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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역사 영웅이 되었다-139화 (139/160)

〈 139화 〉 138화: 처녀 기사단의 남하

* * *

『엘프가 믿는 신은 처녀신밖에 없다. 비 처녀는 신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프들은 순수했던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세계의 진실에 관한 탐구, 엘프편

***

"다들 전선을 지켜! 우리의 고향을 지켜내자!"

"응!"

그 시각 북쪽 정글, 수많은 엘프 여자아이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드워프 들과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나이가 많아 연륜이 풍겨지는 분위가가 당연시되는 엘프임에도 풋풋하고 젊은 향기를 내뿜으며 전장을 누비는 게 한창때의 장수를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들은 어리고 어설펐다. 아직 성인식은커녕 처녀조차 때지 못한, 『처녀 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처녀 기사단』, 그건 처녀를 신성시하는 엘프의 광기와 같은 신념이 모여 탄생한 조직이었다. 모든 엘프 소녀들은 여기 가입해서 그 처녀가 살아 있을 때까지 필히 복무해야 했다. 족장의 딸이었던 메르세데스처럼 약혼 때문에 처녀 상실이 예정된 경우에도 처녀 기사단을 졸업했다. 이 조직은 그야말로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들만이 모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녀 기사단이란 조직을 따로 만든 건 다른 이유도 있다. 가뜩이나 인구가 적어 곤란한 엘프들은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처녀인 엘프들을 모아 잘 교육시키고자 했다. 다른 엘프에게도 흔히 가르치는 활, 화살, 무기 제조법, 농사법, 간단한 천문학 뿐 아니라. 본격적인 지리학, 식물학, 천문학, 수학, 자연학 등 엘프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교육받은 엘프 여성들은 자신에게 은혜를 배풀었던 엘프 종족을 위해서, 그리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 더 용맹하게 싸우고 더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이 효과로 인해 처녀 기사단은 점점 엘프 여자아이들의 엘리트 학원이 되어갔다. 훌륭한 엘프 소녀라면 여기를 졸업해야 비로소 제 몫을 한다고 믿는 사회 풍조도 만연했다.

그런 엘프들이 처녀 기사단을 최전선으로 내몬건 상황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다. 가장 순결해야 할, 가장 순수해야 할 아이들을 불결한 드워프들에게 내던질 정도로 엘프의 내상은 심각했다. 싸울 수 있는 전사들 중 70%가 부상을 입었다. 그중 30% 정도는 더 이상 싸우기 힘들 정도의 중상이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전사들도 화살은커녕 단검조차 보급받기 힘들어 화살을 깎던 조각칼과 도축용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 식량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곡창지대를 잃고 녹색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정글이 울창한 광대 숲으로 내몰린 엘프들은 식량을 거의 구할 수 없었다. 그나마 광대 숲에서 살았던 원로들의 지혜를 빌려 몇몇 벌레와 풀때기를 제한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저항은 드워프의 작은 대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화살로도 상대가 안 되었는데 단검, 아니 그 이하의 무언가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전투할 때마자 궤멸적인 교환비를 내버렸고, 그나마 있던 무기와 식량들도 노획되어 난쟁이들의 품에 들어갔다. 부족원들의 사기가 푹푹 떨어지고 방어선으로 쓸 지형지물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결국 광대 숲도 조금씩이지만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제 빠져! 적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온다!"

"후퇴! 후퇴!"

"아까 봐뒀던 샛길로 가는 거다!"

그런데 처녀 기사단은 뜻밖에 잘 싸워 주었다. 그녀들이 평생 살아왔던 광대 숲의 지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드워프들에게 게릴라전을 걸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그들의 주력 무기는 힘을 쓸 수 없는 데다 교육용으로 남겨 놓은 엘프의 작은 화살은 이런 정글 지형에서 큰 위력을 발발휘했다. 길이도 짧고 화살촉도 날카롭지도 않고 깃털도 몇 가닥 없었으나 엘리트 엘프 소녀들이 근거리에서 쏘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오히려 장전시간이 짧아 효과적인 부분도 있었다.

"처녀 기사단 1분대, 부상자 둘에 사상자 없음!"

"2분대, 부상자 없고 사상자 없음!"

"3분대, 중상자 하나에 부상자 둘, 사상자 없음!"

"4분대, 중상자 넷에 부상자 일곱, 사상자 없음!"

근처 샛길로 도망쳐 어느 정도 난쟁이들을 따돌린 처녀 기사단은, 작은 공터에 모여 병력을 갈무리했다. 그녀들은 최대한의 기지와 실력을 발휘해서 겨우겨우 사상자 0으로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이 분대도 원래 있던 게 아니었다.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들이 즉석에서 만든 지휘체계였다. 하지만 그 체계는 상당히 위력적이라 전투 곳곳에서 요긴 하게 쓰였다.

"7분대는 분대장 어디 갔어?"

"그, 그게. 지금 상처가 너무 심해서…."

"뭐?"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실력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7번째 분대장의 상태가 누가 봐도 심각했던 것이었다. 근접해서 다리에 총을 맞았는지 허벅지에 큰 상처가 패여 있었다.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걸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치료는?"

"제, 제가 응급처치를 해 놓았는데도…. 이 상태입니다…."

"아, 안 돼! 혹시 여기 옷가지 남는 사람 있어? 일단 피부터 멈추게 하자!"

