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막간 1. 떡 받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자꾸 넘긴다. (2)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눈이 닿은 곳엔 촛대에 불이 일렁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등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게 젖은 식은땀이 느껴졌다.
‘축축해. 옷 갈아입고 싶다.’
불편함에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손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란이 손을 잡고 침대에 엎드려있었다.
‘얘는 자기 방 가서 안 자고 왜 여기서 자고 있대.’
조심스럽게 손을 떼놓고 일어나려고했더니, 온몸이 망치로 두들기는 것처럼 아팠다.
“아윽……!”
눈물이 팽 돌 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어디가 더 아프다고 할 것도 없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격통에 눈을 꽉 감고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조금 전에 낸 소리 때문에 시란이 깬 모양이었다.
“……공주님?”
“아, 깼어? 미안하게 됐, 윽.”
늦은 시간이다. 별로 소란을 내고 싶지 않았다.
아픈 거야, 당연히 아프겠지. 감옥에서 며칠을 썩었는데.
그런데 시란이 벌떡 일어나 나를 껴안았다.
“깨어나셨군요, 공주님!”
“아, 아, 으에엑!”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기브! 기브업!
시란이 세게 끌어안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 움직이는 것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당연히 지금은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로 아팠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
내가 급하게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자 시란이 나를 놓아줬다.
다시 정신이사라지려는 나를 보더니 시란이 외마디 짧은소리를 냈다.
“앗.”
게거품을 물기 직전의 나와, 그걸 바라보는 시란.
방안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죄송합니다.”
곧 시란이 정신을 차렸는지, 급하게 방을 나서려 했다.
아마 치료사라도 부르려는 거겠지.
의식이 날아가려는 걸 간신히 부여잡고, 동시에 시란의 손을 잡았다.
시란도 내가 손을 잡으니차마 떼어내지 못하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편찮지 않으십니까? 치료사에게 보이시는 편이.”
“아프기야 당연히 아픈데, 윽.”
순간적으로 격통이 찾아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히 억울해서 시란을 한 번째려봤더니, 시란의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
오히려 내가 때리지 않았나 의심이될 정도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놀리기도 미안할 정도로 걱정이 묻어 나와서, 오히려 내가 괜찮다는듯 웃어 보였다.
시란은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젓고 침대에 올라왔다.
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이불을 들쳐서 내 몸을 보더니,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은 많이 내려갔네요. 붓기는 아직 남아있는 걸 보니, 무리하시면 안 될 것 같고…….”
“응? 혹시 시란, 의학에도 능통했었나?”
“그렇진 않습니다만, 제가 봐도 알 만큼 공주님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습니다.”
“그렇구나. 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깨우지 말고.”
그렇게나 안 좋았나? 성녀도 있겠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사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다른 사람을 깨우기도 좀 그랬다.
왔더니 기절해버리면 괜히 미안하잖아.
시란은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나를 흘겨봤다.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면얌전히 자는 게 맞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자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시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딱히 무리하는 것도 아닌데.”
“후우.그럼 혹시 배고프진 않으십니까?”
“……조금. 근데 몸이 축축해서 짜증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시란이 내 이마를 검지로 톡 밀었다.
낑낑거리며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고,
시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드실 걸 좀가져오겠습니다. 만일 제가 올때까지 이상한 짓을 하시면 공주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할 겁니다.”
“그게 뭔데?”
“루크레치아 공주마마께서 깨어나셨다고 소란을 일으켜볼까요?”
“조용하게,얌전히 기다릴게.”
하여간에 계집애, 눈치만 빨라 가지고.
침대에 누워서 억지로 잠기운을 몰아내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내가 쓰러지고 난 뒤에 며칠이 지난 걸까.
온몸이 아픈 걸 보니 그렇게 오래 지나진 않은 것 같은데.
그 이후엔 대체 어떻게 됐을까.
폐하께서 무사히 왕도에 돌아오셨을까?
아니지, 그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알렌은? 폐하는? 아즈웰은? 한스는? 페니는?
……세일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꿈에서 본 풍경, 그곳엔 사이드리스뿐만이 아니라.
“공주님? 주무시나요?”
“아, 아니. 아직 안 자.”
“차라리 주무시길 바랐습니다만.”
시란이 투덜거리면서도 접시를 내가 있는 곳에 솜씨 좋게 내려놨다.
내가 억지로 낑낑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더니,
마법을 사용해서 접시를 허공에 띄우고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겨우 등을 대고 앉았더니 시야에 감자수프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있었다.
따뜻하게라, 음, 다들 일어난 모양이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나. 시란이 갑자기 방에서 나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시란이 감자수프를 한 수저 떠서 내 입에 올렸다.
“헤?”
“왜 그러십니까?”
“아, 아, 아니. 나, 나 혼자서도 먹을 수 있는데!”
이 계집애가 대체 무슨 낯부끄러운 짓을!
그러자 시란이 찡그리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공주님.외람된 말씀이지만, 방금 몸도 제대로 못 일으키던 공주님께서 혼자 수저를 드실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그래도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내가 억지를 부리자 시란이 말없이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시란이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시겠다면.”
“않으시겠다면?”
“마법으로 묶어놓고 드시게 한 후 공주님께 바깥 상황도 말씀드리지 않고 재우겠습니다.”
“켁.”
이, 이, 이 맹랑한 계집애!
그래도 내가 주인인데! 주인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상관인데!
그러나 시란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진짜로 마법을 캐스팅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
“후후.”
그러니 결국 기세에서 진 것은 나였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한 입 받아먹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시란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웃은 걸 보니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묘한 식사가끝나고 나서, 딱 기분 좋게 식은 우유를 홀짝이면서 시란에게 물었다.
물론 식사가 끝나고 시란이 몸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어서,
여전히 고개는 들지 못한 채였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어?”
