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4)
* * *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연거푸 몇 편을 보고, 서너 시간 쯤 지났을까.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나를 따라 영화관에서 나온 렌까가 말했다.
『서부극도 그렇지만, 이거야말로 터무니없이 허망한 공상극이군요! 시라바야시 상은 설마, 우주인이니 화성인이니 하는 것의 존재를 믿나요?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구를 침공할 것이라고?』
『아니, 믿겠냐. 화성에는 화성인은 커녕 생명체도 없는데.』
『……묘하게 확정적이군요? 천문학은 잘 모르지만, 화성에는 운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렌까가 의외로 열을 올리기에 나는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천문학자들이 운하인줄 알았던 것은 그냥 예전에 물이 흐른 흔적이었고, 탐사선이 가보니 물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서 없고 그냥 흙과 먼지밖에 없는 곳이야. 화성인 같은게 존재할리가 없—』
『예?』
아차. 또 미래 얘기를 하고 말았다.
『아니, 신경쓰지 마.』
『시라바야시 상은 과학도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도 저런 엉터리인 영화를 잘도 보시는군요?』
『뭐, 그래도 재밌잖아. 현실과는 별개로, 상상의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 역시 영화는 미국이 잘 만들지.』
그 말에 렌까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하지만, 그건 그렇지요. 미국의 영화 기술은 꽤나 선진적이라서, 이런 터무니 없는 내용의 영화라도 실제 재미있던—』
하고 말하던 렌까는,
『다, 다릅니다! 서부극이니, 공상극이니, 미국의 영화 따위 전부 터무니없는 것들만 있어서, 바보처럼 정신력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 뿐입니다!』
하며 급히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이년, 영화 상영되는 내내 눈도 못 떼고 잘만 봐놓고선 이러네. 그렇게 왠지모르게 열을 올리던 렌까는,
『……하지만,』
이내 태도를 누그러트리고는 문득 말했다.
『가끔은, 시라바야시 상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겁네요. 확실히 기분전환은 되었다고 할까요.』
『다행이네.』
어쨌든 기분전환이 되었다면 다행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렌까도 별 이상한 프로판간다 영화가 아니라 이런 흥미위주의 영화를 본 것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슬슬 어두워져가는 혼마찌 거리에서 선은전 광장을 향해 걷던 중,
『시라바야시 상.』
하고 렌까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응?』
『오늘 당신과 함께하는 동안, 저 역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되묻지는 않았다. 오늘 만나자마자 얘기했었던, 이 ‘가짜 아베크’에 대한 생각이었겠지. 딱히 내 대답을 기대했던건 아니었는지 렌까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말대로, 저는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당신 역시 애초부터 저의 본음을 파악, 대동아공영회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목적으로 저의 박자에 맞춰 주었던 것. 그렇지요?』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렌까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훗. 결국은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와 이렇게 어울려 주었지요.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길가의 영란등(???) 가로등 불빛이 막 켜지고, 흰 백열구의 불빛이 비추는 렌까의 미소지은 얼굴은 어딘지 씁쓸해 보였고, 우리는 잠시 그렇게 가로등 불빛 들어온 혼마찌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이대로 끝이려나.’
아무래도 오늘은 이렇게 나름대로 기분전환을 하긴 했지만, 나를 끌어들여야하는 렌까 입장에서는 곤혹스럽겠지. 자신의 계획이 모두 물건너갔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이대로 헤어져야하나 싶어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즈음, 렌까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시라바야시 상은, 대동아공영회의 비밀을 알고 싶은 것이지요.』
그다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드디어 말해주려나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실은, 저도 시라바야시 상에게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을 전부 털어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준비가 안 됐다며.』
『예. 하지만 제가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들은 뒤 당신의 행할 선택이 저는 심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할 선택이 걱정된다고?』
『그래요. 그러니—』
잠시 말을 멈춘 렌까는 뭔가 결심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단 한가지 약속해주실 수 있다면,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을 알려드리지요.』
『뭔데?』
하고 내가 묻자,
‘엇.’
렌까는 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가슴팍에 손을 얹고, 붉은 기운이 서려있는 두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렌까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평소의 장난처럼 묻는 것이 아닌, 정말로 진지한 질문이자 부탁. 그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렌까가 걱정하던게 이거였나.’
내가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이란 것을 들으면, 혹시라도 내가 허튼 짓을 할까봐서. 내가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을 막으려고 앞뒤 안 가리고 저항할거라고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대동아공영회의 진짜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놈들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고, 나는 조선인이었으니 렌까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렌까의 염려와는 달리, 나로서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 생각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미국이 시켜주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지.’
