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 자작가 영애가 되다-32화 (32/248)

〈 32화 〉 암살 게임(4)

* * *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그러니까, 중대장 말이라면 저 이상한 상자 속에 여러 물품이 들어 있을 거라고?”

“응.”

“…신비성 있는 소리네.”

삼척 동자도 이 지도를 보면 생각할 것이다.

‘존버 해야겠다.’

그러나 식량도, 어떤 생존 물품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

이대로라면 얼마 못 버틸 뿐더러, 전쟁이 아닌 누가 더 배고픔과 잘 버티냐의 싸움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 지루하고 뻔한 훈련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저걸 가지는 자가, 아마 이번 게임의 승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저건 새로운 요소를 의도적으로 투입한 것.

아마 저 상자 속엔 많은 생존 물품이 들어 있겠지.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라든가.

꽤 오래 버틸 수 있는 양질의 식량이든가.

어느 쪽이든 꼭 필요한 물품이다.

저걸 빼앗기는 팀은 선택지가 하나로 줄어들테니까.

죽이되든 밥이되든 달려들어야한다. 식량이 없는데 버티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게?”

“저거 가지러 간다.”

“자, 잠깐만! 위험해.”

“그래! 레드 쪽에는 아르고스가 있잖아. 그는 초장거리 저격도 가능해.”

아무리 베아트리체라도 마나 없이 원거리 공격을 쳐내는 건 무리였다.

확실히 위험했지만.

“내가 아는 아르고스라면, 공격을 할 리는 없다.”

그녀는 단언했다.

아르고스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의 호기심을 믿어서였다.

저쪽도 지금쯤 굉장히 궁금해 할 것이다. 저 상자가 뭔지. 뭐가 들어 있을지.

‘암묵적 타협이다.’

베아트리체 자신이 나오는 건 일종의 신뢰의 표현이자, 요구였다.

‘아르고스 나와.’

라고 확성기로 크게 외치는 거와 같다.

물론 지능이 개구리 수준이라면 의미 없겠지만.

아르고스는 꽤 머리가 좋으니, 단번에 알아 들을 것이다.

그녀는 검을 들고 자리를 나섰다.

담판을 지을 예정이다.

**

“저게 뭐지?”

레드팀은 쑥덕거리고 있었다.

아르고스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자세힌 모르겠지만, 분명 필요한 물품일 거야. 아무 의미 없이 라이제르가 저걸 가져다 놨을 리는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저 상자가 뭔진 모르겠지만, 분명 필요한 물품일 거라고.

라이제르는 치밀한 타입이었다. 그가 쓸모 없는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 상자, 누가봐도 가져가 달라고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함정일 가능성은?”

“함정?”

“저 상자를 열면…”

진지한 목소리의 생도는 양 팔을 갑자기 크게 벌렸다.

“펑! 하고 터지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라이제르가 뭐하러 그런 짓을.”

“넌 베아트리체 첸치에게 맞아 본 적 없지?”

“어, 없는데?”

패자 측 생도였다.

그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을 뻔 했다더군. 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어. 그 끔찍한 고통이란….”

물론 구라였다.

베아트리체가 들고 있는 건 목검이었고, 그마저도 쥐꼬리만한 마나로 운영에서 큰 상처를 줄 순 없었다.

하지만 생도는 과장하며 썰을 풀었다.

“너덜너덜 했다고. 그런데 사제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살았지. 이번에도 같아. 저거? 내가 볼 땐 함정이다. 펑, 하고 터질 거야. 분명 자폭 마법진을 걸어놨을 거야. 살릴 자신이 있으니까. 죽진 않아도 게임을 질 수도 있다고.”

“너는 그게 말이라고 하냐?”

올해 들은 소리 중 최고의 개소리라고, 아르고스는 생각했다.

그래도 괜히 겁을 주니까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저게 뭐든 상관 없었다. 적이 먼저 가져가는 것만 막으면 되는 게 아닌가?

‘일단 지켜보는 쪽이 낫겠어.’

절대 저게 함정일까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아르고스!”

