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5화 〉 인피니 (1) (195/207)

〈 195화 〉 인피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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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도할 일까진 아니었다. 어디 악운이 보통 따르는 사람이었어야지. 그는 하니엘과 얽히기 전에도, 하니엘 때문에 연방과 반란군에게 쫓길 때도, 심지어는 그 이후에도 이쯤 되면 죽지 않을까 싶었던 상황에서 꾸준히 살아남았던 사람이다. 이번에도, 적어도 목숨 면에서는, 그에게 제법 행운이 따랐다.

“추진부 피격. 동력원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도록 차단 중에 있으나, 다음 일제사격에 당하면 그것도 한계입니다, 유진.”

라 말린체의 후방을 정확히 잡은 구축함은 한 척이었다. 주변에 두어 척이 더 있긴 했으나, 토머스 재퍼슨이 폭발하면서 눈이 가려진 건 라 말린체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일제 포격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듯하면서도 시스템을 조작해 재빨리 대응한 애니 덕분에 어게든 막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막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광속 엔진은 이미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그저 동력원에 영향을 가는 걸 간신히 막은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한 번 더 맞으면, 아예 그런 조치마저도 할 수 없을 상황.

“초광속 항행 가능합니다! 준비 완료!”

그때, 함교 요원으로부터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인피니’를 부수면서 터진 에너지 파동의 영향이 끝났는지, 초광속 엔진의 기능이 가능해진 것이다. 본래 둘은 별개의 기능이었으므로, 아광속 엔진이 망가진 지금도 초광속 항행은 가능했다.

“좌표 설정할 시간 없어! 지금 바로!”

“초광속 엔진으로 출력 집중! 전 함대, 초광속 항행 개시! 좌표 상관없이 현 위치에서 일단 탈출하라!”

“적 구축함이 두 번째 일제 포격을 시작합니다!”

유진의 지시, 셀린의 명령 확인, 그리고 애니의 적 구축함 상황 보고까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구축함의 두 번째 포격과 초광속 엔진 작동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구축함의 포격 중에서, 레이저 포격은 분명히 라 말린체에 닿았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라 말린체의 초광속 항행도 시작되었다. 우주를 항해하는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접해서 익숙할, 초광속 우주 특유의 빛 하나 없는 어둠이 라 말린체 주변에 깔렸다.

“엔진실 화재! 초광속 우주와 격리되지 않습니다!”

“하층 계전실에서 전력 통제 불량 보고! 함체 방어막이 재생되지 않습니다! 초광속 우주와 격리되지 않는 지점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라 말린체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아, 초광속 항행 와중에 곳곳에서 온갖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평화유지군 구축함에게 얻어맞은 추진부와 그 근처가 문제여서, 그곳에 있던 승무원 상당수가 초광속 우주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함체 변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독!”

“불안정 구역 격벽 폐쇄.”

“불안정 구역 격벽 폐쇄!”

거기서 끝나지도 않았고, 교전에 따른 손상이 심각한 라 말린체의 함체 자체가 초광속 우주에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변형이 오고 있을 정도였다. 격벽을 폐쇄하더라도 추진부부터 생긴 함체와 장갑의 균열 때문에, 초광속 항행이 오래 이어지면 라 말린체의 형체 유지 자체가 위험한 상황.

“애니,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겠어?”

“안 됩니다, 유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운이 없다면 항성 한가운데에서 일반 우주로 나와, 온갖 분자구조의 폭발 반응에 휩쓸려 흔적도 찾지 못하겠죠. 도착까지 얼마가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라 말린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함체 자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만으로 하루에 가깝겠지만, 동력원과 초광속 엔진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몇 분 안 될 겁니다. 초광속 엔진실은 아광속 엔진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진 않으니까요.”

초광속 항행 도중에 초광속 엔진이 꺼지거나 동력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에는, 일단 함선이 일반 우주로 나오긴 한다. 의외로 멀쩡하게 나올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도중에 아예 손상되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일반 우주로 나오긴 하지만, 그땐 나온다기보단 튕겨 나온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알맞을 것이다. 그리고 튕겨 나오면서 부러지거나, 조각조각 나거나, 아예 폭발하는 형태가 되기도 하고.

