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82화: 사적인 자리
* * *
『...잘생긴 백작님을 화나게 했다. 협상도 망쳤다.』
누군가의 공책
***
"스카이히어로 백작님.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응? 서신?"
엘프와의 회담을 마친 그 날 저녁, 밥을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시녀가 찾아왔다.
"아버님께서 서신을? 무슨 일인가요?"
"아마 오늘 있었던 그 엘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은…."
나는 시녀에게서 서신을 받아 펼쳤다.
엘리자베스는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던 걸 멈추더니 내 옆으로 와 서신의 내용을 살폈다.
그러자 밥을 같이 먹던 다른 모두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웬즈데이 님. 무언가 큰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주인님, 이거 뭐야?"
"우으…. 아까 웬즈데이 씨가 사고를 크게 치긴 했는데…."
"거봐! 그러지 말라니까!"
주위에서 재잘재잘 들리는 말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서신을 집중하여 읽었다.
내용은 의외로 별거 없었다.
엘프들의 요구가 너무 가혹하다는 말과 그걸 막아준 나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내 손은 괜찮은 지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휴, 왕이 보낸다길래 걱정했지만, 다행히 좋은 말만 있었다.
"내용만 보았을 때는 폐하께서 제게 격려의 말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후후, 아버님께서 웬디를 많이 아끼는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으음, 내 직속상관이자 예비 장인어른께 잘 보이면 좋은 것이겠지.
그나저나 서신 맨 밑에 뭐라고 글씨가 더 있는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서신을 꼼꼼히 읽어나갔다.
"폐하께서 많이 당황하신 리프라이더 님을 위로한 후 영빈관으로 보내셨다 하시네요."
"많이 당황했데? 하긴, 그 엘프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어린 엘프를 사신으로 보낸 거야? 역시 자존심만 높은 족속들이네. 우리를 그렇게나 얕보다니."
"음…. 어리지만, 능력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 뭐 봐야 알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러자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가?"
"영빈관, 잠시 그 엘프 좀 만나러."
"지금? 왜?"
"아까 너무 거칠게 대했으니까. 지금 내가 친절하게 대하면 좋은 인상으로 남겠지. 사적으로 친해져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으으, 웬디랑 밥 먹고 싶었는데에…."
엘리자베스는 그런 나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오늘 낮에도 못 봤는데 저녁까지 같이 못 먹으니 아쉬울 법했다.
좀 위로해 주도록 하자.
나는 엘리자베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그녀도 격렬하게 혀를 얽혀왔다.
"우읍♡, 쪼오옥♡. 츄릅♡."
"전하.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밤이 있잖아요."
"네에♡. 기다릴게요."
방금 먹던 스테이크의 핏물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키스하자, 주위 여자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식사하는데 무, 무슨 짓입니까? 웬즈데이 님?"
"뭐야? 나도 해줘 주인님!"
"그, 그, 나, 나도오…."
"쳇. 웬즈데이 변태."
그래서 나는 다른 여자들이 불만을 말하지 못하도록 다 한 번씩 키스해주었다.
덕분에 입술이 조금 많이 부르텄다. 어딘가 바셀린 같은 기름이라도 구할 수 없으려나.
***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다.
아무래도 그 드워프와 싸운 인간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요행이라니, 치열한 싸움을 그저 요행으로 치부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라 그런 걸까.
아니다. 인간들은 나를 배려해서 밥도 맛있게 줬다.
그들의 주식인 고기를 완전히 제거한 엘프 맞춤 식단이었다.
옷도 좋은 옷으로 하나 선물을 받았고, 시설도 살던 나무로 된 집보다 훨씬 좋은 집이었다.
그냥 내가 잘못한 거다.
내 능력이 너무 달려서 그런 거다.
역시 나는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는 너무 무능하다.
"으흐윽…."
족장의 딸인데, 그것도 엘프 연합 내에서 힘이 세기로 유명한 리프라이더 부족의 영애인데.
고작해야 인간 놈들의 협조를 못 구했다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얼굴은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리프라이더 님."
"으, 으응?"
"리프라이더 님을 오늘 모시게 된 시녀입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은 특이하게 집안일을 돕는 시녀가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는 거진 대부분의 엘프가 징집돼서 시녀같은게 많이 없는데….
참 비효율적인 것 같다.
"왜?"
"스카이히어로 백작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그, 그 스카이히어로 백작이라면, 오늘 본 백작을 말하는 건가?
왜 찾아온 거지.
서, 설마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나를 해치러 온 걸까?
그 치료 마법을 쓴다면, 내 세계수 가지로 만든 활로도 제압할 수 없을 것 같다.
돌려보낼까.
