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생존 전략 13. 거듭 은혜를 베풀어 신뢰를 다져야 할 때가 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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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는 여러 가지를 설명했지만, 결국 그걸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
전쟁이 시작되면 노르크는 길게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노르크를 도와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
물론 루시도 노르크가 자신들의 도움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외부인이니까.’
그렇다면 언제 나서야 하는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다급할 때.
그러나 너무 늦어서 도움조차 주지 못하기 전에.
즉 적당히, 잘, 현장에 맞춰, 알아서.
굉장히 불합리한 명령이었으나 시란은 유능했다.
괜히 루시가 시란을 이곳에 남긴 게 아니었다.
루시는 시란이 유일하게 자신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시란은 가장 먼저 하라칸에게 도울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루시가 남긴 ‘핑계’를 하라칸에게 풀어냈다.
“저희도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이건 당신들의 자존심이 걸린 전쟁이니까요.”
“뭐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전쟁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러니 힘이 필요할 때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하라칸도 할 말이 없었다.
위험할지도 몰라서 빠지랬더니 자기들은 절대 안 죽는단다.
너네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려고 했더니 부르기 전까진 나서지도 않는단다.
하라칸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말을 미리 다 막아버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하라칸의 안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대체 왜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물론 노르크는 캉카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주변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건 아니었다.
주변이 포위된 것도 아니었다.
아직 빠져나갈 길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위험을 자초한단 말인가.
시란은 루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준비된 말을 꺼냈다.
‘하라칸이 계속 귀찮게 하면 그냥 내 이름 팔아.’
“아가씨께서 내린 명령입니다.”
“하.”
자리에 없는 녀석을 팔아버리니 하라칸의 마지막 의문조차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자기들도 명령을 따른다는데 어쩌겠는가.
대장의 명령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
결국 하라칸은 허탈하게 헛웃음을 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한 저희가 돕겠다는 걸 주위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왜?”
“저희가 돕는 건 노르크가 아니라 당신이니까요.”
“그게 다른가?”
“네. 완전히 다릅니다.”
이 몸은 자랑스러운 노르크의 전사인데, 그 두 개가 뭐가 다른 거지?
하여간에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돕겠다는데 저 정도 부탁도 못 들어줄 순 없지.
결국 하라칸이 할 수 있는 건 알겠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캉카트의 선전포고, 노르크의 대응.
전령의 목을 자르며 당장이라도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았으나, 두 세력은 하루 동안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방어전을 준비하는 노르크야 대비하는 것이 당연하나, 선전포고까지 한 캉카트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었다.
노르크는 방심하지 않았다.
경계를 철저히 하며, 캉카트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도록 캉카트는 결국 보이지 않았다.
이틀째가 되었다.
캉카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몸이 달아오른 전사 중 일부는 캉카트가 겁에 질린 것이 아니겠느냐며 비웃었다.
또한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노르크의 대장군인 사르만은 이에 대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축하였다.
물론 사르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르만은 눈이 밝고 몸놀림이 날랜 이들을 모았다.
캉카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이들에게 적의 동태를 살피라고 하였다.
임무의 일차 목표는 귀환,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돌아오는 것을 우선시하라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르만은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경계를 서는 이들에게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모두 보고할 것을 명했다.
사흘째가 되었다.
사르만의 판단은 옳았다.
사흘째가 되자 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멀리서부터 노르크를 포위하며 조이고 있었다.
병사의 수는 족히 천을 넘어 보였다.
일개 부족이 끌고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수였다.
그러나 노르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충분히 준비를 한 자는 두려움이 없다.
굳게 올린 방벽. 충분한 무기와 식량. 그리고 단련된 병사.
수적으론 열세이나 그 외엔 부족함이 없었다.
노르크의 자존심만큼이나 굳게 세운 방벽에서 이들을 맞았다.
적의 수는 천을 족히 넘었으나 상정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르만은 이상함을 느꼈다.
‘저 정도의 수로는 노르크를 이길 수 없다.’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없을 리가 없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저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었단 말인가.
그러나 사르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들 역시 자신을 최고의 전사라고 여길 터.
수적 우위까지 확신하였으니 필승을 바라보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허나 최고의 전사임을 자부하는 것은 노르크 역시 동일.
이 자리를 통해 그를 증명할 뿐이었다.
사르만이 족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족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전쟁터에서도 불사르시지 못하는가.
사르만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전사들의 앞에 섰다.
