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90화 (90/229)

〈 90화 〉 올바른 사내

* * *

‘……키메라!’

만주에서 들여왔다느니, 희귀 마수라느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마수임이 분명했다.

이 시대에 그런 것을 만들 기술력이 있는지는…… 이미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마문과 진공관 컴퓨터까지 존재하는 마당이었으니 기술력은 둘째치고,

키메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 동물의 샘플을 얻기 가장 좋은 곳은 동물원이었던데다, 그런 동물원에서 나까모리 교수가 전용 연구실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

‘이것도 교내 세력의 음모인가?’

설마, 키메라를 만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하려는 것일까? 실전에서 어느정도의 살상력이 있는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알기 위해……

‘그럼, 지금 바로 학교에…… 아니다.’

학교로 향하려던 나는 생각을 고쳤다. 학교 마수 축사에 있는 키메라들은 당장 분대전술학 실습때까진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나까모리 교수. 그는 오늘 창경원 동물원에 간다고 했다. 동물원 안에 있다는 그의 연구실을 급습한다면…… 키메라를 만들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게다가 연구실 내부는 나까모리 교수만 출입할 수 있다고 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제압하고 심문해서 교내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번엔 내가 먼저 친다.’

내가 급히 부엌에서 뛰쳐나오자, 뒤에서 함서주가 놀라며 물었다.

“어딜 가셔요?”

“창경원.”

“네? 지금 가는 거예요? 밥 다 됐는데 먹구 가면,”

“아니. 이번엔 나 혼자서 가는 거야. 놀러 가는게 아니라 교수에게 급한 볼일이 있어.”

물론 창경원에서 나까모리 교수가 키메라를 풀어버린다든지 혹은 싸움을 벌인다든지 하는 그런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내가 지금 창경원에 가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까모리 교수의 연구실을 염탐하고 그를 제압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 일을 하는데 태평하게 애를 데려갈 수는 없지.

그런데 함서주는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손님 혼자서만요……?”

“응. 오늘은 교수 만나러 가는 거니까, 다음에 나랑 가자. 솜사탕 사줄게.”

“피! 솜사탕이면 단 줄 알아요! 내가 앤가!……”

그런 함서주를 뒤로 하고 내가 대문을 나서려고 하자, 방 안에 있던 함원삼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말했다.

“학생 양반. 이 밤중에 또 어딜 가쇼? 급한 모양인데…… 내가 태워주까?”

함원삼이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한 김에 태워주겠다고 말했지만, 괜히 어르신을 고생시키기는 싫었던 데다가, 함서주를 두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는 거절했다.

“아뇨. 됐습니다. 이 앞에서 택시 타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고 대문을 나서자, 떠나는 나의 뒤로 함서주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또 나만 떼놓구 여학생들이랑 놀러 가는 것이지! 이잇, 속상해……”

***

같은 시간, 기숙사.

기숙사 수면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이유하는, 방 안에서 책상 앞에 앉아 전기 스탠드 불을 켜놓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것은 고등보통학생용 교과서. 물론 여기서 국어(國?)가 뜻하는 것은 일본어였다.

최소한 보통학교는 졸업하고 온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신식 교육을 받지 않았던 이유하는 전공 공부와는 별도로 틈틈히 짬을 내서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렇게 뒤늦은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이래, 이유하의 일본어 실력은 어느덧 꽤나 능숙해져 있었다. 상대를 지칭할 때 「소나따(??; 그대)」같이 옛스러운 말투를 쓰는 것을 보고 렌까도 감탄했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이제 이유하는 보통학생 수준의 기본 회화를 넘어 고등보통학교나 전문학교 수준에 필요한 어휘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어도 썩 능하게 된 이유하였지만……

‘백철연, 그대를 따라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구려.’

언어는 그럭저럭 익혔다. 그리고 여러 신식 풍습도 즐거이 배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먹는 것도 능히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이국적인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았고, 카레는 그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니 점심으로 카레가 나오는 토요일마다 이유하로서는 곤욕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학교니까.’

