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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역사 영웅이 되었다-109화 (109/160)

〈 109화 〉 108화: 길고 긴 휴식

* * *

『잠은 최고의 휴식이다. 산 자에게든 죽은 자에게든.』

­엘프 격언

***

"으, 으으으읏…."

어둠 속에서 나를 휘감는 극도의 압박이 느껴지자 정신머리가 집에 돌아오더니 의식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누가 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는 건가…?

혹시 그 먼짓덩어리 녀석이 다시 돌아온 건가 의심이 들자 온몸에 저릿한 느낌이 들며 정신이 맑아졌다.

그 덕분에 눈을 팍 뜨자 내 눈앞에서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주인니임…. 괘, 괜찮아?"

"응."

로제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내 몸 위에서 나를 껴안아 주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원래 눈이 새빨갰는데도 더더욱 새빨개져 무서울 정도였다.

그녀의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뚝 뚝 떨어지자 나는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위로 올렸다.

"아, 앗…."

"왜? 주인님? 어디 아파?"

손끝이 아파지자 나는 잠시 손을 바라보았다.

으으, 역시 손톱이 없었고 그 자리에는 피딱지만이 남아 있었다.

치료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드레날린 때문에 안 아픈 거였다.

"주인님! 소, 손이…!"

"괜찮아. 손톱은 다시 나거든."

하지만 손톱이 생성되는 원리가 다른 조직과 판이하게 달라서 치료 마법으로 만들 수 없었다.

손톱에 특화된 마법을 만들… 수야 있겠지만, 손톱 모양으로 균일하게 자라도록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알아서 자라도록 기다릴 수밖에 없겠는데 이거.

뭐 시간이 해결해주는 거니 딱히 슬프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로제는 손톱이 모조리 뽑힌 내 손을 보고 조그마한 혀로 살며시 핥아 주었다.

침이 상처에 닿아 따끔거렸지만 그만큼 그녀의 사랑이 느껴져 괜찮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팔로 어떻게든 꼭 껴안아 줄 뿐이었다.

"웬즈데이! 괜찮아?"

"웬즈데이 씨이!"

내 목소리가 주위에 들리자 누군가 급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이렇게나 발걸음 진동이 생생히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 바닥인 것 같다.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봤을 때 아마 나무 바닥인 것 같은데….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므로 아마 부서진 기사단 본부가 아닐까 한다.

바위가 떨어지면서 이리저리 쪼개지는데 기사단 본부가 남아날 리가 있나.

누군가 바위에 맞아 다쳤는지 피비린내도 조금은 느껴졌다.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지?"

"으, 으으으으으…. 웬즈데이 씨가 무사해…."

프레이야는 입술을 깨물며 내가 무사한지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유스티아는 그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몸에 얼굴을 묻었다.

둘 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다.

"웬즈데이! 너 소, 손톱이…?"

"아. 잠깐 전투하다가 다쳤어."

"이렇게 손톱만? 진짜?"

"응."

그렇다고 `고문받는 도중에 뽑혔어`라고 말하기에는 걱정을 시킬 수도 있고 상황이 너무 모호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재미 삼아 뽑혔어` 같은데…. 이건 더더욱 걱정시킬 수 있으니 패스.

그냥 싸우다 뽑혔다는 게 적당할 것 같다.

뭐 너무 깨끗하게 뽑혀 있어서 믿지는 않겠지만.

"...치료 마법으로 복구할 수 있어?"

"아니. 아마 자연 치유를 기다려야 할 거야. 손톱은 다시 나니까."

"...이 바보. 멍청이. 바람둥이. 불륜남. 좆이 대가리를 지배한 새끼."

프레이야는 내 뺨을 머리카락으로 마구 치며 나를 비난했다.

으음…. 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폭행을 받아주면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메르세데스! 주변은 어때?"