노르크의 영광스러운 전사들 앞에서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사실만을 담담하게 전하면 될 뿐.
사르만이 배에 힘을 주고 칼을 빼어들어 적들을 가리킨다.
그리곤 우렁차게 외쳤다.
“주제도 모르는 무뢰배들에게 진정한 전사가 무엇인지 알려줘라!”
“와아아아아!”
루시가 떠난 지 사흘, 전쟁이 시작된 첫날.
캉카트의 공세는 해가 지도록 이어졌으나 노르크는 이를 훌륭히 막아냈다.
노르크의 피해는 오십 남짓. 캉카트의 피해는 배 이상이었다.
완벽한 전과에 전사들의 기세 역시 올라갔다.
닷새째.
캉카트의 움직임이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다.
분명 전날엔 무식할 정도로 방벽을 향해 밀려들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닷새째엔 북을 치며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외쳤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요란스럽게 굴다가도 화살이 닿는 곳에 이르면 더 진격하지 않는다.
넷째 날의 패배에 주눅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어제는 분명히 노르크가 승리했으나, 적의 수는 수 배.
계속 수로 밀어붙이면 노르크 역시 위험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시간 역시 노르크의 편이었다.
보급도, 계절도, 그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르크에게 웃어주었다.
사르만을 비롯하여 캉카트와의 전쟁을 겪은 이들은 이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그뿐이었다.
그리고 닷새째, 해가 완전히 지고 난 이후.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몬스터 떼가 발견되었다. 그런 보고가 들려왔다.
몬스터는 위험하다. 그러나 몬스터 역시 위험한 곳은 피한다.
전쟁터는 사람에게도 위험했으나, 몬스터에겐 더욱 위험했다.
인간이 가장 강력한 무장을 하고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그래서 몬스터들은 전쟁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몬스터들이 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마치 무언가를 재는 듯했습니다.’
경계를 섰던 병사는 그렇게 말했다.
사르만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단은 캉카트와의 전쟁이 더 중요했기에 몬스터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엿새째. 캉카트는 계속 작게 소모전을 벌였다.
마치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는 노르크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사르만은 화살을 아끼며 적이 더 가까워질 때 공격하라 명했다.
그러자 캉카트는 기다렸다는 듯 전 병력이 빠르게 움직여 사방에서 노르크를 공격하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흘째 입었던 피해의 몇 배의 피해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공격하기 위해 캉카트는 기마병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전멸에 가깝게 쓰러트렸으니, 전술적으로는 노르크의 이득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사르만은 이때 전쟁의 승리를 직감했다.
캉카트가 자랑하는 기마병이 무너졌다면, 저들은 방벽을 넘을 수 없다.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끌리다 물자가 부족해지면 캉카트는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
이는 오랜 기간 전쟁을 겪은 지휘관의 적확한 판단이었다.
한 가지 변수만 제외한다면.
엿새째의 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어?”
푸르륵!
메에에!
가만히 잠자고 있던 양과 말이 깨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관리하던 자들은 동물을 안심시키려 하였지만 도무지 통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부우우
이곳저곳에서 나팔소리와 경계를 서던 이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퍼졌다.
빠르게 불이 지펴지며 곧 주위가 밝게 되었다.
어둠이 걷히자 나무 방벽을 에워싼 몬스터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였다.
“몬스터들이 방벽을 밀어낸다!”
“막아라! 떨어트려야 한다!”
부우우
주위의 소란에 하루종일 전쟁을 치르다 곯아떨어진 전사들이 헐레벌떡 일어나 무기를 쥐어 들었다.
계속 이어진 전쟁에 몸은 지쳐있었고, 잠에서 막 깨서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 한 채였다.
그러나 겨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치렀던 전쟁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런데 이럴 때 방벽이 무너진다면? 캉카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당장 저 많은 몬스터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방벽이 무너지기 전 역전의 전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여 이를 막았다.
창으로 찍고, 방패로 밀어내며, 아껴놨던 화살을 쏘아냈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죽더라도 방벽을 밀어내는 게 목표인 것 마냥.
허나 노르크는 이 위기 또한 이겨냈다.
밤이 지나고, 해가 뜰 무렵이 되자 몬스터들은 물러났다.
방벽도 무너지지 않았고, 사망자 또한 많지 않았다.
빠른 대처를 통한 노르크의 선방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이레의 아침.
해가 밝자마자 캉카트의 대군이 덮쳐들었다.
노르크의 전사들은 쉴 새 없이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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