이런 사소한 것에도 적응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만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선뜻 입에 대지도 못 하고 있었는데, 아까는 백철연 때문에 떠밀리듯 결국은 먹게 되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절대 입에도 안 대었을 것을 절반이나 먹은 것이다.

이유하는, 카레를 전부 다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백철연 덕분에 절반이나마 성공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작은 한 걸음을 내딛은 것 같아 내심 뿌듯했고, 또한 백철연이 이렇게 자신을 이끌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백철연.’

하여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쩔 때는 자신을 놀려먹는 것이 얄밉기까지 했다. 어제 창경원에서만 해도, 이유하는 속옷도 안 입었던 채였어서 난처했는데—물론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백철연은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타러 가자고 하는 등…….

하지만 역으로 이유하가 살짝 되받아치며 놀리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기도 하는 것이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유하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유하는 믿고 있었다.

이따금씩 보이는 천치같은 모습 뒤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현명함이 번뜩였고, 겉으로 보여지는 몰염치한 부일배같은 언행 뒤에는 조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유하는 그를 어느덧 한 달 동안이나 봐온즉 확신했던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그대는 올바른 사내요.’

그런 사내가 자신을 이끌어준다는 생각에, 이유하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또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일은 공일(일요일)이니 한번 더 경성 시내로 나가 양식 탐방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양복자와 함께 말이다.

이유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가에게 미리 약속을 해 두는 것이 좋을 테지.’

마침, 양복자는 기숙사의 옆 방—그러니까 아이까와의 방에 와 있었다. 아이까와가 밤에 무섭다고 해서 자고가기로 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옆 방에서는 줄곧, 두 여학생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양복자는 통학을 하면서도 어쩐지 아이까와의 방에서 자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유하는 옆 방의 문을 두드렸다.

『리 상!』

아이까와가 반기며 문을 열어주었고, 안에 앉아있던 양복자도 이유하를 보고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랏샤이마세! 너도 같이 놀래? 여기 앉아서 과자도 좀 먹고!”

이유하는 방 한켠에 다소곳이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떠들면 사감이 올라올 테니 조심하시오. 헌데 무슨 얘기를 그리 즐거이 나누고 있었소?”

“엊그제 고무공장 얘기! 모찌넨도 물리쳤던 얘길 아이까와 쨩한테 해주고 있었지!”

본래 내일의 약속을 잡으러 합석한 이유하였지만, 양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계속하시오.”

이유하 역시 사건의 당사자이긴 했지만, 사일로의 뜨거운 용액에 빠진 후 기억은 없었고, 막연히 백철연이 구해줬겠거니 생각했는데 깨어나보니 속옷도 없이 교복 차림이었던 것 등등 의아한 점들이 있었던 것이다.

“좋아! 마침 재미있는 대목을 얘기해주고 있었으니까 너도 같이 들으면 되겠네! 일본어로 얘기할게!”

양복자는 일본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폭탄…… 그렇게 갑자기 폭탄이 쾅쾅 터지고, 시라바야시 군도 의문의 복면인들에게 목이 잘려버리려는 찰나의 순간……!』

『히익……』

아이까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양복자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더니 연극적인 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때 나타난 것은, 아아! 그것은 흡사 고무 괴인!』

『꺅! 고, 고무 괴인이라니?』

『저 고무 괴인은 무엇이냐! 경악하는 복면인들! 복면인들이 수리검을 던지지만 통하지 않는다! 일체 무엇이란 말인가! 전신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쟈쟌 하고 나타난 그의 정체는…… 다름아니라, 고무 용액에 빠졌던 리­류까! 전신의 굴곡이 드러날만치 밀착된, 쓰루쓰루(번들번들)한 숨막히는 옷을 입은 그녀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이유하는 양복자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잠깐. 무어라 했소? 일본 말이라 내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응? 그러니까 네가 나타났을 때 말야! 수영복처럼 매끈한 옷인데 내복같다고 할까, 맨몸에 착 달라붙어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니까! 아메리카나 구라파에도 그런 옷은 없을 걸! 굉장했지—!”