"응!"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동료의 죽음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아직 처녀조차 못 땐 생명은 그 운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피는 겨우 멎었지만 이내 그 상처가 곪기 시작했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승산이 없잖아. 난쟁이들은 끝없이 밀려오는데, 우리는 다치기만 할 뿐이야."

"...게다가 식량도 바닥이네. 족장님께서 말린 과일을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어."

"말린 과일이면 다행이게, 벌레나 안 왔으면 좋겠네."

매일매일 처녀 기사단은 불평불만을 입으로만 표출하며 열심히 일했다. 근데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고, 보이는 건 오직 그녀들의 비참한 죽음 뿐이었다. 지금 앞에 놓여 저 가여운 분대장처럼 말이다.

"안 되겠어. 뭔가 새로운 작전이 필요해."

"...혹시 생각이 있어, 아리엘?"

"있긴 한데, 할 수 있겠어?"

"일단 들어는 보는데, 웬만하면 할걸? 다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동료가 그렇게 말하자 아리엘이라는 엘프는 벌떡 일어나 자그마한 공터 안에 몸을 뉘인 엘프 동지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내게 누군지 알지? 나는 지금 처녀 기사단에서 1분대의 장을 맡은 아리엘이야. 물론 급조한 자리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든 체계 속에서는 내가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해."

"맞아, 그리고 아리엘이 가장 용감하게 싸웠잖아."

아리엘이 목소리 크게 말하자 몇몇 동조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리엘은 연설에 익숙지 않아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발언했다. 아직 어린 엘프 특유의 미성숙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용맹하게 싸웠지, 하지만 저 지독한 난쟁이들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여. 우리가 안 보는데서 번식이라도 하는지 더 늘어나고 있어."

"...그렇지."

그 말이 들리자 공터 안에 있는 엘프 모두가 절망한 듯 고개를 떨궜다. 드워프 들의 미친 듯한 인해전술을 처녀막이 떨릴 정도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좋은 작전이 있어."

"뭔데?"

"여기서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남쪽?"

남쪽이라는 말이 나오자 엘프들 반절 이상이 술렁거렸다. 왜냐하면 처녀 기사단이 작전을 수행하는 곳은 이미 광대 숲에서 충분히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대 숲 남쪽에서 북진하는 드워프들을 막아 내는 게 그녀들의 숙명이었는데, 더 내려가다가는 드워프를 막기는커녕 지나쳐 버릴게 뻔했다.

"작전을 포기하자는 거야? 미쳤어?"

"포기가 아니야! 잠시 보급을 받고 오자는 거지!"

"보급?"

"지금 우리는 본국에서 지원을 받기 힘들어, 족장님들도 어떻게든 자원을 쥐어짜네고 계시겠지만 고향에 있는 환자와 임산부, 어린이를 먹이기에도 부족할 거야."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 아직 남아 있는 우리 동지들의 흔적을 파해치는 거야! 그리고 난쟁이들을 급습해 동지들을 해방시키는 거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즉, 아리엘의 말은 드워프들이 점령은 했지만 아직 관리하지 못한 영토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자는 말이었다. 확실히 이미 먹을게 싹 다 털린 황폐한 정글지대보다 남쪽의 온화한 영토에 식량이 많아 보였다. 실제로 엘프들은 식량 생산의 대부분을 지혜의 이빨 반도에서 하고 있었기에 딱히 틀린 작전은 아니었다.

"아리엘. 그 작전은 나름 훌륭하네."

"그렇지? 역시 두 번째 분대장 씩이나 되는지니에라면 알아줄 줄 알았어!"

"...근데 가장 큰 걱정거리가 있어."

지니에라고 불린 엘프 소녀는 아리엘과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걱정거리를 토해냈다. 그 사실적이고 비관적인 말투에 기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식는 느낌이었다.

"족장님이 우리가 작전을 수행할 때까지 버티실까?"

"...."

"지금 우리 전사들은 끝도 없이 밀리고 있어. 우리가 옆에서 시선을 끌지 않으면 당장 종족이 멸종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자고?"

지니에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처녀 기사단이 시선을 끌지 못하면 드워프들이 화력을 최전선에 집중할 것이고, 그러면 엘프의 조속한 패배가 확정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전부 죽는다고!"

"남쪽으로 내려가도, 안 내려가도 죽는 건 매한 가지네."

아리엘은 어떻게든 희망을 발견하려고 발버둥 치는 표정으로 지니에에가 윽박질렀다. 지니에는 그런 아리엘의 비명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좋아. 그럼 투표하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의사를 따랐으니까."

"...얘들아, 손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부상자를 제회하고 다들 내 말 들어 줘. 이건 첫 번째 분대장으로서의 명령이야."

아리엘이 그렇게 말하자 모든 처녀 기사단원들이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으면 손을 들고, 아니면 손을 내려. 기회는 단 한번뿐.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투표야."

"예정된 죽음이냐 신선한 죽음이냐, 고르기 힘들겠는걸."

"그래도 사형수가 되느냐 시한부가 되느냐지. 희망의 결이 달라."

"그런가."

곧바로 처녀 기사단의 투표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모든 엘프의 거의 같은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오늘 여기서 자고 남쪽으로 이동하자. 이건 모두 다 첫 번째 분대장인 내 책임이야. 만약 죽기 전에 짜증이 나면 날 탓해 줘."

"그걸 막지 못한두 번째 분대장인 나를 탓해도 좋아."

그렇게 젊고 풋풋한 엘프 소녀들은, 희망을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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