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26화 (26/229)

〈 26화 〉 HERE COMES A NEW CHALLENGER

* * *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내 곁에 서 있는 한 사내. 마치 의사처럼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쓰고 날 내려다보고 있는……

‘헉?’

아, 아니었다. 사내는 의사가 아니라 다까히로였고, 내가 누워있는 곳은 중환자실이 아니라 학교 의무실이었다. 무슨 큰 부상이라도 입고 입원한 줄 알았다가 겨우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이내 황당해하며 다까히로에게 물었다.

『안경은 왜 쓰고 있어? 가운은 또 뭐고?』

『아, 도련님. 그게……』

다까히로는 언짢아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도련님을 부축하고 학교 본관의 의무실로 오지 않았습니까.』

당시 워낙 정신이 몽롱한 탓에 의무실까지 온 것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까히로가 날 부축하던 것까진 기억이 났다.

『그랬지.』

『그런데 생도주사로부터, 저희 시마즈 구미의 복장이 생도들에게 위압감을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잠시 이러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여기에 남는 가운도 있어서…….』

으음. 하긴, 인상도 험악한 녀석이 야쿠자처럼 검은 양복을 입고 학교를 돌아다니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생도주사는 그 점을 지적했겠지.

……그런데 워낙 험악한 인상과 콧수염 탓에, 안경 쓰고 가운 둘러도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거든? 비윤리적인 생화학실험실에서 인체실험을 하는 미친 과학자처럼 보인단 말이다…….

아무튼, 시계를 보니 이제 오전 11시쯤. 녀석은 내가 아침에 정신을 잃은 뒤로 쭉 지금까지 내 곁을 지키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 고맙다. 알았으니까 이제 너네 집, 아니 너네 사무소로 돌아가.』

『하지만, 시마즈 아가씨의 명 때문에 도련님의 시중을­』

『아니, 아니. 이만하면 됐어.』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까히로에게 말했다.

『애초에 나한테 사과하려고 내 시중을 들었던 거잖아? 충분히 많이 도와줬으니까, 네 할일은 다 했다고 봐.』

『그러면……』

『그래. 이제 네 일터로 돌아가. 렌까한테는 사과 잘 받았고, 부하 빌려줘서 고맙다고도 전해 줘.』

『……!』

빈 말이 아니라, 고작 2박 3일간이었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긴 했었다. 열차표를 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경찰한테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을 때에도, 그리고 어젯밤의 최성길 사건 때에도.

렌까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날 모시는 입장이었음에도 맡은 바 할일은 충직하게 하는 녀석이었다. 나와 기싸움을 벌일 때 보였던 나쁜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제대로 각이 잡힌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렌까의 바로 아래인 부분조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었겠지.

‘렌까! 네 부하 쩔더라!’

하지만, 계속 내가 데리고 있기는 영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날 도와주고 있다고는 해도, 그 이면에는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럼…… 정말로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유비기리’도 없이?』

유비기리(??り)가 뭐더라. 나는 백철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지식을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맞다.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이라는 의미의 단어였다.

『흠. 그럼 유비기리 정도는 할까?』

『크앗……!』

그 말에 다까히로의 안색이 급히 창백해졌다.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해보니, 저쪽 업계에서는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단어였던가. 손가락을 거는데 작두가 필요한 그 행위…….

의도치 않게 무서운 말을 해버린 나는 웃으며 둘러댔다.

『농담이야. 손가락 걸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니었잖아? 아무튼 난 용서했으니까 바로 돌아가.』

『……!』

『기왕이면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도 들러서, 하숙집 부녀한테 한번 더 사과하면 더 좋고.』

그제서야, 다까히로는 의사 가운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나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돌아가 봐.』

녀석은 그렇게 요란하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의무실을 나갔다. 그나저나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니, 그 쪽 업계의 흔한 인사치례겠지만 꼭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대장한테 하는 말 같잖아?

그렇게 다까히로를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의무실 침상에서 일어났다.

수업은 제꼈지만 밥은 먹어야지.

