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생존 전략 13. 거듭 은혜를 베풀어 신뢰를 다져야 할 때가 있다. (22)
* * *
“후회하지 마시오.”
“물론이죠오.”
결국 사르만은 이 둘이 떠나지 않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지금은 저 개떼처럼 붙은 캉카트를 처리해야 했다.
이럴 때 한 명이라도 이끌 사람이 있었다면.
“음?”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족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형님께선 어디에 계시지?
족장이 자리에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 전사들에겐 정신적 지탱이 된다.
이번에 돌격에 나선 것이 사르만, 노르크를 지키기로 한 것이 족장이니 지금은 모습을 보여야 할 터.
하여 사르만이 족장을 찾기 위해 나가려는 순간, 사르만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방벽을 지키는 역할을 하던 알탄이었다.
“숙부님. 긴급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습니다.”
“지금은 바쁘다.”
“중요한 일입니다.”
사르만은 얼굴을 찌푸리며 알탄에게 경을 치려고 하였다.
아직 캉카트가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다.
방벽을 지켜야 할 이가 여기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장군!”
“무슨 일이냐.”
“캉카트가 물러나고 있습니다!”
“뭐?”
캉카트가 공격을 접고 한 차례 물러난 것이었다.
분명히 좀 더 몰아친다면 방벽이 뚫릴 수도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대체 왜?
마법을 경계한 건가?
시아와 시란이 그 소식을 듣고 탈진하듯 자리에 쓰러졌다.
사르만은 혼란스러웠으나 한숨을 내쉬고 전령에게 물었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느냐.”
“아닙니다. 말로 달리면 수십초 내로 달려올 거리입니다.”
“그러면 공세를 거둔 정도로군.”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기세가 끊겨 한 차례 접기로 했나 보군.
그렇다면 다음 파가 괴로워질 것이다.
막기 위해선, 빠르게 정비해야 한다.
“숙부님.”
사르만이 전장의 뒤처리를 하려 하자 알탄이 막아섰다.
상황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그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깊은 아이다. 전사가 아니지만 전쟁을 모르는 아이도 아니다.
알탄이 쓸데없는 행동을 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도 돌아갈 생각이 없소?”
그러자 시아는 말도 없이 두 눈을 감아버렸다.
듣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사르만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관에게 전장의 뒤처리를 맡겼다.
알탄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말하도록.”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나와 너, 그리고 노르크의 영웅뿐이다.”
“그걸 감안하고 한 말입니다.”
사르만이 알탄을 쏘아봤지만, 알탄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피곤한 얼굴로 알탄에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지.”
“예.”
사르만은 부관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막사로 자리를 옮겼다.
막사에 도착하고, 알탄은 몇 번이나 바깥을 확인했다.
얼마나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하기에.
뒤늦게 몰려드는 피곤을 씻어내듯 눈을 비비며 물었다.
“할 말이 무엇이더냐.”
“마법사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사르만이 눈을 찌푸렸다.
마법사의 정체라니.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가면을 쓰고 있는 이다. 당연히 제 정체를 숨기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노르크의 위기를 넘기게 해 준 은인이다.
이제 와서 그의 정체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알탄의 충격 선언에 사르만은 피곤이 완전히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자는 실레바란입니다.”
“……뭐?”
사르만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알탄은 그런 사르만에게 재차 확인시키듯 쐐기를 박았다.
“그자의 정체는 에이브릴 실레바란. 영원한 우리의 적. 실레바란의 마지막 후계자입니다.”
천막에 정적이 돌았다.
사르만은 입을 벌리고 여태껏 보인 적 없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실레바란? 에이브릴 실레바란?
사르만이 모를 리가 없었다.
평생을 싸운 실레바란의 후계자.
그렇군. 그제야 그자의 말도 안 되는 마법과 기묘한 기시감이 납득됐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몇인가.”
“저 혼자입니다.”
“어떻게 알았지?”
“가면을 벗는 순간을 우연히 봤습니다.”
털썩. 사르만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흐리멍덩한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돌고 있었다.
실레바란, 실레바란이라.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사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알탄에게 말했다.
“……묻어두거라.”
“예?”
알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자 사르만이 방금 알탄이 했던 것처럼 재차 답했다.
“이 사실은 나와 너. 둘만 알고 있도록 한다.”
“어째서입니까.”
알탄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려 실레바란이다.
원수라고 친다면 지금 싸우고 있는 캉카트보다도 더욱 오랜 적수였다.
노르크의 숙원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심지어 사르만에겐 더욱 각별한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사르만은 굳은 얼굴로 알탄에게 설명했다.
“마법사의 정체가 실레바란이라고 하더라도, 그자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큰 빚을 졌으니 갚아야 하는 것이 맞다.”
“숙부님.”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알탄 너도 자리에 돌아가 전사들을 추스르도록.”
사르만이 단호하게 알탄의 대꾸를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몸이 한계였으나 쉴 때가 아니었다.
캉카트가 잠시 물러났다고는 하나, 그렇기에 더욱 지금 다음 전투를 대비해야 했다.
사르만은 알탄에게 명령을 내리고 다시 천막을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푹.
갑자기 옆구리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은 따끔한 정도, 그러나 순식간에 통증이 번져간다.
풀썩.
사르만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의 끝부터 저릿한 느낌이 든다.
칼에 찔린 것만으론 이렇게 순식간에 무력화될 리가 없다.
‘독인가.’
마비 독, 주로 화살촉에 묻혀 사용하는 노란 풀꽃의 뿌리다.
생명에 위협을 주는 독은 아니지만, 빠르게 사냥감을 제압할 때 쓰이는 종류.