그때, 어떤 생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첸치가 나타났다. 홀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뭐?”

아르고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비켜봐.”

그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나무를 올라갔다.

정말이었다.

베아트리체 첸치가 달랑 검 한 자루들고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아르고스가 올라간 나무를 쳐다봤다.

‘…! 이 거리에서?’

400피트는 족히 넘는 거리였다.

게다가 이곳은 숲. 나무의 시야에 가려 보일 리가 없었는데…

베아트리체는 정확히 아르고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솔리드, 아르고스가 어딨는지도 알 수 있나? 분명 보고 있을 터인데.’

[이 전신 솔리드를 뭐로 보는 것이냐? 그 정돈 간단하지.]

‘여기?’

[아니다. 조금더 왼쪽으로… 그래, 거기 쯤이다.]

베아트리체는 아르고스를 향해 나오라며 손짓 했다.

그렇다.

이 거리에서 아르고스를 정확히 볼 수 있었던 건, 솔리드 덕분이었다.

‘오는군.’

오래 지나지 않아.

레드팀 쪽 진영에서 사람이 한 명 걸어왔다.

아르고스였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무슨 용건이야?”

그는 어느 정도 식별이 가능한 거리까지 온 뒤 멈춰서서, 물었다.

그녀는 손짓했다.

“너무 멀어. 가까이 와.”

아르고스는 씨익 웃었다.

“미쳤어? 네 ‘거리’에 다가가게.”

“…대화만 하려는 거야.”

“아주 잘 들려. 여기서 말하지.”

그는 고집을 부렸다.

베아트리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잘 안 들린다.”

“이런 베아트리체, 미안하지만 날 너무 만만하게 보지마.”

“그런 적 없다.”

“총 세 번이나 봤다. 네가 싸우는 걸.”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항상 일정 거리가 되야 움직이더군.”

“…그건 귀찮아서 그래.”

“먼저 움직인 적은, 내 기억으론 한 번도 없었어.”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라.”

“그래서 말이야, 난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 아, 일정 거리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군.’

맞는 말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적이 원거리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엄연히 많은 제한이 걸려 있는 상태니 말이다. 특히 마나를 아껴야 해서, 움직임에 마나를 투자할 수 없었다.

“이대로 날 불러 제압할 생각이었겠지만, 미안하군. 통하진 않을 테니.”

“겁쟁이.”

“…현명한 거라고 해줘.”

“겁쟁이.”

“…….”

“겁쟁이.”

“그만!”

‘그 계획은 버려야겠군.’

사실 아르고스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베아트리체는 기본적으로 이 상자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그를 부른 것도 있지만­.

다른 소기의 목적도 가능하다면 이루려 했었다.

바로 아르고스를 제압 시키는 것.

그가 방심한 사이, 빠르게 움직여 기절 시킬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가능했다. 옛날 클론에게 썼던 방법도 못 쓴다. 마나도 없을 뿐더러, 너무 멀리 있다.

“됐다. 본론으로 넘어가지. 겁쟁이처럼 거기서 듣던가.”

“…여기서 듣겠다. 잠깐의 자존심으로 마나 하트를 넘겨 줄 순 없지.”

“그래라 겁쟁아.”

베아트리체는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일단 열어보겠다. 동의하는가?”

“그래.”

상자의 부피는 컸다.

몰래 들고 튈 순 없었다.

그러려면 애초에 자신을 부르지도 않았겠지만.

아르고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상자를 쳐다봤다.

베아트리체는 터벅 걸어가 상자를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식량.”

“침낭.”

“여러 조리 기구가 있군.”

둘은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팀,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싸울래?”

“…….”

아르고스는 알고 있었다.

그것 말곤,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런 야만적인 방법은 꺼려졌다.

싸우는 건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전투 한 번이면 족했다.

이런 일로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했다.

‘조금 더 신사적인 방법이 없을까.’

안다. 어떤 피도 흘리지 않고 욕망을 통제할 순 없었다.