당시로서는 전신타이즈라는 말이 없었던 만큼 양복자는 자신이 본 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이유하는 어질어질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 정녕 그런 걸 입었단 말이오? 하지만 깨어났을 때는 교복 차림이었소만……”

“응! 그야, 내가 기리까에 해줬지!”

“……그, 고맙소만…… 내가 맨몸에 입었다던 그 해괴한 옷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대가 가지고 있소?”

이유하는, 대체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어떤 기괴한 꼴을 했단 말인가 하는 부끄러움에 어질어질했고, 또 자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에 대체 뭘 입었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니! 나한테는 없는데…… 아, 맞아! 시라바야시 군이 가지고 있을 걸? 챙기는 걸 봤어.”

‘백철연이?’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양복자가 말한 옷을 무어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으나, 맨살을 덮은 옷이니 속옷과 매한가지의 옷이리라. 그런 것을 백철연이 남몰래 챙겨갔단 말인가?

‘설마!’

세간에는, 부녀자가 입었던 속옷을 탐닉하고 또 심지어 스스로 입기까지 하는 변태성욕자가 있다고는 하던데, 설마 백철연도 그런 경우인 것인가?

‘……아니, 아니야.’

이유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알기로 백철연은 그런 기괴한 취미를 가진 사내일 리가 없었다. 이유하는 백철연의 심중을 애써 헤아려 보았다.

‘그이는 필히 내가 수치심을 느낄 것을 염려하여 나에겐 숨긴 것이리라.’

그렇다. 백철연은 다만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그 옷을 숨겼을 뿐, ‘여성내의도착자’ 따위일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 마음은 고마우나, 이젠 알아버렸으니 되찾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속옷이나 마찬가지의 물건을 외간남자에게 한시라도 맡겨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양복자.”

“응응? 왜?”

늦은 시간이었지만 백철연의 하숙집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이유하는 양복자에게 말했다.

“택시를 좀 불러줄 수 있겠소?”

***

택시를 타고 창경원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어 창경원 안으로 입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구경객들은 아주 많았는데, 함서주의 말마따나 밤의 벚꽃, 즉 야앵(??)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화려한 조명 장치로 곳곳이 밝혀진 밤의 창경원은 낮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서주가 그렇게 오고싶다고 찡찡대던게 이해가 가네.’

확실히 이 좋은 풍경을 나 혼자 보는 것이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입장할 때 간단한 소지품 검사가 있었지만 딱히 걸릴 것은 없었다. 교도(??)는 두고왔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칼을 들고 왔더라도 가지고 들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입장할 때 무기는 반납하게 되어있었으며,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렌까’라는 만능 입장권이 없었으니 개인 자격으로 들어온 내가 동물원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칼이 없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었다. 나까모리 교수는 각성능력이 없는 일반인이니, 무기가 없어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궁지에 몰린 나까모리 교수가 혹시 총이나 나이프라도 들고 저항한다면 귀찮아지리라. 그런 생각에 나도 나름대로 준비해온 것이 있었다.

일단 창경원 안에 입장한 나는 화려한 야간조명이 비치지 않는 구석의 수풀로 몸을 숨기고는, 나는 가방을 열어 아까 하숙집에 잠깐 들렀을 때 챙겨온 물건을 꺼냈다.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대신 이런 상황에서 매우 유용한 것을 가져온 것이다.

‘후후……!’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그것은 저번 고무공장에서 절묘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전신 타이즈 수트로써, 21세기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신축성이 있었기 때문에 활동성도 나쁘지 않았고 어지간한 날붙이 공격도 막아주는 등 괜찮은 방호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얼굴을 가리면 내 정체까지 숨길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나까모리 교수가 혹여나 나이프 따위를 휘두르더라도 이거면 안심이리라. 나는 신축성에 의해 작게 쪼그라든 전신 타이즈를 펼쳐들고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드디어 이걸 입어볼 일이 생기는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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