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79화 (79/229)

〈 79화 〉 좋은 게 좋은 것 (1)

* * *

인자들은 순간적으로 방심하고 있었는지, 혹은 수리검 따위가 통하지 않아 당황했는지, 아니면 생전 본 적이 없는 모습에 문화­충격을 받았는지, 이유하의 빙결에 저항도 못하고 모두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떼구르르!

바닥에 떨어지는 얼어붙은 머리는 인자 대장의 것이었다.

서서 얼어붙은 채로 머리가 달아난 인자 대장은, 하지만 속까지는 얼어붙지 않았기에, 목의 단면에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푸슈———!

인자 대장의 목을 베고 다시 주저앉은 나는 이유하를 바라보았다. 몸의 굴곡을 따라 쫙 달라붙은 유광의 검은 색 표면은, 공장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었다.

모찌넨도의 강인한 점액질과 인조 고무가 합성되고, 거기에 이유하의 빙결 보호막에 의해 냉각되어 만들어진,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진 일종의 신소재였던 것이다.

그것이 이유하의 전신을 조이듯 감싸고 있었고, 물빛이 서린 은발의 땋은머리 한줄기만이 뒤통수로부터 비져나와 있었다.

후욱­!

이유하는 가뿐 숨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옆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이유하!”

달려가서 상태를 보니, 수트에 의해 전신이 밀폐되어 숨을 못 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땋은머리 때문에 뒤통수가 뚫려있었으니 완전한 밀폐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흡이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라서, 결국 혼절하고 만 것이었다.

‘벗겨내야 해.’

그런데 완전히 밀착되어있는 수트의 모습은 어쩐지 민망했다. 나는 일단 등이 위로 오도록 이유하를 뒤집었다.

수리검 따위로는 잘리지도 않았다. 마력을 강하게 주입한 칼을 쓴다면 잘리겠지마는,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있는지라 이유하가 다칠 수도 있었다.

“복자야!”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 나는 양복자를 불렀다.

“응, 왜?”

“여기에 마력감응을 해서 세뇌를 주입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등 쪽이 벌어지도록 명령을 내려 봐.”

“뭐어?”

양복자는 의아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일단 이유하의 옆에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으응…… 한번 해 볼게.”

양복자가 눈을 감고 손을 가져다대자 수트의 표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히익! 이, 이거, 살아있어! 모오오…… 기모찌 와루이께도(기분 나쁜데)……”

“살아있는 게 아니야. 일종의 화학반응이야.”

이 수트에 녹여진 모찌넨도는 이미 핵이 파괴되어 죽은지 오래다. 하지만 죽은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자극을 주면 근육이 반응하듯이,

양복자가 마음속으로 등이 갈라지는 형상을 상상하며 마력 신호로 된 명령을 내리자, 수트는 마치 등에 달린 지퍼를 내리듯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갈라진 수트의 안쪽으로 흰 맨살의 등짝이 드러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옷은 완전히 타버렸구나!’

이유하의 살갗은 빙결로 보호받았다고 해도, 그 위의 옷가지는 고열과 산성을 버티지 못하고 타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러니 곤란해졌다.

“야, 이거 어떻게 해야……”

이거 일단 벗겨내야 하는데, 그러면 이유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내가 당황하자 양복자가 외쳤다.

“다이죠부! 교복 있으니까라!”

양복자는 앞서 타고 왔던 오토바이의 사이드카에서 종이가방 하나를 가져와 교복을 꺼냈다. 낮에 옷 쇼핑을 하다가 갈아입으면서 넣어 둔 것이라고.

“으음. 난 등돌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입혀 줘.”

“헤에, 시라바야시 군! 우와끼모노인 줄 알았는데 이런걸로 하즈까시이노? 남사스럽구나?”

뭔 소리야? 아무튼 내가 같은 반 여자애의 알몸을 멋대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시발……

뒤에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결국 이유하에게 교복이 완전히 입혀졌다. 나는 한쪽에 허물 벗듯이 벗겨진 전신타이즈 수트를 집어들었다. 그 신축성 때문인지 한껏 수축되어 의외로 부피가 적었다.

‘이거,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지도.’

강해질 대로 강해진 모찌넨도의 특성을 이어받아 어지간한 물리적 타격은 막아주는데다가 신축성까지 좋았다. 이제 여기다 숨구멍만 틔운다든가 조금만 개조하면 든든한 헌터 수트가 되어줄 듯 했다.

그렇잖아도 수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지라—이런 모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나는 수트를 주워서 일단 허리춤에 묶어두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좋아. 내가 이유하 업을테니까 네가 렌까만 좀 부축해 줘.”

“흐흥, 그치만 속옷은 없어서, 세라하고 치마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기오쓰께떼네(조심하라구)!”

뭐?

그때, 쿠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장 한켠의 내벽이 무너져 내렸다. 공장 곳곳에 불이 번져가며 목재로 된 가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이런 미친 새1끼들.’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너마이트였다! 내가 폭파전문가는 아니라서 잘 모르긴 몰라도, 저만한 양이면……

‘공장 부지를 통째로 날려버릴 속셈이었나?’

건물을 날리고도 남는 양이었다. 곳곳에 붙은 불은 금방이라도 다이너마이트 무더기에 옮겨붙을 것 같았고, 이유하도 기절했기에 불을 끌 수는 없었다. 나는 양복자에게 외쳤다.

