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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화 〉 인피니(10) (204/207)

〈 204화 〉 인피니(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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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시간이 하니엘의 편은 아니었다. 그녀의 빛이 가진 힘 자체는 마마의 것보다 좀 더 우위에 있는 것도 같았지만, 그 활용도에서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불리한 상황에서 빛으로만 씨름을 할 수도 없었고, 그 전에 활용능력에서 밀릴 가능성이 매우 크기도 했다.

“킬리만자로로군요.”

“여기 실어놨거든. 다른 함선의 나머지는, 그래도 함대는 통제해야 하니까. 여기선 우리 넷만 갈 거야.”

그나마 함께 귀환한 소수의 러쉬모어 함대 인원들도, 함대를 통제하기 위해 여기저기 분산된 상태. 전력을 조금이라도 집결하겠답시고 그들이 모일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간, 그나마 남은 기회마저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뢰정 킬리만자로의 구성은 넷으로 결론났다. 코울슬로가 엔진 보수 겸 전투원으로, 아이다가 시스템 전문가로, 메리­앤이 포수로, 하니엘이 조종사로.

“여긴 최대한 지연해보겠습니다. 부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길을 찾으십쇼, 천사님.”

몇 안 되는 러쉬모어 함대원들의 마지막 같은 배웅을 받으며, 킬리만자로가 진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선 곧장 추진계에 동력이 들어가고, 정말 빠르게, 쏜살같이 나아간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빨라! 아저씨도 원래 이런 거 몰았어?”

“제독이 몰았던 배를 바탕으로 출력이 더 높은 아광속 엔진을 올렸어요! 하니엘님은 몰아본 적 없어요?”

“이건 없어!”

기존의 킬리만자로와는 사소한 차이점이 있었고 인적 구성은 완전히 달랐으나, 그리고 그로 인한 약간의 혼란이 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킬리만자로는 마마의 함선을 향해 정말 빠르게 나아갔다. 차마 직접 공격은 할 수 없어 다른 함선을 동원하여 길목을 틀어막아 보려는 마마였으나, 그런 의도가 무색할 정도였다.

가장 먼저 장악당한 구식 전함이 그 거대한 질량으로 길목을 막아보려 했으나, 킬리만자로의 순간 가속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질량대비 출력 덕분에 순간 가속에서는 크게 뒤지지 않는 구축함이나 초계함 여럿이 스치듯 부딪혀 킬리만자로의 항행 기능을 무력화하려 했으나, 하니엘의 조종실력과 메리­앤의 포격에 힘입어 도리어 킬리만자로가 완파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이미는 함선의 엔진을 역으로 무력화했다.

끝으로는 어뢰정과 상륙정들이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보려 했으나, 일반적인 어뢰정과 상륙정은 특별히 개조된 킬리만자로를 따라오지 못했다. 전체적인 출력 면에서 부족했거니와, 그나마 혼란스러운 진형 앞에서 서로의 기동을 방해받는 경우도 있었다.

“으악! 쏜다!”

단순히 육탄 방어만으로는 못 막겠다 싶었는지, 드디어 발포를 개시했다. 위력의 세심한 조정이 어려운 레일건이나 플라즈마는 없이 레이저만이 주변을 수놓았다. 레이저뿐이라면, 출력을 조정하기도 쉽거니와 비교적 작은 어뢰정이더라도 치명적인 부분은 피해서 타격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빨라도 레이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우주 시대에서 미사일 병기가 도태된 이유였으며, 실제로 아무리 대단한 조종사라도 작정하고 요격하려 달려드는 레이저를 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니엘은 피하고 있었다.

“코울슬로! 이상 없죠!”

“없수다! 버틸만 하우!”

어느새 본격적인 ‘천사님’이 되기 전으로 말투가 돌아가 있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워낙 급박한 상황 아닌가.

피할 수 없는 레이저를 피하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하니엘의 조종이, 재능이 있으면서 흥미를 느끼고 최고의 조종사에게 배운 덕분이기도 했으나, 그 실력 자체의 비중만큼이나 운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내고 있는 빛의 위력이 컸다.