하지만 옆구리에 칼을 맞았으니 이대로 누워있다간 죽음을 맞이할 터.
움직여야 한다.
이렇듯 사르만은 제 몸 상태를 빠르게 판단했으나,
동시에 현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불의의 기습, 누구에게?
이 자리엔 알탄밖에 없다. 하지만 알탄이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족장을 도왔던 것 같이, 하라칸을 돕는 부족의 기둥으로 키우려고 했던 아이였다.
그 과정에서 알탄은 헌신적이었고, 열정적이었다.
“대체 무슨.”
그렇기에 사르만의 질문은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알탄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 사르만이 고개를 들었다.
알탄은 냉정한 얼굴로 사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르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알탄을 바라보자, 알탄이 입을 열었다.
“저는 평생 하라칸의 뒤가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이 문제더냐.”
“그게 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책망하는 말이다. 하지만 전혀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알탄은 쓰인 글을 읽듯이 말을 이었다.
“저를 따르는 이가 더 많습니다. 하라칸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계속 전통을 지키려고 한다면, 노르크는 결국 이러다 끝이 나겠지요. 그런데 왜 저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없습니까?”
“그건 네가 전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만이 단호하게 답했다.
노르크는 전사가 아닌 이를 우두머리로 삼지 않는다.
그것이 긍지였고 명예였다.
그러자 알탄 역시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래서 그랬습니다.”
“으음.”
사르만이 신음을 흘렸다.
알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사르만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멍청한 녀석. 그래서 캉카트에게 부족을 팔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전 캉카트와 손을 잡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겨우 체스 말에 불과하죠.”
알탄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힘이 부족하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게 힘을 줄 수 있는 이와 손을 잡았습니다. 저보고 북쪽을 지배할 힘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겨우 이 조그만 부족의 족장보다야 더 대단한 자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알탄의 말엔 열의가 없었다.
야망도 없었으며, 그저 빈 넋두리와도 같았다.
자랑하는 것도 아니요, 조롱하는 것도 아니었다.
알탄은 그저 일어난 일을, 그리고 일어날 일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찾으십니까?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죽였습니다. 라타타가 뒤를 치니 깔끔하게 죽더군요.”
“네가 형님까지!”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의 경우였다.
심지어 부족 최고의 전사인 라타타까지 배신을 했단 말인가!
사르만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알탄은 이전과 같이 평이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치 평소처럼 사르만에게 보고를 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그리고 곧 제 수하들이 방벽의 한 곳을 허물 겁니다. 이후 약속했던 나팔을 울릴 것이고, 캉카트가 덮쳐들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을 한 거다. 노르크가 무너지고나서 네게 약속을 지킬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
“잘잘못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숙부님께서도 중요한 건 힘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알탄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사르만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족장을 죽였고, 방벽을 무너트린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할 행동은 무엇일까.
“어디로 가는 거냐.”
“계획에 제일 방해되는 이를 처리해야겠지요.”
“큭, 이노옴!”
불길한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시란과 시아. 둘을 해치겠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노르크로서가 아니라, 노르크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은인을 해치게 둘 순 없었다.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수치였다.
제가 움직일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
자신은 노르크의 대족장이다.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더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목숨을 뒤로하고 부족을 위해 싸운 결과가, 내분이란 말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란 말인가.
그러나 하늘은 아직 노르크를 버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오, 형님?”
하라칸이 자리에 나타났기에.
사르만이 마지막 힘을 다해 하라칸을 바라봤다.
알탄이 일족을 배신했다!
그러나 이젠 혀도 마비되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르만이 할 수 있는 건 하라칸을 애타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알탄은 하라칸의 등장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이어 굳은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사르만이 부족을 배신했다.”
“음? 그럴 리가 없잖소, 형님. 사르만이 좀 깐깐하긴 하지만 절대 부족을 배신할 리가 없소.”
“나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꼭 알아야 한다. 너를 도운 녀석 중 하나는 실레바란의 후계자다. 캉카트와 내분을 일으킨 것도 그 녀석들이고. 그 녀석들을 막아야 한다.”
알탄이 진지하고 급박하게 말하자, 하라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곤 바닥에 쓰러진 사르만을 한 번, 알탄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형님이 사르만을 이겼을 리가 없잖소.”
“라타타가 나를 돕고, 이 소식을 족장님께 전달하러 갔다. 제발, 하라칸. 시간이 없어!”
“시간이고 나발이고 잠깐 있어 보쇼!”
하라칸이 고함을 쳤다.
알탄에게만큼은 대든 적이 없는 하라칸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행동은 하라칸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단번에 드러냈다.
알탄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알탄은 하라칸이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다급하게 설명을 이었다.
“사르만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래서 손을 쓴 거야. 그리고 숙부님께는 노란 풀꽃으로 제압해둔 것뿐이야. 시간이 없어, 하라칸. 그들이 방벽을 허물기 전에 막아야 한다!”
알탄이 하라칸의 등을 밀었다.
이렇게 서두르다 보면 하라칸은 대뜸 알겠다며 시키는 대로 하고는 했다.
허나 이번엔 달랐다.
하라칸은 제자리에 서서 몇 번을 사르만과 알탄을 돌아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형님. 어째서 거짓말을 하고 계신 거요.”
그러자 다급하게 하라칸을 밀어내던 알탄이 움직임을 멈췄다.
하라칸의 표정이 확고하다. 떠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하라칸이 제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하라칸을 밀어내던 알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밀어내던 손을 내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여태까지 허둥대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제 어미를 닮아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빠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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