***

『허어…… 자네는 학교에 놀러 다니나?』

학생 식당에서 도시락 하나를 사서 우리 분대원들이 모여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앉자, 더벅머리 송병오가 투덜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자네는 좋겠군! 그렇게 드문드문 학교를 다녀도 졸업하고 여행이나 다녀도 되니……』

『뭐, 나 없는 동안에 별 일 없었지?』

『별 일이라.』

송병오는 안경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이유하도 아직 나오지 않았네. 뭐, 걔는 아프다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말대로, 우리 분대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이유하는 보이지 않았다(무라사끼는 당연히 없었고). 하지만 그건 나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고, 걱정할 것 없었다.

이유하는 어제 아이까와랑 다른 여학생의 부축을 받아 기숙사로 들어갔으니까. 하루쯤 푹 쉬면 이번엔 정말로 완쾌할 것이다.

나는 아이까와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아! 그것도 있었지. ……』

송병오 녀석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2교시에 일반과 이과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담당 교수가 퇴직했다고 갑자기 취소되었네. 그…… 사이가네 세이지 선생이었던가? 하여간, 퇴직이라니! 그래서 구로베 선생이 대리수업을 했지 뭔가.』

사이가네 교수의 정체와 어젯 밤 사건의 진상은 나와 이유하, 아이까와를 비롯해서 구로베 교수 등 극히 몇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나저나 ‘퇴직’이라니. 구로베 교수가 적절히 처리해 둔 모양이었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송병오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 벤또…… 두 개가 아닌가?』

『응. 배가 고파서.』

『허어!』

녀석의 말처럼, 내가 가져온 도시락은 두 개.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기도 했고, 아직 혈량 회복이 덜 된 지금은 영양분 섭취가 절실했다. 나는 벤또 밥을 퍼먹으며 생각했다.

‘강해져야 해.’

최성길과의 싸움을 통해 나는 내 능력이 턱없이 약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찌어찌 이겨내긴 했지만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또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강해지려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강해져야 무탈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각성능력자는 어떻게 강해지느냐?

그 답은 간단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각성능력을 극한까지 사용해서 극복했을 때 각성능력은 성장한다.

‘상태창.’

팟­!

[유저 정보]

성명白??(백철연)

연령만 17세

마력E급

각성마력감지/D급

강기/E급

독 저항/C급

상태빈혈(회복중)

[▷메인 화면]

상태창을 통해 살펴본 내 능력치는 며칠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역시…….’

간밤에 최성길을 상대했을 때는 목숨이 위험하긴 했지만, 정작 내 각성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이 딱히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유하는 성장했겠지.’

피가 부족해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에서, 쓰러질 때까지 빙결능력을 쥐어짜냈으니.

『시라바야시 군! 시라바야시 군!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내 옆의 빈자리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네에네에(있지있지), 그거 알아?』

양복자였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이, 또 뭔가 재미있는 소문이라도 듣고 온 모양이었다.

‘얘가 들고 온 헛소문때문에 내가 구로베 교수부터 의심했던 삽질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그래서 별로 귀담아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맞장구나 쳐 주기 위해 대충 되물었다.

『이번엔 또 뭔데?』

『동소문 밖에 마문이 열렸대! 오늘은 입입금지인데, 내일부터 민간 엽사들한테도 개방된다더라! 내일 학교 끝나고 같이 보러 가 볼래?』

『마문?』

그 말에, 내 귀가 번쩍 트였다. 마문(?門). 이 시대에서 게이트를 일컫는 말.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각성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하려면, 역시 게이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였다. 적당히 급 높은 마수들을 사냥하다보면, 내 각성능력도 쭉쭉 성장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뭐어, 우리들은 생도니까 못 들어가겠지만 말야! 그래도 밖에서 구경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치그치?』

하는 그녀의 말처럼, 학교의 교칙으로도, 그리고 법적으로도 미성년 학생이 마문에 들어가는 것은 안전을 이유로 금지되어 있었다.

『뭐, 그럼 같이 가 볼까? 물론 구경만 하고 돌아가야겠지만.』

『와아! 정말로?』

『응. 학생은 들어가지 못한다니,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아쉬운 척 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애들은 가라!’

분대원들 몰래 나 혼자 어떻게든 게이트 안에 들어가 볼 심산이었다. 우리 분대의 다른 애들은 내가 보기에도 아직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는 안 됐다.