“사흘째입니다. 정확히는 오늘 동이 트면 사흘째가 됩니다.”
“생각보다 오래지나진않았네. 시란은 계속 여기에 있었고?”
“페니와 한스, 그리고 제가 교대하면서 공주님 옆을 지켰습니다.”
“으응, 다들 수고가 많았네.”
“누가 굉장히 걱정을 끼쳐서요.”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까. 그리고 잘 풀렸잖아.”
시란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잘 풀리기는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꿎은 우유만 입에서 보글거리다가, 시란에게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나 쓰러지고 난 다음에 얘기 좀해줄래?”
“쓰러지시고 난 후의 얘기라면.”
“알렌이라던가, 폐하라던가, 뭐 하여간에 그런.”
그러자 시란은 말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떤 게 제일 궁금하십니까.”
“그럼 알렌부터.”
알렌이라면 당연히 나를지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알렌이 팔이 한쪽 잘려 나간 것도 나는 몰랐기에 그땐 깜짝 놀랐었다.
다만 물어볼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알렌을 믿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랬던 거지.
하여간에 알렌의 소식이 제일 궁금했다.
“알렌 경은 앓아누웠습니다. 공주님처럼.”
“으응? 앓아누워?”
“팔 하나가 잘리고 나서, 무리했다는 모양이더군요. 공주님처럼.”
필요 없는 공주님처럼은 왜 자꾸 붙이냐.
팔은, 아마도 그때 나를 보내면서 잘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알렌에게도 굉장히 미안해진다.
결국나는 그때 스트레챠 대공에게 가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폐하께선 무사히 왕궁에입궐하셨습니다.”
시란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자책으로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란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당파 대부분과 스트레챠 공작이 공로를 인정받아 큰 보상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로라면, 시란은?”
“저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공작 위를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시란도 그럼 이제 내 노예가 아닌가?
씁쓸한 감정이 입술을 만지고 지나간다.
역시 강제로 맺은 관계는 금방 파탄 나는 법이지.
음, 마나의 계약을 잇긴 했지만, 그것도 공작이 된다면 아마 풀어줘야겠지?
원작하곤 너무 많이 차이가 나버렸는걸.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시란이 왜 방금 내가 부탁하지않았는데도 설명을 이어나갔는지 아니까.
상냥한 시란. 그런 시란이 행복해진다면.
“저는 거절했지만요.”
“뭐? 거절? 왜!”
이 계집애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황한 나머지 우유가 담긴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겨우 손잡이를 부여잡고 시란을 바라보자시란이 눈썹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아직 공주님과는 약속한 게 남아있으니까요.”
“하, 하지만 그건…….”
그러자 시란이 내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건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는 거잖아.
계약의 주체인 나는 풀 수 있고,
풀지 않더라도 시란이 간접적으로 나를 지키겠다고 하면 계약에 위반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시란은 고개를 저었다.
부드러운 미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그러나 나는 네 생각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을담아, 입을떼려 하자 시란이 먼저 내게 말했다.
“저는 공주님과, 아니 루시와 함께하고 싶어요.”
“시란, 에이브릴 실레바란. 그래도 되겠어?”
“시란으로 좋습니다. ……루크레치아 공주님.”
그렇구나. 루시가 아닌 루크레치아 공주님으로.
북부대공 에이브릴 실레바란이 아닌, 루크레치아의 시란으로.
나도 모르게 입가에 힘이 풀린다.
생각도, 감정도 풀어져서. 바보같이.
눈이 마주친 시란은 요망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것 같은 간질간질한 느낌.
그래,
그럼 이 말은,
지금밖에 물어볼 수 없겠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일런은 어떻게 됐어?”
“……세일런은 왕궁을 떠난 것 같습니다.”
하나.
“혹시 세일런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시란이야?”
“아닙니다. 저도 들은 소식입니다.”
둘.
“……세일런을 죽인 건 시란이야?”
“……예.”
응, 이제야 답해주는구나.
나는 씁쓸하게 얼마 남지 않은 우유 잔을 어루만졌다.
사실은 짐작은 했어.
꿈속에서 사이드리스 옆에, 세일런이 있었거든.
그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더라.
“공주님.”
“응.”
“그것 또한 제가 선택한 겁니다.”
시란은 다급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 넘기지 않으려는, 그런 표정.
곤란하네. 잠결에 내가 잠꼬대라도 한 걸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천천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이게 맞겠다.
“걱정하지마. 후회하지 않으니까.”
시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시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시란이 세일런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숨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슨생각을 하는지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 나 대신 죽여줘서.”
“……그렇습니까.”
“응, 그래.”
나는 세일런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것을 시란에게 오롯이 넘기지도, 오롯이 내 몫으로 두지도 않았다.
시란은 그런 나를 보며 씁쓸한표정을 지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겠지. 넌 그런 성격이니까.
그래서 함께 나누고자 했다.
사실 세일런 따위에겐 이것도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둘 다 그런 귀찮은 성격이니까.
시란은 나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나를 위로하려는 손길. 나 역시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천천히 온기를, 마음을 나누었다.
응, 조금 안심되는걸.
그렇게 시란의 온기에 기대어, 잠이 들려고하던 때였다.
시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조금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공주님. 정말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뭔데.”
이미 주고받은 말이, 감정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다.
시란도 그걸알고 있어서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일 텐데.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을 고려해도 당장 전해야 할 만큼 중요한 소식이었다.
“폐하께서 공주님께서 쾌차하시는 대로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왕위? 누구한테? 나한테? 대체 왜?
“폐하께서 공주님께서 쾌차하시는 대로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못 들은 게 아니야!”
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난 지 이해하지 못한 거뿐이야!
단숨에 시란의 품에서 벗어나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시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