"이, 인간들이 많이 죽어있고…. 어! 좀 큰 인간 무리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프레이야는 잠시 나를 때리던 거를 멈추고 메르세데스에게 물었다.

인간 무리가 몰려온다니, 아마 이쪽에 큰 소동이 난 걸 보고 사람을 파견한 거겠지.

프레이야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 손을 꼭 잡아주더니 일어섰다.

치마를 입어서 그런지 속이 보일 듯 말 듯 해서 좀 아쉬웠다.

"메르세데스. 저 사람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는 가서 웬즈데이나 좀 혼내 줘. 때려도 되"

"네?! 서방님 일어나셨어요?"

"내 치마 속까지 훔쳐볼 정도로 팔팔하니까 패도 된단다."

"서방님! 서방니임!"

칫, 들킨 건가. 눈썰미 하나는 좋다니까 정말.

메르세데스는 그 말을 듣고 전력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활을 매고 허리에 화살통을 묶은 모습이 참 특이했다.

그녀 나름의 전투 태세겠지?

나는 긴 귀를 쫑긋거리면서 훌쩍이는 메르세데스에게 살짝 웃어보았다.

"서방님. 괜찮아요?"

"응. 운이 좋게도 크게 안 다쳤어."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메르세데스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긴, 이런 왕궁 한복판에서 저런 돌덩이들이 생겨 주위를 쓸어버렸다는 게 말도 안 된다.

솔직히 나도 내 기억이 믿기지 않았다. 손톱이 뽑혀 있지 않았다면 바로 기억 조작을 의심했을 것 같다.

"아! 저, 저기 누군가 와요!"

주변을 살펴보던 메르세데스가 갑자기 삿대질하자 우리는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멀리서 봐도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검은색 시녀 복을 입고 그녀를 보좌하는 여성 둘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허벅지를 덮는 드레스를 입고 뛰다니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웬디! 무, 무슨 일이에요?!"

"웬즈데이 님. 괜찮으신가요?"

"...네, 아마?"

엘리자베스랑 다리아는 조금 전까지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던 듯 화려하게 치장한 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혹시 나 때문에 스케쥴이라도 망가진 건가. 내가 괜한 일을 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이, 이게 도대체…."

엘리자베스는 내 험한 몰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푸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참 험했다.

마치 광산에라도 들어간 듯 얼굴은 먼지로 수북이 덮였고, 머리는 피와 땀에 절여 헝클어져 있었다.

"웬즈데이 님. 일단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여기 있는 것보다 빨리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일어서실 수 있으십니까?"

다리아의 말에 나는 온몸을 점검해 보았다.

음, 딱히 아프다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다쳤던 다리는 완전히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고, 허리나 팔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손이 좀 문제였을 뿐이다.

"로제만 없으면 일어설 수 있겠는데요…. 로제, 잠시만 일어서 주겠니? 일어서야 할 것 같아."

"...으흑, 응."

로제는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손으로 슥 닦더니 내 몸 위에서 일어났다.

휴우, 겨우 폐에 차가운 숨이 들어차는 기분이다.

로제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혼났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겨우 일으켰다.

그러자 다리아가 다가와 나를 부축해주었다.

그걸 보고 메르세데스도 내 다른 쪽을 바로 부축해주었다.

"웬디, 몸 상태 괜찮아요? 의원에게로 갈까요?"

"아뇨. 그냥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별채로 먼저가 계세요. 저는 뒤처리를 하고 있을게요."

엘리자베스는 다리아에게 짧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는 프레이야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마 왕국 관리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뭐 사태가 워낙 난장판이니 수습해야 하는 것도 있고, 밝혀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굳이 내가 받은 피해는 제해도, 당장 왕국 기사단원의 대부분이 다치거나 죽은 것 같은데 어쩌지…?

생각보다 후폭풍이 거셀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아무렴 어때, 지금 그게 중요한가.

나는 그냥 빨리 침대로 가 쉬고 싶다.

"웬즈데이 씨! 가자! 업어줄까?"

