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09화: 갑작스러운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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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도끼날에서, 칼끝에서, 총부리에서, 그리고 미사일 발사버튼에서 나왔다.』
게임 로딩 중 뜨는 말
***
"이제 몸은 괜찮아요? 웬디?"
스무 시간에서 열 시간을 더 잔 내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의 첫 마디는 걱정이었다.
물론 괜찮지는 않았다.
다리는 내가 회복 마법을 잘못 쓴 것인지 살짝 불편했고, 온몸은 아직 근육통으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으며 특히 손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던 진통제가 너무도 그리운 지금이었다.
"괜찮습니다."
"설마요! 그렇게나 큰일이 있었는데 좀 더 쉬어야죠!"
엘리자베스는 겨우 허리를 일으킨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아니. 더 자고 싶어도 목이 너무 타서 못 자겠는데.
여기서 더 자다간 수면 중 영양실조로 죽을 것 같다.
"정말 괜찮습니다. 지금 너무 목이 말라서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아! 그, 그렇죠! 그럼 식당으로 갈까요? 지금 딱 점심시간인데?"
"네."
나는 식당으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누워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잘 안 움직였고 허리 주변 근육이 너무 아파서 일어나는 것도 고역이었다.
내가 너무 힘들게 일어서자 엘리자베스가 부축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우우. 이, 이렇게나 아프다니…. 음식을 가져올까요?"
"아뇨. 저도 몸을 좀 움직여야 하니까요."
엘리자베스의 온몸을 다한 부축에 나는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포근한 살이 닿으니까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일부러 엘리자베스에게 더욱 밀착하면서 걸었다.
"우, 우으…. 웬디. 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괜찮잖아요. 요즘 제가 아파서 밤에 하지도 못했는데."
"그, 그렇지마안… 누가 보기라도 하면…."
"보라고 하죠. 딱히 책잡힐 관계도 아니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반응이 꽤 괜찮자 나는 더더욱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얼굴을 가슴에 반쯤 묻고 손을 엉덩이까지 내려 꽉 껴안으니 엘리자베스의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넘어뜨리고 싶지만 아무리 복도에서 한 경험이 있다고 해도 지금 몸 상태로는 무리다.
기분 좋기는커녕 근육통 때문에 고통만 더 생길 것이다.
사정이란 행위가 은근히 근육을 많이 쓰거든.
지금은 이 말캉한 감촉으로 만족해야겠다.
"...으, 으읏. 웬디, 그렇게나 만지고 싶어요?"
"네. 엄청나게요."
"식당 가기 직전까지만 만져주세요. 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곤란해요…."
다른 아내들에게 걸리면 피곤하다는 건가.
하긴, 다친 나와 이런 짓을 하는 걸 들키면 괜한 소리만 듣겠지.
왕녀님의 귀여운 부탁이니 어울려주도록 하자.
"그러면 조금 천천히 걷죠."
"...네. 알겠어요."
식당까지 걷는데 20분 정도 걸렸다.
평소에 두 배 정도 걸렸네.
중간에 시녀들이 이쪽을 흘겨보던데, 기분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
"웬즈데이 씨! 왔어?"
나랑 엘리자베스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유스티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큼지막한 가슴이 내 몸에 부딪히면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압도적인 탄력에 나는 기꺼이 유스타이의 포옹을 받아 준 후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괘,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완전히 안 아프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이 쉬었어. 괜찮아."
"다, 다행이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스티아는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고 나를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는지 의자가 다른 의자들보다 푹신했다.
"웬즈데이. 왔구나."
"응, 너무 자기만 하면 굶어 죽을까 봐 왔지."
"잘했어. 회복하는 데는 영양분도 중요하니까 많이 먹어."
프레이야도 내가 온 게 기쁜지 평소의 날카로운 목소리와는 다른 성숙한 목소리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손에 종이 뭉치가 여럿 들려 있는 걸 보아 나 없을 때 여러 일을 수행해 준 것 같다.
이번 일은 원인을 명확히 알기 쉽지 않아 어려울 텐데 대단한 것 같다.
이럴 때는 꽤 믿음직하구나 싶네.
때리지만 않으면 참 좋을 텐데.
"주인니이이이이임!"
"서방님! 오셨나요?"