이 보급품은 중요했다. 여기서 보급품을 얻어가는 자가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클 정도로.

그러니 양 쪽 다 필사적으로 이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선택해라. 배고프다.”

베아트리체는 또렷히 아르고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지.”

아르고스는 선택했다.

그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에 낀 건틀렛이 차가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곧 영령의 힘을 끌어 올리자 그의 주변에는 불꽃이 휘몰아쳤다.

“우리끼리 승부를 보고, 이기는 쪽이 모든 걸 가져간다.”

­씨익.

베아트리체는 아르고스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자신 있는가? 나는 1:1은 어지간해선 지지 않는다.”

“원래라면 자신 없겠지만, 너도 사람이겠지. 저번의 전투로 힘이 많이 빠졌을 거야.”

“거리를 벌린 건, 내게 기습을 당할까가 아니었군. …네게 유리한 고점을 얻기 위해서였어.”

“맞아.”

“겁쟁이.”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가져가는 건 실력이야.”

아르고스는 그 말을 마치고 영령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 알려주지.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선, 상성은 무의미하다.”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녀는 바로 입을 닫아야했다.

­툭.

얇은 선 모양의 불꽃이 베아트리체를 공격했다. 그녀는 검으로 쳐냈지만, 불꽃은 흩어지기만 할 뿐 집요하게 그녀를 쫒아다녔다.

베아트리체는 날렵한 몸 놀림으로 불꽃을 피하며 생각했다.

‘불리하군.’

베아트리체의 실력을 알고 있는 아르고스는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어찌저찌 한 걸음 다가가면,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애초에 그녀에게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까다로운 견제 탓에 대놓고 달려들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은 계속 지속되었다. 이대로라면 베아트리체의 체력이 먼저 빠질 것이다.

[어린 베아트리체여, 전투의 승산은 낮다. 알고 있나?]

‘안다.’

[계약하자. 나와, 그러면 그대는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솔리드의 달콤한 속삼임이 이어졌다.

­후웅.

불쾌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약간 그을렸다. 이번엔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승산은 점점 한 자리 숫자를 향해 떨어졌다.

더 숫자가 낮아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두 걸음만 더 나아가면.’

현재 남아 있는 마나의 양으론 단 두 걸음만 전진하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아보였다. 아르고스는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베아트리체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그녀는 이젠 정말 승부를 봐야할 때라고 느꼈다.

방법이 단 하나가 떠올랐다.

이건 실전에선 쓸 수 없는, 오직 대련이기에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건.

두려움.

­탁.

지속된 견제를 받던 베아트리체는 땅을 박차고 아르고스에게 다가갔다.

아르고스의 눈이 커졌다. 가히 엄청난 속도였다.

그녀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신묘한 스텝이었다.

‘침착하자.’

아르고스는 불꽃을 컨트롤 했다. 일순간 당황했지만, 계산 안에 있는 행동이다.

­쐐애액!

전진하는 입장에선 필연적으로 틈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르고스는 그 틈을 노렸다. 불꽃이 베아트리체를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목적지는 어깨 부근. 효율적으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위치였다.

‘자, 이제 어쩔테냐 베아트리체. 이젠 피할 공간이 없을 텐데.’

아르고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띄웠다.

이겼다, 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순간—.

베아트리체는 아르고스의 불꽃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오히려 목을 가져다댔다.

‘…!’

아르고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영령의 힘이 들어 있는 불꽃이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꿰뚫을 정도의 절삭력은 당연히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죽는다.

대련에서 승리하려는 거였지,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아르고스는 많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꽃을 다시 되돌렸다.

­씨익.

그 순간 아르고스는 마주치고 말았다.

예상했다는 듯, 소름끼치게 웃는 베아트리체를.

‘소, 속았다.’

모든 게 의도된 행동이란 걸 깨달았다.

급히 아르고스가 다시 베아트리체를 노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툭.

베아트리체의 목검이 아르고스의 목에 닿았거든.

“비, 비겁하게!”

억울해하는 아르고스.

그녀는 그런 아르고스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다. 아르고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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