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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 생존 전략 12. 필요하다면 세 번이라도 찾아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 (8) (92/139)

〈 92화 〉 생존 전략 12. 필요하다면 세 번이라도 찾아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 (8)

* * *

한동안은 눈만 껌뻑거렸다.

정신을 차리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이해하는 데 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잔 게 며칠만이었더라.

그렇다고 내가 잠이 덜 깨서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고.

헤리엇의 눈치를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자라는 건 혹시 어떤 분야의 제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마녀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지만 역시나로구나.

일말의 여지없음.

그럼 헤리엇이 어제 잠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닐까?

이 말을 꺼냈다간 불같이 화를 낼 테고, 게다가 정신도 맑아 보였다.

헤리엇은 팔짱을 끼고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방금 대답했잖아. 싫다니까.

애당초 마녀? 어째서? 나 용사라고 밝히지 않았던가?

그전에 대체 어제 뭘 알게 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그냥 동료가 오기 전까지 대답을 보류할까? 그런데 그게 통할까?

꼬르륵.

“……아.”

열심히 고민했더니, 정신이 깨면서 몸도 같이 깬 모양이었다.

생리현상이다. 도망 다니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몸에 힘이 없는 것도,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생각과 달리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으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요.”

“그때라니, 아하. 처음 봤을 때 말이더냐? 그럼 배고플 만도 하구나.”

나는 부끄럽지 않다.

하나의 생리현상일 뿐이다.

살다 보면 진지한 분위기에도 꼬르륵소리가 날 수도 있지.

그렇게 자신을 달래는 것이 무색하게도 헤리엇이 피식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쪽은 꽤나 정직하구나. 일단 식사부터 하는 편이 낫겠어.”

“……네.”

아주 작은 소리로 짜내듯이 겨우 대답했다.

헤리엇이 한 제안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은 많을수록 좋았기에, 결과적으론 좋았지만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아, 진짜. 생리현상은 맞는데, 왜 하필 지금.

카인이 못 들은 게 그나마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조금 떨어져서 자고 있는 카인을 바라봤더니,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들었나? 들은 거 같은데?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표정인데?

야, 너 지금 깨어 있지, 어?

***

카인은 역시나 모르는 척을 했다.

전 이제 막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애한테 내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냐고 캐물을 순 없잖아.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입 끝이 움찔거리는데 모르겠냐고.

카인을 더 볶으려던 차에, 헤리엇이 아침 준비가 됐다며 불렀다.

헤리엇이 차린 아침은 의외로 맛있었다.

내가 배가 완전히 비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재료가 신선했다.

계란은 스크램블, 귀리로 만든 거친 빵은 우유에 적시니 거친 식감조차 강한 풍미가 느껴졌다.

샐러드로 나온 건 약초가 섞여서인지, 쓴맛이 섞여 카인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내 입엔 오히려 더 좋았다. 옛날이 생각나는 맛이라고 할까.

다만 혹시라도 양귀비 같은 게 섞여 있지 않나 뒤적거린 건 비밀이었다.

의외로 스프가 없는 건 좀 웃겼다. 마녀하면 스프를 만드는 이미지가 있었으니까.

이에 관해 물어보자 헤리엇의 반응 역시 재미있었다.

“스프는 만들기가 귀찮잖느냐. 그리고 마녀라면 스프를 만든다니. 그건 또 어디서 들은 말이더냐?”

“그냥 제 안에서 멋대로 만들어진 이미지에요.”

“요즘 것들은 대체 마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원. 에잉 쯧쯧.”

그때부터 헤리엇은 세간에 잘못 퍼진 오해에 대해 한탄했다.

그런데 그 말에 왜 계속 요새 젊은것들이 붙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옛날엔 대체 어떤 이미지였기에?

하여간에 식사 시간은 굉장히 즐거웠다.

덕분에 자리가 자리인지라 체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즐겁게 식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어딜 가려는 게야.”

물론 행복한 건 식사 시간이 끝이었지만.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모른 척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붙들려 버렸다.

윽. 밥 잘 먹고 뒤늦게 체할지도.

나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표정에 신경 쓰며 자리에 앉았다.

준비했던 말은 덤이었다.

“고민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고민할 시간 말이냐.”