로제랑 메르세데스도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내가 아플까 봐 강하게 달려들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멀리서 인사하기도 싫어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참 귀여웠다.
이쪽에서 먼저 와락 껴안아 주자 그때 마구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웬즈데이 님. 목이 마르실까 봐 여기 냉수를 준비했습니다. 드시죠."
그때 다리아가 찬물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른 시간이나 꿈나라로 가느라 마침 목이 갈라지는데 잘 되었다.
나는 황급히 컵을 받아들고 안의 내용물을 다 마셔버렸다.
거의 내 팔뚝만 한 컵인데 부족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인님! 물 흘렸네?"
내가 워낙 물을 빨리 마시느라 입 주위로 물을 좀 흘리자 로제가 갑자기 그걸 핥아먹기 시작했다.
으, 응? 뭐 하는 거야? 이런 식당에서?
아무리 쌓였어도 그렇지….
그걸 본 메르세데스도 반대쪽 입술을 핥아 물을 먹었다.
로, 로제! 너 때문에 메르세데스가 이상한 걸 배우잖아!
으읏, 두 명의 여자가 입술을 핥아주는 건 좋은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는 건 많이 부끄럽다.
우리의 그 노골적인 행동에 누군가 크게 목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흠흠, 웬즈데이. 성욕이 들끓는 걸 여기서 표출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프레이야는 최대한 정중하게 머리카락으로 내 머리를 톡톡 치며 행위를 멈추게 했다.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게 타일러줘서 고마웠다.
지금 몸 상태로 프레이야의 폭행을 받는다면 버티기 어려울 텐데, 그녀도 나를 위하는 마음은 크구나.
"로제, 메르세데스. 식사 나오니 이제 그만하렴."
"네에."
"아, 알겠습니다아."
로제랑 메르세데스는 내 몸에서 떨어져 각자의 자리에 돌아갔다.
그때 메이드들이 밥을 속속 가져왔다.
구운 감자와 옥수수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그저 그런 식단이었지만, 배가 너무 고픈 지금은 너무 맛있어 보였다.
나는 받자마자 포크로 큰 감자 덩이를 푹 찍은 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겠어요."
다리아가 그런 나를 보고 걱정해주었지만, 너무 배고파서 어느새 감자 한 알을 뚝딱 먹어 치웠다.
으으, 이제 살 것 같다.
이제 나머지 밥은 그녀 말대로 천천히 먹어주자.
"...웬즈데이. 이제 좀 괜찮지?"
"응. 왜?"
"아니, 그날 말이야.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그렇게 된 건가 싶어서."
프레이야는 내가 밥을 어느 정도 먹자 말을 걸어왔다.
아, 아직 그녀들은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구나.
...근데 이거 어쩐다. 나도 잘 모르는데.
특히 그 사이코패스가 들어있는 먼지덩어리는 더더욱 모른다.
"나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혹시 내가 쓰러져 있던 주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
"그, 그건 왕국 관리들이 보고서를 만들어 둔 게 있어요, 그걸 읽어드릴게요."
엘리자베스는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펼치더니 읽기 시작했다.
거기 안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확인된 바 없는 돌 조각 때문에 발생한 손실은 다음과 같다. 기사단 본부 파괴, 기사단원 다수의 사망과 부상…."
"기사단원들은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었나요?"
"그 창단 기념행사에 참석한 500명 상당의 기사단원 중 사망한 기사단원이 400명 이상이라네요."
"특히 기사단장을 포함한 고위 기사단원들은 전부 사망했어."
뭐? 그, 그게 사실이야?
돌이 엄청나게 크긴 했지만 그게 부셔저서 그리 큰 피해를 줄 줄이야.
이거 어쩐담, 왕국의 정예군이자 중앙 권력의 핵심, 왕도의 방위군인 기사단이 반파를 넘어 소멸당했다.
이거 자칫하면 왕국의 존망이 달린 문제가 될 수 있다.
왕족을 지키는 병력이 이렇게야 적어서야, 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 영향력을 키우려는 건 애교고, 반란 같은 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 땅에서 케이나인 가문이 가지는 영향력을 뿌리가 깊지만….
그래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시단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거죠?"
"정확히는 저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요. 말하자면…."
어디까지 이야기 해야 할까.
일단 최대한 알기 쉽게 말하자.
