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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생존 전략 10.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열한 번이라도 찍어야 한다. (4) (71/139)



〈 71화 〉생존 전략 10.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열한 번이라도 찍어야 한다. (4)

나를 부른 것은 카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파리한 안색에 푸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 열흘간 카인과 생각보다 빨리 친해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래 목표는 카인의 어머니를 만나서 설득하는 일이었으니, 초대를 거절할 이유 역시 없었다.

“신세를 져도 될까요?”

“신세랄 게  있겠어요.”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어린아이 셋이 보였다.
카인보다도 어려 보였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안녕?”


먼저 인사를 해오는 아이는 개중에 가장 나이를 먹은 여자아이였다.
똑 부러진, 아니  부러지게 노력하려는 모습이 눈에 띄는 아이였다.
카인이 가장의 역할을 하니, 제가 대신 장녀의 역할을 하려는 걸까.
그래 봐야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라.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카인이 나를 쉽사리 따라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사정 때문일지도.
물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고, 또한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세린. 잠시 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오려무나.”

“네, 어머니.”



저 나이에 ‘어머니’라니. 내가 언제부터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렀더라?
나는 시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시란이 동전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잠깐 나가서 놀기엔 충분한 금액이었다.


“받을 수 없어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라서? 괜찮아. 내가 카인에게 잘 보이려고 뇌물을 주는 거거든.”

“오빠한테 왜요?”

“너희 오빠는 내가 점찍어놔서?”

“오, 오, 오, 오빠를요?”

뭐야? 얘 왜 이래?
아하, 슬그머니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오빠를 굉장히 좋아하나 봐? 골려줄 맛이 있는 아이네.
방금까지 보이던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나이대 같았다.

나는 시란에게 돈을받아 그대로 세린의 손에 쥐여주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어머니  듣고 잘 놀다 와. 알았지?”

“어? 네?”

“세린, 다녀오렴.”

“어머니!”

“얘들아 나가서 좀 놀다 오렴.”

“네!”



카인의 어머니도 세린과 아이들을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밖에서 조금 소란이 있었지만, 차츰 소리가 잦아들었다.
카인의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짓궂은 면이 있으시네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게 지론이라.”

“착한 아이랍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물을 들고 왔다.
그리곤 시란의 앞에도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옆에 계신 분도 앉으세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앉아, 시란.”

“예.”

내가 말하자 시란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시란의 주특기는 마법. 일어서있냐, 앉아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내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린 것이겠지.
그럴 필욘 없었는데.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시란은 내 눈을 피하며, 내온 물을 먼저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넘겼다.

항상 하던 거니까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말이야.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시란.
물론 의도는 알겠는데!

미안함을 눈에 담아 카인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살짝 고개를 숙였더니,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높으신 분인  이미 알고 있었어요.”

“티를 내려고   아니었는데.”

“들어오실 때부터 태는 났답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더니, 변명도 할 수 없는 미소였다.
거 봐, 시란. 그렇게 안 했어도 됐잖아. 괜히 무안함만 더 해졌다.
정확하게 정체는 밝히지 않았으나, 본의 아니게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렸으니,
이제는 말을 높이기도 어색한 일이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하고는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겠어?”

“대충은 짐작하고 있답니다. 카인을 계속 찾아오셨으니까요.”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나는 그대의 아들이 필요해. 그대가 도와줬으면 좋겠고.”

“감히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그대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야.”

“카인이 말인가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내 말을 진지하게생각해주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높으신 분이라 쉽사리 불만을 꺼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고민하던 그녀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명예로운 일이고, 또한 필요한 일이지.”

“저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었다. 당연히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면 꺼려지겠지.
방금과는 달리 이번엔 높으신 분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조금 입맛이 씁쓸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될 거라는 건 알지만, 보상은 넉넉히 해줄 생각이야. 나머지 아이들이 넉넉히 성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지원을 해주겠어. 무엇보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서둘러, 그러나 확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보다 먼저 죽게 하지 않겠네. 약속하지.”


