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164화 (164/229)

〈 164화 〉 친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4)

* * *

‘하숙에 전화기가 있는데, 저에게 전화를 안 했다고요?’

다까히로의 보고가 끝나고, 렌까는 탁자 앞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방에 전화기를 들여놓았으면, 마땅히 저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시라바야시 상은 친구도 적고, 게다가 시라바야시 상의 주변은 대부분 가난한 조선인들 뿐이기에, 전화할 상대도 딱히 없지 않나요?’

‘조선과 내지 사이의 통화요금이 높다고는 해도, 시라바야시 상이 그것을 지불하지 못 할 것도 아니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전화를 안 하는 거죠?’

‘설마, 제가 전화번호를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든지……’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며 초조해하기도 잠시,

—따르르르릉!

또 전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렌까는,

‘후후! 그럼 그렇지요!’

이번에야말로 백철연이겠거니 생각하며 수화기를 얼른 들어올리며 말했다.

『후후! 심야중에 레디­에게 전화라니, 신사의 예의는 아니지만 용서해 드리지요.』

—『졸자(?者), 주군에게 보고드립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보고를 올리도록 정한 것은 주군이 아니신지요……?』

이번엔 오스에였다. 렌까는 얼굴이 화아 물들어서 수화기 너머로 외쳤다.

『이잇……! 너! 너어!』

일단 화를 내고 보았으나,

‘아니지, 아니지. 오스에에게 화를 내면 안 돼.’

렌까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할 것도 없이 오스에의 말이 맞았다. 이 시간에 보고를 올리도록 정한 것도 렌까 자신이었고, 전화 상대를 지레짐작하고 실수를 한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불찰이었다.

게다가, 오스에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전부터 생각해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던 렌까였다.

가쓰라이 오스에(????), 그녀는 누구인가.

아버지가 파견한 인자(?者) 부대의 일원이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렌까에게만 충성을 맹세한, 렌까만의 부하였다.

‘오로지 나만의 사람. 나에게만 충성하는 사람.’

물론 시마즈구미 경성분조의 부분조장 다까히로도 충성스럽긴 하지만, 시마즈구미 경성분조는 시마즈구미의 분파에 불과하고, 시마즈구미의 최종 책임자는 시마즈 가문의 당주—즉 아버지이기 때문에, 결국은 아버지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다.

반면 오스에는 당주가 아닌 렌까에게만 충성하는 자였다. 언제까지고 렌까의 곁을 지킬 사람이라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내 편이 될 사람.’

최근들어 아버지의 저의가 의심스럽고 또 아버지에게 반감이 들기 시작한 렌까로서는, ‘자신만의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어졌다.

그래서 오스에를 이전보다 더 중히 여기게 되었고, 자신이 경성을 떠난 동안, 오스에에게 특별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만일에 대비해, 조금 더 힘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

물론, 렌까는 아버지에게 거스른다는 생각을 조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자신이 그러리라고는 차마 생각도 못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런 무의식이 렌까의 마음을 부추기고 있던 것이었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해야 할 날이 온다면…… 자신만의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후우, 미안. 잠시 착각한 것 뿐이야. 그래, 훈련은 어때?』

렌까는 드물게도 사과하며 오스에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수화기 저편으로 문제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렌까는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의 눈에 띄지 말고…… 물론, 인술(??)을 익힌 너에게 눈에 띄지 말라는 것도 괜한 참견이겠구나.』

—『주의하겠습니다. 별도로 명령하실 것은 없습니까?』

『명령할 것이라……』

오스에에게 시킬 것이 있을까 생각하니 얼른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백철연의 하숙집 전화번호를 알아오라고 할까?’

오스에에게 그렇게 명령하려던 렌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스에에게는 훈련을 시켰으니 사사로운 일은 시키지 말자. 게다가 내가 시라바야시 상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먼저 전화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렌까였지만,

『혹시나, 학교에서 시라바야시 상에 마주치게 되면, 뭔가 잊은 것은 없는지 슬며시 물어봐 줘.』

이렇게 명령하고 말았다. 자신이 전화번호를 주었다는 것을 백철연이 잊고있지나 않나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래, 이 정도야 괜찮겠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렌까에게 수화기 너머로 오스에의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졸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응. 쉬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통화를 끝낸 렌까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

문득 집중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전화기의 옆, 탁자 위에 올려 둔 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며 말했다.