솔직히 마녀가 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싫었다.

물론 싫은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건 시간 때문이었다.

마녀가 뭐 마녀가 돼라 뚝딱하고 되는 것도 아니고,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 아닌가.

심지어 헤리엇이 말한 바로 마녀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란다.

그럼 공부할 것도 많을 터이니, 당연히 시간이 많이 들 것이요, 이곳에서 보내야 할 시간도 길어질 것이었다.

‘당장 노르크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다리에서 떨어질 때, 시야 끝에 보였던 스카우터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후 나를 쫓은 건 제온뿐이었다.

그렇다면 스카우터는 뭘 하고 있을까?

물론 조급한 마음이 만들어낸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른다.

안제와 절벽 위. 겨우 두 번이다.

하지만 미리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과연 우연일까.

만일 노르크에서도 그 녀석이 있다면, 이번엔.

“시간은 네 편이 아닌데도 말이더냐?”

“예?”

잡념을 헤리엇이 끼어들어 끊어냈다.

그런데 의미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저런 비슷한 말을 했었지?

내가 어째서 죽지 않냐는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어차피 시간을 질질 끌다가 거절하려고 한 것이 아니더냐.”

“꼭 그런 건 아닌데요.”

“흣. 아니기는.”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사실 시간을 끌다가 동료가 오면 도망갈 예정이었는데, 이미 다 들켰나 보다.

폐하도 한 번은 속여넘겼는데.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헤리엇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뭐, 그건 됐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이 네 편이 아니라는 점이니까.”

“그, 그래요. 그것에 대해 말하죠, 네.”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넌 한 달 안에 죽을 게야.”

“……네?”

이번에도 마녀가 되라는 것에 못지않을 정도로 엄청난 폭탄선언이다.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멍청한 목소리로 재차 물어보는 것뿐이었다.

오늘따라 충격적인 말을 몇 번이나 듣는 거야?

잠깐만. 저 말은 근데 정확히 무슨 말이래?

“그, 혹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여버리시겠다는 말인가요?”

“쯧. 우둔하기는.”

헤리엇이 살짝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평소 같으면 저런 표정 하나하나에 상처받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 역시 이런 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여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헤리엇이 눈썹을 찌푸리며 설명을 더 했다.

“내가 널 죽이긴 왜 죽인단 말이냐.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죽을 텐데.”

“이유는요? 제가 왜 죽는데요?”

“그거야, 흠. 설명하기가 쉽지 않구나.”

어제 말한 것에 이어지는 것 같은데.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별안간 헤리엇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별안간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더냐? 내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넌 죽는다. 그게 다가 아니더냐.”

그것만큼은 굉장히 확신에 찬 태도였다.

배려를 해주는 것도, 납득을 시키는 것도 아닌 오직 사실을 전달하는 것 같은 태도.

그리고 결론은 죽던가, 말을 따르던가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뿐이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하루 만에 어떤 결과가 나왔기에?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그런 억울한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부터 차오른다.

내 죽음에 헤리엇이 관련한 부분은 있을 리가 없는 것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헤리엇에게 짜증을 낼 이윤 없어.

이렇게 된 게 헤리엇의 탓도 아닌걸.

하지만 저 단정적인 태도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조금 내 생각도 하면서 말해줄 수 있잖아.

내가 죽니마니 하는 얘기를 하면서 이유도 안 알려줘 놓고.

감정은 전이된다. 헤리엇만큼, 아니 헤리엇보다 내가 더 짜증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뭬야?”

“마녀가 되는 방법 말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냐구요.”

“없다.”

“헤리엇님이 모르시는 건 아니고요?”

“……쯧.”

헤리엇은 내 말을 듣고 혀를 찼다.

그 소리를 듣자 지금까지 들던 생각이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헤리엇을 바라보았다. 나, 땅만 보고 있었구나.

방금은 예의가 없었어. 아니지. 완전히 따지는 말투였네.

그러나 어느새 헤리엇은 눈을 감고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고 말을 다 하면 방금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사과하도록 하자.

헤리엇의 탓도 아닌걸.

게다가 지금 신세지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헤리엇은 눈을 뜨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하. 간단한 이치였군.”