“여기까지 와서 산산조각 나고 싶지는 않은데.”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산산조각 나는 줄 알았지 않습니까. 이 순간의 악운을 좀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

“즐기기는 무슨. 유진, 도착해도 문제야. 무사히 일반 우주로 나오더라도, 이후에 아광속 항행은 물론 초광속 항행도 불가능해. 아광속 엔진은 이미 기능을 잃었고, 초광속 엔진도 기능 자체는 살아있더라도 다음 건 함체가 버티지 못할 거야.”

이건 좀 더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애초에 초광속 항행이라는 게 한 번에 실시간으로 5분 이상 이어지는 일은 없으므로, 지금의 초광속 항행에서 함선이 파괴되거나 문제가 생기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일반 우주로 나온 뒤에는 어떨 것인가. 이미 아광속 엔진은 가동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초광속 엔진은 가동 자체는 되더라도 라 말린체의 함체가 다음 초광속 항행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았다.

즉, 행운이 따라서 문명화된 구역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라 말린체의 고립은 확실시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고립을 과연 어떻게 벗어나는가.

“곧 일반 우주로 나옵니다.”

“전 승무원 충격에 대비할 것. 곧 일반 우주로 나온다.”

쿠우웅! 쉬이이익! 일반적으로 초광속 항행이 끝나고 일반 우주로 나올 때는 들리지 않는 충격음과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곧장, 자동화된 함체 손상 보고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아광속 엔진실은 완파라 응급 복구로는 어림도 없고, 선외 활동복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초광속 엔진실도 현재 승무원들의 필사적인 응급 복구로 간신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고, 선외 수리 활동이 더해지면 안정화는 되겠지만, 도크 신세를 지지 않으면 초광속 항행은 안 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지?”

“적어도 개척된 성계는 아닙니다. 항성 하나에, 행성이 다섯 개군요. 위성은 없고, 항성은 백색 왜성입니다. 얼마 후면 초신성이 되어 폭발을 일으키겠습니다.”

“얼마 후라면?”

“글쎄요. 수만 년? 수십만 년?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당장 초신성 폭발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반대로, 이 위치에 있는 것 자체가 별로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서, 에너지를 뽑아 먹기에도 불안정해진 항성이었으니까.

“성계에서 생명 활동을 기대하긴 어렵고, 이런 환경에선 채굴 설비조차 보기 어렵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유진. 고립됐습니다.”

“성계 측량으로 여기 위치 파악해서 클라뉙 연합체 쪽으로 초광속 통신 곧장 열고, 함내 남은 보급품 재고 확인해. 여기서 초광속 통신이 닿을 때까지 버티자. 아직 살아남은 소형선은 얼마나 돼?”

“상륙정 몇 정도는, 아광속 항행은 가능합니다. 초광속 항행 과정에서 격납고까지 타격을 받아서, 그쪽도 한바탕 난리를 치른 모양입니다.”

확실히, 홀로그램 보고에서는 격납고 부분까지 빨간색이 들어와 있었다. 심각한 손실을 뜻하는 것이긴 하나, 아광속 엔진실처럼 아예 새까맣게 덧칠해진 것보단 낫다. 물론, 그래도 도크에 들어가 수리할 필요가 있기는 했으나, 이 라 말린체를 수리할 도크까지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젠 함선이 아니라, 그냥 떠다니는 포스트가 됐군.”

“포스트는 어떻게든 자급자족이 가능하기라도 하지, 이건 완전 꽝이야. 애초에 자급자족을 준비하는 함선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유진의 나직한 말을, 셀린이 한숨을 내쉬며 받았다.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라 말린체는 함선이 아니라 그저 떠다니는 우주 거주지에 불과하게 되었다. 자력으로는 이동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하다못해 자급자족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전투를 목적으로 한 함선이 자급자족 능력까지 갖추는 건 낭비였다. 물이나 공기까지라면 당연한 일이 되겠지만, 그 자급자족 목록에 식량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생존한 승무원 숫자는 정확히 972명입니다. 엔진실 승무원 중에서 손실이 컸어요. 그렇게 인원이 줄어든 덕분에, 식량 재고는 3개월 정도까진 됩니다.”

“다른 문제는?”

“의약품 재고가 걱정되는군요. 부상자가 제법 나왔고, 그중에선 제대로 된 의료시설의 치료가 필요한 상황도 있습니다. 재생치료라고 만능은 아니니까요.”