여기 지금 나 혼자밖에 없는데. 나를 도와줄 다른 엘프 동지들도 없는데.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혹시 나를 용서해주지 않을까.
혹시 협상을 좀 더 양보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인물이 좋은 인간인데. 그렇게 능력이 있는 인간인데.
무턱대고 엘프 사신인 나를 죽일 리가 없을뿐더러, 박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 같다.
"환영한다 그래."
"알겠습니다. 이 방으로 모실까요?"
"응."
시녀가 문에서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자.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리프라이더 님. 이런 시간에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다행히도 그 백작님은 밝게 웃으면서 들어왔다.
옷도 아까와는 다른 검고 화려한 옷이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활동성 좋은 옷을 입었다.
그 옷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보여 그만 시선이 갔다.
엘프 남자들은 모두 활만 쏘느라 팔힘만 강하지 배 쪽 근육은 그리 좋지 않은데, 인간 특유의 6개로 갈라진 복근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저…. 리프라이더 님?"
"흐엣? 죄, 죄송해요!"
내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자 백작님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돼. 기껏 마음이 풀렸는데 다시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어.
정신 차리자 정신.
고향에 약혼자도 있는 여자가 왜 이럴까.
"저, 이,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방 창가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이어서 시녀가 들어오더니, 차 두 잔을 테이블에 두고 나갔다.
코끝을 찌르는 향기가 인상적이었다.
"저. 백작님. 이건 뭐에요?"
"아. 이건 향기가 진한 식물의 잎을 말려 우려낸 차입니다. 붉은빛을 띄기에 저희는 홍차라고 부릅니다."
"신기하네요."
인간 놈들은 정말 별걸 다 만든다.
한 모금 마셔보니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백작님도 차를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이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가지 색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눈빛에 마음이 꿰뚫리는 것 같았다.
"리프라이더 님. 오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제 불찰이었던 걸요. 백작님의 목숨을 걸고 한 싸움을 비하한 제 책임입니다."
백작님이 오늘 일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나도 그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내가 잘못한 일인데 먼저 사과까지 해 주다니. 의외로 마음씨는 따뜻한 인간인가?
"그래도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동맹의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빠지겠습니다."
"그, 그건 안돼요!"
드워프를 물리친 인간의 말이 있어야 아버지가 좋아할 텐데. 그건 안 될 일이다.
솔직히 그 힘없고 늙은 왕보다 백작님의 말이 더 중요하다.
백작님은 분명 우리 엘프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리고 보기에도 좋고,
"감사합니다. 리프라이더 님은 아량이 넓으시네요. 그만 반해버리겠어요."
백작님이 밝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철렁했다.
그러더니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바, 반해? 진짜야?
이렇게 먼 곳에서 청혼을 받을 줄은 몰랐다. 우으, 어쩌지…. 고향에 약혼자도 있는데에….
그렇지만 백작님 정도의 남자라면 결혼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 그래도 안 돼! 백작님은 인간이고 나는 엘프잖아!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그린 책을 몇 권 읽은 적은 있지만 그걸 실제로 하는 건 좀….
여, 여기서는 거절해야겠다.
"저, 저, 백작니임. 저는 고향에 약혼자가 있어서, 그, 결혼은 좀…."
"네?"
내가 그렇게 거절의 표시를 하자, 백작님이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내더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당황하다니, 그렇게 내가 좋은 걸까.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를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 차만 홀짝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요하고 으스스한 침묵만이 방 안을 감쌌다.
"리프라이더 님. 리프라이더 님은 나이가 몇인가요?"
"네?"
침묵을 먼저 깨 온건 백작님이었다.
갑자기 나이라니. 그게 왜 궁금하지?
서, 설마. 나이로 나랑 궁합을 보려는 건가?
인간들은 미신이 발달했다고 했으니까….
"이, 270살이요오…."
"270살이요?"
우으, 말하기 부끄러운 나이다.
사신으로 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그치?
백작님은 내 나이를 듣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수명 천 칠백 살. 이백칠십이면 열 몇 살이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 계산이라도 하는 걸까?
허, 헉! 설마 인간 방식의 궁합 계산?
"신기하네요! 저는 인간 나이로 스물일곱이거든요. 딱 10배 차이가 나네요."
역시 궁합을 계산하는 거였어!
딱 10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배?
천생연분 아니야? 우리?
"이건 운명이네요. 그러니까 이것저것 대화 더 나눠 봐요. 서로 친해지면 좋잖아요?"
백작님은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안돼. 소, 손을 잡다니. 이런 파렴치한….
하지만 몸에 피가 빨리 돌아서 그런지 열이 자꾸만 올라왔다.
아무래도 오늘.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