하지만 나는 10년 가까운 경력의 베테랑 헌터. 아무리 지금 이 몸의 능력치가 낮다고 해도, 적절한 등급의 게이트 안에서 마수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동소문 밖이라면, 내가 묵고 있는 하숙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금지라고는 해도, 몰래 들어가는 방법 쯤은 있겠지.’

***

그날 밤, 경성의 남산 자락의 어딘가 위치한 화식 저택.

붉은 유카타를 입고 있는 렌까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다까히로에게 말했다.

『보고하세요, 다까히로 상.』

『…….』

다까히로는, 며칠 전 렌까의 분노를 사게 되었을 때만 해도 심하면 절복(??), 적어도 손가락 한두 개 쯤은 각오했었다.

하지만 렌까는, 그 대신 다까히로로 하여금 백철연의 시중을 들고 그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서 벌을 대신했다.

‘젠장…… 조선인의 시중을 들라니!’

아무리 아가씨의 명이라고 해도, 자기보다 어린 조선인 생도를 「와까단나(도련님)」라고 부르며 모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굴욕감을 느꼈던 다까히로였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의 여러 일들을 접하며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아가씨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 해.’

마치 몇 년 동안은 익히 사람들을 이끌어본 것처럼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나, 불리한 여건과 상성에도 불구하고 흡혈귀 교수를 격파해낸 것.

거기다가, 마치 정말로 윗사람인 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대범한 태도까지.

백철연의 곁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고 나자, 다까히로 역시 백철연이 도무지 일개 생도에 불과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과연, 대단한 인물이더군요. 그는 보통의 조선인이 아니었습니다. 제 편견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까히로에게 렌까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용서는 받았나요?』

『예. 시라바야시…… 도련님은, 저를 용서함은 물론 아가씨께도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흐­음. 제 면전이라고, 또 가감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까히로 상.』

『……예. 전연 틀림없습니다. 제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절복해도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사실이리라. 그제서야 렌까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백철연에게 다까히로의 목이나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는 것보다, 다까히로로 하여금 백철연의 시중을 들게 한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더욱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이전의 실수를 용서받음은 물론, 부하의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았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과 시마즈 구미에 대한 확실한 호감까지 얻어냈다.

‘후후, 시라바야시 상……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랍니다.’

입학식 전날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계속 그녀를 놀라게 했던 백철연이었다.

그 후 실습에 난입한 중형 마수를 쓰러트리고, 각성능력자 강도를 제압하고, 게다가 이번에는 학교 교수로 위장하고 있던 흡혈능력자를 격파했다는 것까지 전해들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그의 수많은 활약들을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렌까의 갈망은 더욱 심해져 갔다.

백철연이 만약 아무 비밀도 없는, 그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생도일 뿐이라면, 렌까 자신의 혹독했던 17년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기에.

‘알아내지 않으면……!’

그런 백철연의 저력이 일체 어디서 나오는지 아직은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지만, 이번에 다까히로를 통해 이루어진 백철연과의 관계개선은 그야말로 작지만 큰 한걸음이었다.

‘당신의 비밀을 알아낼 때까지, 저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요.’

흡족해진 렌까는 여전히 싱긋 웃으며 다까히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생했어요, 다까히로 상. 이번 일의 공과에 걸맞는 합당한 포상이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까히로를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다가,

『아차,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는 길에 전보를 받았습니다만.』

하고 말을 이으며 품에서 고이 접힌 전보 용지를 꺼냈다. 렌까는 다까히로가 건넨 전보 용지를 읽어내려갔다.

『전보를? …….』

짤막한 전보를 읽은 렌까는, 다까히로에게 잠시 대기하라고 명한 뒤, 옷차림을 정갈하게 가다듬고 저택의 중앙으로 향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선 렌까는 다시 한 번 옷차림을 가다듬고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보이는 벽, 상석이 위치한 방향의 벽에는, 시마즈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천막이 마치 방 전체를 내려다보듯 걸려 있었다.

둥근 원 안에, 네 자루의 검이 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모양의 가문(家?). 시마즈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 가문 아래, 고급스럽게 꾸며진 상석은 비어 있었다.

렌까는 미닫이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가 앉은 곳은 비어있는 상석이 아닌, 상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미닫이문 가까운 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탁자 앞.