그러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나를 믿을 수 있을지 탐색하는 눈빛.
예의엔 어긋나지만 나는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당당히 펴고, 신뢰를 주기 위해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고민했다.


가만히 닥치고 있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선택을 돕기 위해 한마디를 더 하는 게 좋을까.
할 수 있는 말이야 많았다.

자네의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지.
돈도 많이 벌 수 있네.
온 국민이 카인의 이름을 드높여 칭송할 거야.
내 정체를 밝혀야 한다면 밝히도록 하지.
나는 루크레치아 아스트레아. 아스트레아의 첫 번째 달일세.



‘과해. 필요 없어.’



아마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그녀에게는 협박이 될 것이다.
물론 선택을 돕는 말이겠지만,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답했다.



“……카인이 선택하게 해주세요.”

회한이 서린 얼굴이었다.
대부분은 높은 사람을 거역하기 힘들다는 두려움,
나머지 아이들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일말의 기대,
당사자에게 결정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핑계로 어린 자식에게 대답을 미룬 것이었다.
나에 대한 신뢰는아주 조금일까.
씁쓸하지만, 나 역시 이해가 가는 판단이었다.

“일단은그걸로 좋아. 대신 카인이 나를 선택했다면 말리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그 아이는 항상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걸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내 변덕 하나에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높으신 분’이 누군지 확실하게 모르는 점은 더욱 그런 불안을 더하겠지.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네. 내일 다시 카인을 찾아오도록 하지.”



그녀는 끝끝내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

“아가씨도 참 피곤하신 분입니다.”

“내가 뭐.”

돌아가는 길. 시란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입을 삐쭉이며 답하자 시란은 엷게 웃으며 답했다.



“아가씨께선 그 소년이나 어미에게 정체를 밝히고 명령하실 수 있었습니다.”

“정체를 밝히면 위험하니까 안  거거든.”

“감히 일개 평민이 아가씨의 명령을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년을 데리고이곳을 떠나면  아니겠습니까.”

“그건…….”

시란은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조금 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만 해도 그렇습니다. 굳이 어미에게 사정을 밝힐 필요가있었습니까? 이제 소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편이 더 카인을 설득하기 쉬울 테니까 그런 것뿐이야.”

"그랬다면 아예 어미를 속여서 아가씨에게 힘을 싣게하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어미의 불안을 줄여주고 싶어서 그러셨겠죠.”

나는 걸음을 멈추고 시란을 돌아보았다.

시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짜증나는 표정이다. 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런 미소.

나는 혀를 차곤 다시 뒤로돌아 걸었다.



“아무튼 그런 거 아니라고. 시란은 나를 너무 고평가 해. 난 그렇게까지 마음이 여리지 않다고.”

“아무렴요. 다만.”

“다만?”

“그 소년이 아가씨께서 그렇게나 심혈을 기울여야 할 만한 대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시란도 그렇게 생각해?”

“예. 아마 모두들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마 그렇겠지.
사실 시아가 카인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이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란. 나는 느껴버리고 말았는걸.

카인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온몸이 멈추고,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어.
숨이 점점 조여 가는데, 동시에 얼굴은 뜨거워지는 거야.
두려움을 느끼는 루크레치아와 희열을 느끼는 루크레치아가 있었어.
그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마 말해도 이해할  없겠지.
나만이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나도 공포와 희열을 동시에 느낄  있을 거라곤 생각한  없었고.’

그래, 포식자와 구원자를 하나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하려고 했다.

그때 시란이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해할  없지만, 아가씨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거니까요.”

“…….”

“그렇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제게 말해주지 않으셔도, 아가씨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는 단지 따를 뿐이에요.”


시란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뗐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서,
시란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결국 뱉은 거라곤 겨우 이런 유치한 말이었다.



“……못됐어.”

“후후.네. 저는 못됐어요.”