『후우…… 어째서일까? 까뜨린느.』

렌까가 꺼내든 것은 그녀가 일찍이 까뜨린느로 이름지은, 푸른 드레스를 입은 금발벽안의 인형. 렌까는 인형을 손에 들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평점심을 잃었어, 까뜨린느. 왜 내가 초조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

물론, 인형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게 다 백철연 때문이라는 것을 렌까 역시 알고 물었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철연의 능력은 전부터 인정하는 바,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호의를 보이던 렌까였다. 그런데 그 호의에 대한 가시적인 반응이 없자 마음이 초조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백철연이 자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괘씸한 일이었다. 렌까는 그녀의 인형, 까뜨린느를 손에 들고 묻듯이 말했다.

『하아…… 시라바야시 상은 일체 왜 그러는 걸까?』

그렇게 혼자 물은 렌까는, 이번에는 까뜨린느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왜겠어? 은혜를 모르는 조선인이라서 그렇지! 조선인은 할 수 없어!』

그리고서는,

『뭐? 그런 말은 나빠, 까뜨린느!』

하며, 말 없는 인형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격하게 흔드는 것이다.

『그런 인종차별적인 말은 하면 안 돼!』

『조선인은 할 수 없어!』

『까뜨린느! 너, 그런 말은 그만두지 않으면!』

『조선인은……』

그렇게 한참을 인형과 실랑이를 벌이는 렌까였으나, 렌까에게 이것은 그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환이었다. 어차피 셀룰로이드 조각에 불과한 인형일 뿐인데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보이면 뭐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후우……’

한참을 그러다 인형을 내려놓은 렌까는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여유있는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하지만 곧, 저에게 의지하고야 마는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요, 시라바야시 상.』

언제쯤 경성에 돌아가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경성에 돌아가면 백철연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아니, 곧 그렇게 되리라.

렌까는 확신이 있었다. 금전적인 호의도, 정치적인 도움도 마다하는 백철연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략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당신도 결국, 사내니까요.』

렌까 역시 남자의 생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래의 여자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면 넘어오지 않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후후…… 제가 이런 방법까지 쓰려고는 생각치 않았습니다만.』

백철연도 일단은 남자였으니, 자신이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계속 주위를 멤돌며 호의와 애정을 퍼부으면, 결국은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리라.

『물론, 진짜로 마음을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렌까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방 한켠의 체경(??; 전신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가고시마의 심산무도(?山??) 진달래가 수놓아진 아름다운 진홍색 기모노를 입고 있는 렌까.

그런 화려한 화복(??)과, 또 그것을 입은 렌까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아, 렌까 스스로 생각컨대 부끄럽지만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물론, 렌까도 알고 있었다. 속으로 일본에 반감이 있는 백철연이라면 이런 모습을 오히려 탐탁치 않게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렌까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게 당신의 약점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조선을 애정하는 그것이야말로 백철연의 약점이었다. 그가 조선인임에 자부심을 가지며 조선을 사랑하는 만큼, 렌까가 언제 한 번 조선복이라도 맞추어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의 마음도 손쉽게 넘어오리라. 렌까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후후…… 갈아입어 오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어요.』

가고시마의 밤이 깊어갔다.

***

‘좋아. 이제 미국은 언제든지 갈 수 있고.’

일요일을 한가하게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나는, 앉은뱅이 책상 위의 전화기 옆에, 가지런히 올려둔 신분증명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일본행 배표를 살 수 있지. 그리고 일본에서 미국행 표를 사면 되는 거야.’

게다가, 종로경찰서장의 인장만큼은 뚜렷하게 남아있는 반면, 기입되어있던 신상정보는 지워지는 잉크로 쓴 탓에 벌써 반쯤 흐릿해졌다.

이제 거짓 정보를 기입해서 비각성자인 척 하면 해외로 나간다고 해서 딱히 막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나중에 거짓임이 밝혀져도, 일단 미국에 가기만 하면 일본이 나를 잡을 방법이란 없다.

일본은 그럴 여력도 없이 곧 닥쳐올 전쟁 때문에 몰락할 것이고, 미국은 언제나처럼 황금시대가 이어지게 된다.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

‘그래도 뭐, 미국가서 세탁소나 할 것이 아니라면 학교는 계속 다녀야겠지만 말야.’

일단 신분증명서는 따 두었지만 내 장기적인 플랜은 변함없었다.

가능하면 학교를 계속 다녀서 졸업장을 갖고 미국런하는 것이 여전히 최우선 목표였고, 이 신분증명서는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재빨리 미국런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적어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언제든 미국에 갈 수 있는 거야.’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이 신분증명서의 의미는 컸다. 이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이 놈의 조선바닥을 뜰 수 있게 되었기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애국심이—겉으로 보이는 최근의 내 행보 때문에 오해가 있을까싶어 덧붙이자면 일본이 아닌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앞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그 구렁텅이에 나를 밀어넣고 싶지는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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