“저, 헤리엇님? 제가 어.”

“내가 왜 네 문제로 이렇게 골머리를 쌓는단 말이더냐.”

“네?”

헤리엇은 내 말을 끊으며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기시감이 드는 포즈다. 어디서 한 번 봤었는데. 어, 잠깐만?

그때랑 달리 지팡이는 들고 있지 않지만, 그때 그 모습이랑 흡사한데?

“다른 방법이야 네가 찾도록 하거라. 나야 알려준 것만으로도 빚은 다 갚은 셈이지. 암.”

“헤, 헤리엇님? 저기요? 제가 잘못…….”

“처음부터 이러면 됐을 것을.”

뒤늦게 사과하려 했지만, 내 말보다 헤리엇의 마법이 더 빨랐다.

헤리엇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야가 급변한다.

잠깐만, 이거 정신 차리고 있을 땐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였어?

주변의 경치가 빠르게 내 양옆을 지나간다.

그러나 시야 말고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오히려 나 홀로 세상에 서 있고 세상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묘한 감각에 익숙해지려는 순간,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세상이 멈췄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잘못했, 우웨에에엑!”

어느새 바뀐 풍경과 멀미가 나를 찾아왔다.

평소에 겪는 멀미에 한 열 배쯤은 될 정도. 바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생각해보니까 전에 날아갔을 땐 기절해 있었잖아?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이런 감각, 평생 알고 싶지 않았다고.

***

한참을 게워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숲이었다.

온몸에 힘이 쭉 풀리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잠시 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망했다.”

결과. 완전히 망했음.

어쩌다 이렇게 됐지? 헤리엇에게 짜증 내다가 추방당했음.

물론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아침부터 너무 놀랄 말만 해서 정신을 못 차렸구요.

게다가 저는 너무 피곤했구요. 목숨에 관련된 문제라 너무 놀라서 그만.

하지만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마녀가 될 순 없지만 더 눈치 좀 볼걸.

이번에도 감정에 휩쓸려서 한 실수였다.

“에휴.”

몇 번이고 이렇게 실수를 하는데 왜 고쳐지지가 않을까.

심지어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는데도 그렇다.

물론 원작에서 루크레치아는 굉장히 감정적인 캐릭터긴 했지만, 왜 나까지.

그나저나 돌아가면 마녀가 되라는 건 어떻게 하지?

목숨과 관련이 있다는데, 따르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진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에휴. 그래도 일단 돌아가면 사과부터 하자. 그래, 그런 거로.

그런데 겨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어? 왜 카인이 없지?”

카인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입은 옷도 그대로였다.

지금 옷은 푹 자려고 갈아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다시 말해 헤리엇과 대화하던 그대로 날아왔다는 소리였다.

상황 파악을 하자면, 나를 지켜주는 사람도, 수단도 일절 없음.

이곳에서 몬스터를 본 적은 없지만, 확신할 수 없음.

동료들에게 내 위치를 알린 곳은 헤리엇이 있던 곳임.

그러니까 동료들이 헤리엇에게 찾아왔을 땐, 분명히 아티팩트가 위치를 알렸지만 나는 없는 그런 상황이란 건데.

우리 애들이 오해하기가 너무 쉬운 상황이잖아?

카인이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당장 카인도 다른 곳으로 날아갔을지 모르고.

남아있더라도 내가 어디 갔냐고 물어봤다가 헤리엇과 싸울지도 모르고.

게다가 잠깐만. 여기 제온한테 쫓기던 곳이잖아?

“헉.”

스물스물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아무리 제온이라도 그 정도로 당했는데 떠났겠지.

더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다면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제온이 나를 아직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을 짚어본다.

꿀꺽.

침을 삼키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해. 어떻게 해서든 돌아가야 해.

마녀가 되든 안 되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제온에게 걸리는 순간, 한 달이고 자시고 그 순간이 사망 확정이다.

아직은 근처에서 마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이번엔 느낄 수 있는 순간 죽는다고!

동료 없음. 시간제한 있음. 위험한 녀석 있을지도 모름.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자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횟수가 많아진 건 덤이었다.

어째서야…….

어째서 겨우겨우 고비를 넘기니까 하드 모드가 기다리고 있는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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