“아니야. 사실 안 못 됐어.”

“안  됐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하여간에 알아들었으면 됐잖아.”

돌아가는 길, 나는 시란과 별 쓰잘데기 없는 말을 나누었다.

마침 높게 뜬 태양이 너무 눈이 부셔서라는 핑계를 대며 나는 그늘진 곳을 향해 뛰어갔고,
시란은 가는 길 내내 미소 지으며, 이따금  붉게 물든 얼굴을 놀려댔다.

가라앉았던 기분은, 겨우 그 정도로도 들뜨는 것이었다.



***

열한 번째 날. 카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인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오늘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내가 밝게 인사하려고 손을 들자, 카인은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퉁명스러운가?
가까이 다가가자, 카인이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찾아오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 들었어?”

“예. 동생이 말해줬습니다.”

“응?”

동생이라고? 어머니가 아니고?
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카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디로  거냐고, 이미 아가씨와 사귀는 사이냐고 묻더군요.”

“뭐어?”

아, 아아! 그렇게  거구나.
어제 동생을 놀려먹은 게 이렇게 돌아온다고?

자세히 보니 카인 역시 얼굴이 조금 붉은 것이,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끄러워 보였다.

퉁명스러운  아니라 부끄러운 거였어?
나 역시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건 동생이 착각한 거고. 나는 네게 관심이 있다고만 했어.”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물론 거짓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게 유도했거든.
그러나 카인은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다시 빨갛게 변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떨었다.
자신이 한 오해와 발언 때문에 부끄럼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 슬픈 사춘기 소년이여. 그래도 이쯤에서 그만둬야겠지? 아쉬운 건 나니까.
그래서 카인에게 괜찮다며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래도! 아가씨 탓도! 있습니다!”

“어, 응?”

“아가씨가 누군지도 밝히시지 않고, 게다가 저를왜 원하시는 지도 말씀해주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어제 세린에게, 아니동생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속사포 같은 말이었다. 어제 굉장히 쌓인 게 많았나 봐.
분명히 진중하고 과묵한 소년이었는데. 정말 많이 흥분했나보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내가 원하는 결론에 다다른 셈이었다.
나는 카인에게목적을 설명해줘야 했고, 또한 내가 쌓은 오해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카인쪽에서 먼저 요구한 셈이니 최선의 결과가 나온 셈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아에게 물었다.

“해도 되겠지?”

“마력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오.”

“좋아.”



이미 들었던 거였지만, 굳이 한 번 더 확인을 받은 것이었다.
카인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카인에게 네가 용사라고 밝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뭘까?
그렇게 해서 정한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카인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것을 말해줄게.”

“제가 당신을 따라간다면요? 그건…….”

“아니, 그래도 좋겠지만. 만약에 니가 이걸 들 수 있다면.”

기적을 보여주자. 기적을 구현하게 하자.
그렇다면 카인도  말을 부정하지 못하리라.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녀석을 불렀다.
나와, 루크레치아.

따뜻하고 눈부신 빛이 이곳을 가득 채웠다.
동이 트는 빛에 부드럽게 섞이면서도, 제 존재를 뚜렷하게 밝히는 녀석.


성마검, 루크레치아.

“네가 이걸 들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말해줄게.”

“이게 뭡니까?”

“그것 또한 네가 이것을  수 있다면 말해줄게.”



그러자 카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 나름대로 다짐을 한 표정이었다.

그래,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카인도 성마검을 쥔다면 운명을 깨닫게 되겠지.
나는 이 순간, 카인에게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이었다.

이것은 성검이며, 네가 세상을 지킬 용사이기에, 선택받은 사람이기에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

그 외에도 내가 아스트레아의 공주인 루크레치아 아스트레아라던가,
마왕과 맞서 싸울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들 방법을 안다던가,
혹은 충분한 보상을 해줄 거라던가,
그런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이었다.



“어?”

카인의 손에서, 성마검이 빛을 잃고 사라지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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