이래저래 신경 쓸 요소가 많았다. 하다못해 재생치료만 하더라도 거기에 필요한 의약품이 있었고, 대부분 우주 전투함처럼 라 말린체도 그 의약품 재고를 막 쌓아두진 않는 편이었다. 의약품이 엄청 많이 필요해지기 이전에 함선이 격침될 가능성이 훨씬 크고, 살아남아서 의약품이 많이 필요해지면 다른 함선, 특히 토머스 재퍼슨에서 긁어오면 될 일이었으니까.

“초광속 통신이 닿을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행성이나 거주지의 통신 시스템 보조를 받는 게 아니니, 못해도 2주일 정도는 각오해야 할 겁니다. 현재 위치가 워낙 인적이 없는 곳이라.”

우주는 무지하게 넓다. 초광속 항행이 일반화된 이후에도, 우주의 공백을 다 채우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성계나 우주 거주지가 곳곳에 널려있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실은 우주라는 끝없는 사막에 중간중간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오아시스가 아주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그런 꼴이니, 무작위로 초광속 항행을 했을 때 문명은커녕 생명체가 있는 성계에 도달하는 것조차 엄청난 행운이었다. 아니, 애초에 항성 근처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변 행성 탐측이라도 할까? 인비지늄은 없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나을 거잖아?”

“초광속 우주에서 잔뜩 손상된 상륙정으로?”

“어차피 우주환경 방호복은 다 입을 테니, 함선 검사해서 엔진이랑 선체 멀쩡한 걸로 골라서, 필요하면 엔진을 바꿔 달면 되지. 어차피 여기서 하루이틀 있을 건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셀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여기에 하루이틀 있을 것도 아닌데, 이와 이렇게 된 거 주변 행성 탐측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탐측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하고 있다는 의식이 든다는 점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애니의 말처럼, 때로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었다. 통신이 가는 동안 응급 수리는 할 것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응급 수리이면서 동시에 항행 가능할 정도까지 수리할 수는 없으니 수리 자체는 사나흘이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응급 수리에 승무원 전체가 동원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아광속 항행이라도 가능한 상륙정을 정비하거나 해체, 조립하면서 쓸만하게 만듦과 동시에 따로 할 일을 만들어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이다.

“그럼 그나마 뭔가 있을만한 행성을 먼저 선별하겠습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어차피 기분 때문에 하는 겁니다. 기분이라도 내야죠.”

애니의 대답에, 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네 사네 했었는데, 그래도 일단 살았다고 저런 말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정도 여유가 생기니, 곧장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꼬맹이는 잘 대피했겠지?”

일단, 하니엘이 탄 어뢰정이 초광속 항행에 성공하는 것까진 유진도 확인한 바였다. 하지만 대피가 그거 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정된 좌표가 있고 예비 좌표도 있긴 했지만, 유진은 하니엘이 자신을 기다리다가 다른 함선의 잔해에서 정보를 얻은 평화유지군 함선에 잡히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라 말린체가 탈출하기 직전엔 아직 평화유지군 주력함도 몇 척 남아있었고, 구축함 이하 보조함은 더욱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하니엘도 바보는 아닙니다. 게다가 거기엔 아이다와 메리­앤, 코울슬로도 있죠. 하니엘이 잘못 생각하더라도, 셋 중 하나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서 나머지를 잘 설득할 겁니다.”

“맞아. 뭐가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혹시 전장을 살폈다면, 이 함선이 격침됐다기엔 잔해가 너무 적다는 것도 알아챘을 거야.”

이래저래, 침착할 수만 있다면 유진의 생존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평화유지군 함대도 상당한 손실을 봤으므로, 클라뉙 연합체가 돕는다면 교전이 일어난 성계를 장악하기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그래. 게다가 클라뉙 연합체도 있으니까, 잘해주겠지.”

괜히 그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여줬던 게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호감은 줬다. 그러면, 하니엘이 돌아갔을 때 대해주는 게 조금은 달라지겠지.

더불어 평화유지군 주력함대 하나를 괴멸하고 남은 기동 전력의 절반 이상을 날리기까지 했으니, 대우가 나쁘다면 그게 개새끼였다. 러쉬모어 함대 전력이 이게 전부인 것도 아니고, 내우주 방향에 거대한 세력이 있음을 암시했으니 클라뉙 측에서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면 내팽개치지는 않으리라.

“별 문제 없을 겁니다, 유진.”

애니 또한 비슷한 의견이었다. 솔직히, 문제 될 거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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