여신이니 먼지덩어리니 그런 이해가 잘 안 될 말은 하지 않는게 좋겠지.
"그 채벌리 자작이랑 `검무`란 걸 할 때였어요."
"검무? 춤 말하는 거야?"
"케이나인 왕국에서의 검무는 일대일 스포츠야. 펜싱이라 생각하면 편해."
프레이야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주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우리의 검무를 지켜보던 기사단원들이 다 쓰러지더라고요."
"뭐? 왜, 왜?"
"그 자리에 남아있던 술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마 뭔가 약 같은 걸 탔을 거야."
"그걸로 기사단원들을 죽인 걸까요?"
"모르겠어요. 수면제일 수도 있고 독극물일 수도 있는데…. 이상한 반응 없이 다들 조용히 쓰러진 걸 보면 수면제가 아닐까 해요."
마이클 입장에서 기사단원 모두를 죽이는 건 원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수면제가 더 타당한 추측이겠지.
"그 이후에 제가 어떻게든 채벌리 자작을 제압했으나, 그 반동으로 인해 저도 쓰러진 것 같아요."
"...그럼 그 본부 주위에 널려있던 돌들은 뭐야?"
프레이야가 날카롭게 질문을 하자 나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했다.
"너 그거 기억해? 우리 막 싸울 때 번개 떨어진 거?"
"으, 응?"
"아! 그 어두운 번개 말이지! 그거 맞고 그 난쟁이 놈이 경단으로 변했잖아!"
유스티아는 기억하는지 내 말에 호응해 주었다.
나머지는 아직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채벌리 위로 떨어졌어. 그래서 그놈이 막 돌을 생성하고 소환한 것 같아."
사실과는 다르지만, 지금 와서 여신이니 먼지덩어리니 설명하기에는 좀 그랬다.
일단 나도 그 둘에 대해 잘 모른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그 여신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하늘의 여신을 숭상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여신이 뭐나 왈가왈부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으니까.
이해하기 쉽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도록 하자.
"...그런가."
"응.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일단 알았어."
프레이야는 책을 가져와 내가 말한 내용을 깃펜으로 적기 시작했다.
깃털이 적응이 안되었는지 지 글씨가 삐뚤빼뚤한 게 귀여웠다.
"네가 쉬는 동안 최대한 일을 수습해 볼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큰 일이라서 말이죠. 수습은커녕 파악하는 것조차 힘드네요."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어떤 의도로 웬즈데이 씨랑 기사단을 해치려 했는지 의문투성이네."
모두 내가 왜 다쳤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게, 왜 이렇게 됐지?
그 먼지덩어리가 여기 왜 온 거야?
정말 머릿속에 풀리지 않을 의문만 가득했다.
더 생각해봤자 잡념만 생길 테니 그만두자.
그 여신이 여기 있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어느새 어딘가로 사라졌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듣고 가지.
뭐, 이 세계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시니까 이해는 하지만.
"전하! 전하!"
우리가 그렇게 옥수수를 깨작깨작 씹으며 뒷수습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메이드가 나타나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그 메이드에 손에는 무언가 불길해 보이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네?"
"전하, 폐하께서 급하게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아버님께서요…?"
장인어른이?
왜 이렇게 사위네 가정에 간섭을 많이 하실까 이분은….
설마 내가 다쳤다고 위로문이라도 보낸 걸까?
근데 그건 급하게 보낼 필요가 없잖아.
으음, 그럼 사적인 내용이 아닌가?
엘리자베스는 메이드에게서 서신을 받아 펼치더니 쭉 읽어 내려갔다.
그러더니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군 요청이에요."
"...네?"
원군? 이 시국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없는데 뭔 소리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 참 잘못 잡았다.
...잠깐, 근데 원군이라니.
지금 전투를 하고 있는 지방 귀족이 있던가?
내가 알기론 없을 텐데.
그럼 어디지?
"전하, 요청한 곳이 어딥니까?"
"엘프 부족 연합이요."
"네?"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엘프라는 소리가 나오자 모두가 놀랐다.
그중에서도 메르세데스의 눈이 큼지막해지더니 귀가 하늘로 솟구칠 만큼 쫑긋거렸다.
"엘프가, 드워프에게 당해 위기래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원군을 보내 달래요."
그렇게 세상은 나를 억지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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