렌까는 탁자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자 위에는 검은 색 전화기가 올려져 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기의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렌까는 바로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오또오사마(아버님).』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멀리 가고시마(??)에서 대대로 군림해온 시마즈(??) 공작가의 당주이자, 렌까의 아버지인 시마즈 다다노부.

그리고, 렌까를 이곳 경성으로 보낸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당주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렌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분명 나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이곳 경성으로 보낸 것이리라, 렌까는 그렇게 생각해오며 그의 지시에 따라왔던 것이다.

평생동안 그래왔듯이.

하지만, 무슨 일이실까. 보통의 일이라면 아버님이 이렇게 전화를 해 오는 일은 없었다. 렌까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 …… 예?』

그렇게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대답하던 렌까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씩 굳어가며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렌까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이렇게 갑작스레, ‘그’가 무슨 일로……?』

그렇게, 다시 한동안 말 없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던 렌까는,

『……알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마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렌까의 안색은 창백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까히로를 불렀다.

『……다까히로.』

방 밖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던 다까히로가 미닫이문을 열고 대답했다.

『예, 아가씨.』

『……아오끼 소좌, 가 경성으로 온다.』

『아오끼 소좌가요?』

렌까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오끼 히사부로 소좌.’

그는 화족 시마즈 공작가의 일원도, 엽사조합 시마즈 구미의 일원도 아니었다. ‘소좌’라는 계급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육군 장교였다.

하지만 당주 시마즈 다다노부에게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총애를 받고 있는 사내였으며,

현재 만주국 봉천(??) 주둔 관동군 7사단 11연대 특무장교이자,

렌까의 어린 시절, 시마즈 다다노부가 일찍이 정해 둔,

렌까의 약혼자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렌까의 깨어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베어나왔다.

***

다음날 아침, 경성역.

아오끼 소좌의 마중을 나온 다까히로는 곧 개찰구에서 나오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황색 군복을 입고 허리에는 94식 군도(??)를 차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성. 가죽 군화를 절도있게 옮기며 걸어오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인상이었다.

그것은, 험악하다거나 흉측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분명 섬세한 선을 가진 미남자라고 할 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짙은 눈그늘 위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삼백안과, 돌을 깎아 놓은 듯한 날카로운 무표정이 어진지 섬뜩하고 싸늘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다까히로로서는 저 사내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볼 때마다 어쩐지 위축되고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좌! 여기입니다!』

다까히로는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고 아오끼 소좌를 싹싹한 태도로 맞이했다. 다까히로를 발견한 아오끼 소좌는 차가운 무표정을 풀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다까히로 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5년 전 동경에서, 아가씨께서 학습원 초등부를 졸업했을 때 마지막으로 뵈었으니……』

『그래. 아가씨는 잘 계신가?』

『예. 소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그렇게 인사를 마친 다까히로와 아오끼 소좌는 경성역 앞에 주차된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앉은 아오끼가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조선에 온 것도 오랜만이군.』

『그렇네요. 소좌께서는 쭉 만주에만 계셨으니 말입니다.』

『아아. ‘사냥’을 하느라 바빴으니까.』

그 말에, 운전석의 다까히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냥’이라. 아오끼 소좌는 마수를 사냥하는 엽사가 아니라 직업군인이었다. 만주 주둔의 군인으로서, 그가 무엇을 ‘사냥’해왔을까……

다까히로는 그것을 구태여 묻는 대신 겨우 웃으며 화두를 돌렸다.

『소좌! 경성도 많이 바뀌었지요? 저기 미쓰꼬시 백화점도 재작년에 7층으로 증축했고요…… 본정 거리는 동경의 은좌(??) 거리도 부럽지 않습니다?』

『아아. 과연. 내가 떠나왔을 때와는 사뭇 다르군, 달라.』

아오끼 소좌는 겉으로는 감탄하는 말투였지만 다까히로가 룸미러를 통해 본 아오끼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그렇게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아오끼는,문득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다까히로에게 말했다.

『다까히로 군, 실례가 아니라면 앞 창문을 닫아줄 수 있겠나?』

『예? 아아, 그럼요.』

『고맙네. 그래, 자네 말대로 조선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오끼 소좌는 입꼬리를 길게 올린 미소를 유지한 채로 말을 잇는다.

『선인들의 역겨운 마늘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것은 여전하니까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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