그렇다. 빛이다. 어쨌건 포격을 하려면 직접 조준해야 하는 법. 아무리 마마의 빛에 잠식되어가는 사람이라도, 하니엘이 내는 빛을 직접 보는데 영향이 없을 리가 없었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조준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현재 모든 함선의 컴퓨터가 하니엘을 최우선 보호 대상으로 설정한 이상 사람의 직접 조준이 없으면 하니엘을 쏘게 만드는 것에 시간이 제법 들 상황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요!”

“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요! 뭔가, 가까이 갈수록…….”

하니엘이 느끼는 바, 마마의 함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얽힘이 커져만 갔다. 좀 더 빛에 힘을 써보았으나, 그럼에도 오히려 그 얽힘은 커져만 갔다.

“뭡니까! 뭔가 잘못된…….”

“정신 차리쇼! 지금…….”

“하니엘…….”

밝디 밝은 빛 앞에서, 하니엘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다른 곳으로 갔을 뿐.

“들리니? 내 아이야?”

어딘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보기에, 주변은 온통 새하얌으로 가득했다. 백색이 아니라, 그냥 하얬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빛을 반사하면서 색이 나타나는 게 아닌, 그냥 그 자체가 하얗다고 할 수 있겠다.

“뭐야! 어디야! 너 누구야!”

하니엘로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분명 조종간을 쥐고 그 함선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아득해진다 싶더니 이런 공간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분명 아까까지 힘싸움을 하던 대상이 자신을 자기 아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정작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 와중이다.

“내가 너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며, 너의 근원이고, 끝이란다. 고개를 들고 마음을 열어보렴. 우리의 시작을 알려줄 테니.”

지랄도 풍년이다. 하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주변의 새하얌이 저항할 수 없는 빛이 되어 그녀에게 스며들 때까진 그러했다. 하니엘도 빛을 공격적으로 쓸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빛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게 무슨…….”

“잠자코 들으렴, 내 아이야.”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뇌에 억지로 기억을 쑤셔 넣는 형태의 난폭함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본래 그녀의 존재란 무엇이었는지. 그나마 거기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그녀의 빛이 완전히 무력해지진 않은 덕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이렇게 있게 된 이유가…….”

“우린 이 미개한 곳을 ‘가족’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삼기 위해 온 거랍니다. 남은 건 우리뿐이지만, 둘만으로도 많은 걸,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어요. 특히 스스로 강해진 그 빛에, 내 도움이 조금만 더해진다면, 미개인들은 모두 알아서 무릎을 꿇을 거예요.”

꿀꺽. 하니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기억 속에서 그녀의 ‘가족’은 성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다른 ‘미개한’ 생물들을 좋을 대로 이용했다. 단순히 성계에서 자원을 채굴하고 우주 거주지를 형성한다거나, 기술력이 떨어지는 문명을 정복해서 노예나 노동자로 써먹는 정도가 아니었다.

빛나는 별, 항성의 에너지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짜 에너지였다. 블랙홀에 닻을 내려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자원과 에너지를 뽑아 썼으며,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정신공격을 가하여 지능을 갖춘 생물들을 자발적으로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점점 힘을 쌓고, 능력을 확장한 끝에, 그 ‘가족’의 구성원은 하나하나가 마음만 먹으면 은하 몇 개 정도는 홀로 정복하고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다가온 것은, 우월은커녕 동등하다고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상대로 쌓아온 자만심의 폭발. 스스로 누구보다 강력하다는 인식이 박힌 ‘가족’들은, 그 힘의 방향을 서로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 많은 은하가 휩쓸렸고, 그 ‘가족’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도 끝까지 서로 죽고 죽인 끝에,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역량을 짜내어 만든 것이 마마, 그리고 그곳에 탑승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곳 사람들은?”

