 애니도 유진도 전투 포기를 결심하진 않았다는 뜻이다.
- 안 그래도 거의 다 왔어요! 아저씨, 이대로 나가면 돼요?
“조종은 조타수가 할 거야! 넌 애니가 표시해주는 표적을 조준해서 쏘면 돼! 선외활동복 꼼꼼하게 점검하고! 그 위에 방호복 입는 거 잊지 말고!”
- 아, 이런 상황에서도 잔소리야!
투덜댔으나, 하니엘 본인도 선외활동복에 방호복까지 껴입는 건 잊지 않았다. 유진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인데, 아무리 상대가 소녀라도 눈먼 탄환에 맞을 수 있는 만약의 경우를 우습게 보도록 가르치진 않은 덕분이다.
“애니! 바깥으로 나오지 마! 지금은 시간만 끌면 되는 거지?”
- 그렇습니다, 유진. 엄폐해 있겠습니다,쓰십시오.
[드르르륵]
유진이라고 승무원이 고작해야 열둘 밖에 안 되는 현실을 그냥 둔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대비는 해두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지금 저 드르르륵 소리가 바로 그 성과가 굴러오는 소리였고.
“함장님, 좀 일찍 써도 괜찮지 않았겠습니까?”
“탄약이 별로 없어.”
“왜 탄약이 별로 없습니까?”
“너네가 꼬맹이 방에 너무 고급품을 많이 넣어서. 설마 이배로 이렇게 빨리 접현전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덜컥!]
교인 승무원과의 만담 아닌 만담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소구경 레이저 여섯을 정육각형으로묶은 급조형 중화기가 유일한 통로 방향에 걸렸다. 정말 급조했다는 티가 많이 나는 것이, 직사각형의 총안구가 약간 기울어져 조잡하게 난 두터운 장갑판에 사람이 들고 쏠 크기의 레이저가 달렸으니 많이 불균형적이다.
“좀 큰 총을 구하지 그러셨습니까?”
“그걸로 내 배 부수라고?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원래 안에서 배를 부술 수 있는 화기는 안 싣는 게 원칙이야. 내부에도 코팅할 여유가 있는 순양함쯤 되면 또 모르겠다.”
[딸칵, 딸칵! 지지지직! 지이이익!]
본래 불가시인 것을, 일부러 아주 강렬한 붉은색으로 착색되도록 바꾼 뒤 쏜다. 여섯 줄기의 레이저가 복도를 가르며 해적들에게로 향했다.
“대응사격하지 말고 버텨! 버티라고! 저것들 탄약 얼마 없어! 버티기만 하면 돼!”
“저새끼들, 우리가 어떤 무기를 실었는지, 탄약 얼마나 실었는지까지 알고 있네.”
해적들은 대응하지 않고 바디벙커를 세워 레이저를 막으며 버텼다. 시간을 좀 더끌면, 외부에서 다른 해적 함선들이 도착해서 도와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몰랐다. 기다리고 있는 해적 함선들이 나타나선, 호위 전멸이 확실치 않은 도쿄 익스프레스의 초광속 엔진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럴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다.
- 아저씨! 우리 가요! 조금만 버텨요!
하지만, 지금은 온갖 정보를 전해들은 해적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가 이쪽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