"아니 괜찮아. 그냥 부축하면 충분해."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제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사실 지금 좀 어지러워서 업혔다가는 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뭐?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내 느릿느릿한 발걸음에 별채까지 가는 것도 한세월이었다.

***

도착해서 바로 침대에서 곯아떨어지니까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잘 때는 저녁 즈음이었는데 눈을 떠 보니 해가 중천을 넘어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뭐, 뭐야? 해가 오늘 서쪽에서 뜬 건가?

"으윽…."

몸이 이곳저곳이 뻐근하다며 아우성을 치니 스무 시간을 넘게 잔 게 사실인 것 같았다.

지끈지끈한 근육통이 온몸을 휘감아 내 잠기운을 싹 달아나게 해 주었다.

나는 결국 침대에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음, 지금 살펴보니 내가 항상 자던 특대형 침대가 놓인 방이 아니었다.

창문에 비친 풍경을 보니 이 층쯤 되는 높이의 방인 것 같았다.

그러면 여기는 내가 온전히 쓰는 곳이고, 그럼 다른 사람이 드나들 확률이 낮겠구나.

좀 더 자고 있어도 뭐라 안 하겠지. 그럼.

나는 솜털로 가득 채워진 폭신한 베개를 안으려고 손을 가져가 베개를 집었다.

무언가 강렬한 위화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손톱 하나만 없어도 이렇게 감각이 이상한가?

으으, 뭔가 손톱이 가리던 피부에 물건이 닿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빨리 손톱이 덮었으면, 손톱이 덮일 때까지 뭐라도 가려놓을까?

나는 결국 베개를 가져오지 못하고 그저 자세만 고치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갑자기 주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나무 문이 끼이익거리며 열렸다.

암살자인가 싶었지만, 발걸음이 여성스러워서 안심했다.

실눈을 뜨고 살펴보자 역시 다리아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다리아는 내가 깨어있지 않음에도 말을 걸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무언가를 물에 적시고 꽉 짜는 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내 예상은 맞았는지 다리아는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부터 상냥하게 닦아나갔다.

으으, 이렇게 몸을 누군가 닦아주니까 진짜 환자가 된 기분이다.

어쩌랴. 지금 몸 상태로는 목욕을 하기는커녕 일어서기조차 벅찬데.

얌전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다리아는 의외로 기분 좋게 내 얼굴을 열심히 닦아주었다.

귓바퀴와 귀 뒷부분도 정성스레 닦아주는 게 참 고마웠다.

얼굴은 어느 정도 닦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목부터 시작해서 상체를 닦아주었다.

내 옷을 벗기지 않고 최대한 수건과 손을 내 옷에 넣어 조심스럽게 닦았다.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겨우 참았다.

"...정말 실례하겠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내 바지를 내리더니 하체를 닦으려 했다.

하지만 다리아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일어난 직후라 그냥 선 건지 내 물건이 기상해버렸다.

자는 사람도 발기하는 경우가 있어 깬 걸 들키지는 않았지만 뭔가 부끄러웠다.

"우후훗, 웬즈데이 님. 자는 동안에도 힘이 넘치시네요."

다리아의 목소리가 뭔가 부끄러운 듯했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내 물건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수건의 차가운 감촉이 꽤 괜찮았지만 역시 다리아의 따뜻한 손 감촉이 너무도 좋았다.

그녀도 내 자지를 만지며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허벅지랑 종아리까지 씻겨주었다.

덕분에 온몸이 땀에 차지 않고 깨끗해져 한결 상쾌했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으니 내일까지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웬즈데이 님. 부디 편안히 쉬시길."

다리아가 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내 의식도 저승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다니 깊은 잠에 빠진 공주님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뭐 때가 되면 누군가가 키스로 깨워 줄 걸 기대하면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기왕이면 혀를 깊이깊이 넣어줬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틀간 못해서 좀 근질근질거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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