“자,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저 우리가 살릴 ‘가족’들을 떠올려 보세요. 다들 우리의 소식만을, 그리고 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빛뿐인 곳에서, 갑작스럽게 거리감이 생겼다. 우주 공간에 보이는 블랙홀. 안에서 빛과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마마가 문이라고 칭한 이름의 특이현상. 이쪽에서는 인피니라고 부르는 그것.

이곳까지 오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니엘 본인의 근원과 목적, 그리고, 조금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녀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그래서일까. 인피니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에너지에서, 하니엘은 무제한적인 친근함을 느꼈다. 그리고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저 문을 열어젖히고 가족들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손만 뻗으면.

“저 너머에 가족들이…….”

“그래요. 맞아요. 우리 가족들이에요. 자, 어서 문을 열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가족들을 함께 맞이해요.”

그렇다. 여태까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인피니까지 온 건, 그녀의 가족을 위함이었다. 그녀의 ‘마마’도 찾았고, 가족이 더 있음을 알았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왜 그러겠는가.

아슬아슬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던 목적이 완전히 고쳐져 덧씌워지려는 순간.

­ 꼬맹아, 들리냐.

“어떻게? 어느새!”

몽롱한 가운데,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하니엘의 귓전을 간질였다. 마마가 경악하며 자신이 방심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목소리가 뒤를 이으며, 잠수해있던 현실감이 부상하는 묘한 감각이 그녀의 신체 말단부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인피니 대신 익숙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 네가 생각하고, 네가 선택하는 거다, 꼬맹아. 다른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알겠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

“아저씨. 아저씨? 어디에요?”

­ 배 안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얼마 못 할 거다. 그러니 잘 들어라, 우리 꼬맹아. 여태 배우고, 깨닫고, 실천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면서, 어떤 게 올바른 길인지 잘 살펴. 넌 지금까지 정말 잘…….

끊겼다. 유진의 모습이 사라지고, 주변은 다시 백색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진 대신 마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개인들이 감히. 자, 신경 쓸 필요 없답니다. 그저…….”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저 문을 여는 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이런.”

마마의 당혹스러움이 표정으로 완전히 드러나기도 전에, 하니엘은 그 공간에서 빠져나갔다. 그저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다시 돌아오자마자 코앞에 보이는 건 눈앞에 가득한 마마의 함선이었다.

“아가씨!”

“이대로 가요! 지정해주는 곳을 포격!”

하니엘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그런 지시를 내리는 것에 일단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으나, 남은 셋에겐 그 말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종간을 쥐고 있는 건 하니엘이었고, 이 상황을 가장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것도 그녀일 테니까.

어뢰정치고는 화력이 출중한 킬리만자로였으나, 마마의 함선은 도무지 어딜 공격해야 유효타가 들어갈지 모를 모양새였다. 거기에 그 크기마저도 일단 킬리만자로 정도는 우습게 보일 정도로 컸다. 거기에 방어막이 없진 않을 텐데, 대체 그건 무슨 수로 뚫는단 말인가.

물론,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어? 이게 뚫려?”

퍼엉! 눈으로 보이는 폭발이 일어나고, 마마의 함선 한쪽에 킬리만자로가 들어가기 충분한 구멍이 뚫렸다. 메리­앤에게, 저 안에 러쉬모어 함대 생존자들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약간 들었지만, 어째선지 그렇진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뚫린 부분이 빠르게 복구되고 있어요!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있다고요!”

다만, 그것도 언제까지나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다가 경악할 정도로 빠르게 복구되고 있는 그 틈은,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에 어느새 킬리만자로가 정말 통과는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가속이냐, 감속이냐. 사실, 그리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킬리만자로에게 지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충격에 대비!”

“끄으으으윽!”

까드득! 으드드드득! 아슬아슬하게 조여드는 구멍을, 그 질량과 속도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다. 메리­앤의 것인지, 아이다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 나왔고, 고작 그 정도 신음만 나왔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관리 콘솔에서 선체 곳곳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음을 보고하면서, 주황색의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는 상황.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킬리만자로는 일단 진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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