“아직 큰게 터지지 않았어! 곧 크게 폭발할 거야!”

“어, 어떡해?”

복도에 접한 창고에는 아직 무라사끼와 복면소녀가 있을 터였다.

“창고로 가자! 무라사끼부터 구하러!”

“와깠다요!”

양복자는 기절한 렌까를 염동력으로 들어올렸고, 나는 이유하를 업었다. 가죽과는 다른 물컹하면서도 미묘한 감촉이 등으로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복도를 향해 달려나갔다.

복도로 통하는 길은 좀전까지만 해도 방화 셔터로 막혀있었지만, 근처의 폭발로 인해 틀어져서 틈새가 열린 상태였다.

나는 이유하를 업은 채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창고에 가 보니, 고무 호스는 풀어져 있고, 무라사끼만 아까 그대로 덩그러니 벽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복면 소녀는 어디로 갔지?’

설마, 혼자 힘으로 고무 호스를 풀고 탈출한 건가? 아무튼 나는 급한 대로, 무라사끼에게 다가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싸대기를 연거푸 때렸다.

『무라사끼! 일어나! 일어나라!』

『우왓, 뭐, 뭐냐!』

『상황 설명은 나중에! 여기 곧 폭발해!』

『뭐, 뭣?』

나는 비몽사몽하는 녀석을 떠밀며, 복도를 달려나가 공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뒤의 공장 안쪽에서는 연거푸 작은 폭발이 뒤따라오듯 이어졌다.

‘시발, 이것들은 또 뭐야?’

이제 보니, 공장 앞마당에도 그저 자재라고 생각했던 것 사이사이에도 다이너마이트가 쌓여있었다. 대체 얼마나 작정하고 테러를 하려했던 거야?

공장 안쪽의 다이너마이트 무더기가 폭발하면, 공장 앞마당의 다이너마이트들도 연쇄적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일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말 터.

‘빨리 도망쳐야 해.’

그런데 나는 이유하를, 그리고 양복자는 렌까를 업고 달리느라 달리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공장 부지를 빠져나가더라도 폭발에 휘말릴텐데……!’

그런데, 공장 부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조용히 정차되어있는 검은 자동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입구를 지키던 순사들—지금은 목이 잘린—이 타고 온 그 경찰차였다. 내가 외쳤다.

“자동차다! 다들 저기에 타! 내가 운전할게!”

“시, 시라바야시 군도 운전할 줄 알아?”

당연하지. 운전 못 하는 헌터가 있을라고? 21세기에서의 나는 헌터가 되기 전부터 자랑스러운 2종 보통 운전면허가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던 무라사끼와 업고 있던 이유하를 뒷좌석에 밀어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양복자도 기절한 렌까를 뒷좌석에 태우고 조수석에 올랐다.

그런데, 운전석에 앉은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몰지?’

옛날 차량이니 당연히 자동 변속이 아니라 기어 변속일 것 정도는 각오했지만, 그 정도 차이가 아니었다.

흔히 알고있는 기어봉이 아니라 용도를 알 수 없는 레버가 곳곳에 달려있었고, 페달의 배치조차 달랐다. 그보다 우선 시동을 어떻게 켜야하는지부터가 난관이었다.

사실, 1930년대 차량의 운전법이 21세기의 현대와 같을 리가 없었다는 점을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젠장! 구닥다리 포드 티­ 모델이잖냐! 비켜라! 내가 운전한다!』

무라사끼가 뒷좌석에서 문을 열고 뛰쳐나오며 외쳤다. 자리를 양보하자 무라사끼는 바닥에 있는 버튼을 꾹 밟아 시동을 걸고, 운전석 왼쪽에 있는 정체불명의 레버를 앞으로 민 뒤, 핸들에 붙어있는 레버를 당기며 차를 출발시켰다.

부아아아앙!

덜컹거리는 흙길을 박차고 달리는 구형 경찰차. 차가 공장 부지를 벗어나 시멘트 깔린 도로로 접어들자마자,

콰아아아앙!

뒤에서 거하게 폭발하는 공장. 이어서 연거푸 커다란 폭발이 이어져 사방을 밝히는 폭염이 마치 작은 버섯구름처럼 보일 정도였고, 멀리 떨어졌음에도 차가 흔들릴 정도였다.

‘인자들은 뼈도 못 추렸겠지.’

이유하의 빙결은 놈들을 붙잡는 족쇄 역할만 했을 뿐, 저런 폭발로부터는 전혀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러니 인자 놈들은 완전히 폭발사산했으리라. 무라사끼는 핸들을 잡은 채, 백미러로 폭발을 쳐다보며 외쳤다.

『젠장! 어떻게 된 거냐! 설마, 불령한 조선인 녀석들이 기어코 폭탄 테로­를!』

무라사끼는 공장에 들어가자마자 뒤통수에 복면 소녀의 당수를 맞고 기절했으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 처음 공장에 들어가며 추측했던 그대로, 여전히 ‘태극단’의 소행인 것으로 알고있는 것이었다.

조수석의 양복자가 눈치없이 대꾸했다.

『에에, 전연 조선인이 아니었다구! 딱 봐도—』

『도미꼬!』

뒷좌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고, 이어서 외쳤다.

『아니야! 놈들은 극악무도한 불령선인이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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