독립운동가들은 인간적으로 존경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절대로 없단 말이다. 어떤 변수가 있어도 이건 이미 확정된 미래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내가 대동아공영회와 척을 지게 된 것도, 그저 대동아공영회 놈들이 내가 졸업해야 할 학교에 이상한 해꼬지를 하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
그러니,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겠다’라는 약속에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이다.
『그거야, 당연히—』
그래서 바로 대답하려 했는데,
『물론, 어려운 약속이라는 것은 저도 십분 알아요. 시라바야시 상의 신념과 충돌하는 약속일테니까요. 그러니 즉답하실 필요는 없어요. 충분한 고민을 한 뒤에 답하셔도…… 다만, 너무 늦지는 않게……』
하며 렌까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없다는 듯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음.’
하긴, 이런걸 곧바로 답하면 오히려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렌까가 보기에 나는 자부심에 가득 찬 조선인인데, 내가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겠다고 곧장 말한다면 바로 믿을까? 나같아도 안 믿겠다.
그래서, 나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지……. 밤새 고민해보고 내일 답해줄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렌까는 작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좋은 대답을 듣기를 바라겠습니다.』
『응. 내일 보자고.』
『예. 명일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도록 하죠.』
그렇게 렌까는 운전수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돌아갔고, 나도 길가의 택시를 잡아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드디어 내일.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을 알게 되겠구나……!’
***
백철연과 헤어진 뒤, 렌까는 운전수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남산 자택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내일이군요.’
렌까가 제시한 약속에 대해, 백철연은 내일 답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과연 백철연은 알고 있을까?
‘그 대답에, 당신의 목숨이 걸려있다는 사실을요.’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라는 약속의 여하에 따라서, 백철연은 그야말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렌까는 생각했다.
‘저의 바램대로 그가, 목숨까지는 걸지 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백철연이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않는다면. 그렇다면 대동아공영회의 계획을 알고 나서도 무모하게 저항하지는 않을테고, 결국 살기 위해서라면 대동아공영회와 그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렌까는 생각했다.
‘그래. 그것으로 충분……’
하지만 만약에라도 백철연이,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겠다고 말한다면—
‘……그 때는, 정말로 어쩔 수 없겠죠.’
정말 그렇다면 무엇으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을테니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었다. 대동아공영회에 포섭하는 것은 커녕, 렌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불가능할테니까.
물론, 이것이 다소 성급한 결정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렌까 스스로도 마음이 다급했기에, 그렇게라도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한 기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백철연이 렌까의 의중을 간파한 상황에서 이런 약속을 받아내야만 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가짜 아베크와 이성적 매력을 무기로 일본제국에 대해 호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없었을테니까.
그래서 백철연에게 부탁한 약속은, 백철연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또한 최선의 수단이었다.
렌까는 기도하듯 생각했다.
‘부디, 스스로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를.’
렌까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자가용은 남산의 자택에 접어들었다. 렌까는 운전수를 퇴근시키고, 정원을 가로질러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오스에를 불러 물었다.
『나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방의 밖에서 줄곧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흐음.』
사실, 오스에에게 시키나마나 당연한 일이었다. 렌까의 침소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이었던데다가, 훌륭한 인자(?者)인 오스에가 지키고 있었으니만큼 아무도 저택 근처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였으리라.
‘역시, 외부인의 침입은 아니야. 그저 내가 최근 피곤해서 실수와 착각을 한 것 뿐……’
렌까는 오스에를 물리고, 두꺼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에엣……?’
방 안은, 도저히 더 이상은 자신의 착각이나 실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었고, 까뜨린느 역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으며,
테이블 위에는, 렌까의 만년필과, 노트에서 뜯어낸 듯한 종이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무언가 쓰여진 채로.
‘뭐, 뭐야, 이건……?’
렌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로 다가가 노트 조각을 집어들었다.
노트 조각에는 비뚤비뚤한 일본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 이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나 안다. 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큰 문제 발생. 막으려면 인형 필요하다. 아무도 몰래]
문장은 도중에 쓰다 만 것처럼 거기서 끊겨 있었고, 일본어이기는 했으나 마치 어린아이가 적은 것처럼, 아니 어린아이가 왼손으로 적은 것처럼 비뚤비뚤하고, 한자도 정서법도 엉성한 문장이었다. 그것을 본 렌까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이건 결코, 자신이 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스트레스로 인해 사소한 것을 착각하거나 깜빡했다고 해도, 이런 것을 자신이 썼을리는 없었다.
물론, 무생물에 불과한 인형 까뜨린느가 스스로 움직여서 이런 것을 썼을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외부인의 소행이 분명한데, 문제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말인가?
우두커니 굳은 채 그런 생각을 하던 렌까는 문득, 노트조각에 적힌 글귀에 눈길이 닿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 하늘에서 내려와……?』
그렇게 글귀를 따라 중얼거리던 렌까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며 한 마디 내뱉었다.
『화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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