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센트럴의 역습(1)
* * *
세자 루엘이 모종의 ‘거래’를 받고 베아트리체에게 서신을 보낸 날.
안 그래도 묘연했던 센트럴이 의심스러운 행군을 보였다. 다수의 병력이 서부 전선으로 결집되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루엘은 애써 점령한 영지를 잃지 않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딱 베아트리체가 레이센을 공식적으로 처형한 날.
센트럴은 르네까지 치고 들어왔다. 그동안 잠잠 했던 게 이걸 노린 거였다는 듯이, 단 하루 만에 밀린 것이다.
“센트럴이, 드디어 움직였구나.”
“…전하. 현재 르네까지 점령된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
루엘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베아트리체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한 개의 온전한 사단과 지원군으로 보낸 대대까지, 전부 먹혔다.
상대의 병력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 개의 영지가 단번에 밀려버릴 줄은 말이다.
방심도, 기습도 말이 안 된다. 한 개의 사단 병력은 크다. 최소 한 주는 버틸 수 있었어야 했다. 끼고 도는 성이 세 개나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를 깊게 들어가보면 민란이 문제였다.
피란체 백작의 통치에 큰 부담을 느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성문을 활짝 열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세 영지 전부.
무능력도 이런 무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피란체 백작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뭐라 하던가.”
“보석금으로 1000 골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젠장.”
루엘은 그냥 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 피란체 백작의 생사 여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충성심과 직결된 문제였다. 귀족을 살리기도 위해 1000 골드도 안 쓰는 세자? 그따위 인물을 누가 따른단 말인가.
“…넘겨주게.”
“알겠습니다.”
루엘의 의견에 반대하는 귀족은 없었다.
1000 골드는 많았지만,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었다. 귀족의 목숨 값으로 천 골드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감이 있었다.
“르네를 다시 탈환하려면 얼만큼의 병사가 필요하지?”
“…보수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최소 2만의 병사는 필요합니다.”
“한 개의 군단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대쪽에서도 무리한 감이 있습니다.”
“4만이라 했던가?”
알려진 센트럴의 병력의 절반 정도 쯤 되는 병력이었다.
“그렇습니다. 서부 전선만 막을 수 있다면 이 전쟁은 끝이 날 거로 보입니다.”
총 병령을 한 개의 전선에 쏟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다.
서부를 방어만 하고, 다른 쪽을 밀던가.
서부에 전 병력을 집중해 끝내버리던가.
루엘은 생각했고, 최대한 손실이 적은 쪽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크라포스는 내전 다음 전쟁을 겪었다. 한 명의 병사라도 살리는 쪽이 중요했다.
“예정대로 서부엔 베아트리체와 아르델타인의 1군단을 파견한다.”
“예!”
“나머지 병력은 역공에 들어간다. 이번엔 왕실 기사단도 파견한다.”
“예!”
“이번 작전에 모든 걸 건다. 곧 추수하는 계절이다. 백성들이 고통을 더 호소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할 것이다.”
“예!”
귀족들이 일제히 답하며 명을 들었다.
회의의 마지막, 왕은 최후 통첩을 해야한다. 그 간의 회의 결과를 토대로 내리는 명령인 것이다.
즉, 왕명이었다. 왕명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아르델타인이 거구를 일으키며 씨익, 웃었다.
**
결국 얻은 거라곤, 의심 뿐이군.
베아트리체는 세자의 착잡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힘들다면 나름 힘들 게 탈환한 영지들이었다.
그걸 싹 다 꼴았다는 전언이었다. 쥐새끼 백작 꼴을 보니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빨랐다. 그 후로 일주일은 됐나?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미안하군.”
“됐습니다. 예상한 일입니다.”
베아트리체는 이미 이 사건을 예상하고 위험해지면 부르라 했다.
물론 생각보다 빨리 불렀지만 말이다.
하지만 루엘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탈환을 해봤으니, 두 번도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의 인간이다.
“…내 병사들은 어땠습니까?”
숨은 의도가 있었다. 저번에 말한 ‘포상’이었다.
루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기도 했고, 귀족들이 워낙에 반대를 해 무훈 훈장을 내릴 순 없었지만 내 사비를 털어서 포상을 내렸다. 자네와 한 약속이 아니던가.”
“…감사합니다.”
베아트리체는 만족했다.
그녀에겐 소소하더라도 ‘치하’를 세자가 직접 해주었다는 거에 집중했다.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긴 회의 끝에 결론이 나왔네.”
루엘은 품 속에서 무언갈 꺼냈다.
금으로 만들어진 견장이었다.
“…771 부대의 대대장. 베아트리체 첸치.”
“…?”
루엘은 손수 견장을 달아 주었다. 베아트리체는 정면을 응시했다.
“현시간부로, 771 부대는 17 연대로 격상 했으며, 그대를 17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저번에 신분을 올려줄 순 없다더니, 무슨 바람이 든 것일까?
“이렇게 갑자기 줘도 되는 겁니까?”
“…그만큼,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짊어지는 책임감만큼 따르는 지위가 있어야겠지.”
“…명을 내리십쇼.”
루엘은 뒷짐을 지며 말했다.
“조속히 르네로 가, 피란체 백작과 천 골드를 교환해 오거라.”
베아트리체는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끝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탈환이 가능하다면 하거라. 하지만, 무리하지는 마. 우리의 목적은 탈환이 아닌 방어다.”
루엘은 작전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아르델타인 후작의 1군단과 함께 서부 전선을 방어하고, 그 사이 남은 크라포스의 병력이 센트럴을 헤집는 계획이었다.
적은 최소 4개 이상의 군단으로 알고 있었다.
기존 서부 전선에 존재하는 3군단을 생각하더라도, 병력 차이가 두 배는 나고 있었다.
이는 센트럴보다 병력이 적은 크라포스의 사정상 어쩔 수 없는 배분이었다. 방어이고, 비록 크라포스의 병력이 센트럴보다 질이 좋다 하더라도 너무 적은 건 사실이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 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있는 전선은 패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 알겠습니다.”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한 번 하고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베아트리체.”
“예?”
“네게 준 심문관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루엘의 눈빛이 깊게 가라 앉았다. 베아트리체는 웃었다.
“네.”
**
“헉, 헉…!”
레이센은 미친 듯이 산을 뛰어 올라갔다.
그는 다급한 기색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먼 거리에서 아르고스 가문의 성이 보였다. 추격은 없었다. 아르고스 영주성은 고요했다.
‘…눈치는 못 챈 거 같아.’
레이센은 한숨 돌리며 숨을 골랐다.
문득,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렸다.
베아트리체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한참 후, 그는 어떤 의도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레이센은 본능적으로 침대 밑에 숨었다.
레이센은 어디갔지?
아마, 죽지 않았겠습니까.
하긴, 그 싸가지 없는 년이 살려두었을 린 없지.
자신의 아비가 하는 지독한 말을 듣고 말았다.
어차피 쓸모 없는 버러지였다. 에드워드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용도일 뿐이었어.
확실히, 도련님께선 크게 성장하셨습니다.
흥,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야말로 잘 된 처사 아닌가. 덕분에 세자의 의심도 벗었고.
레이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저 자신의 형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신뢰와 믿음의 말들이 전부, 거짓이었다고?
미련은 없다. 가자꾸나. 레이센의 시체를 찾으면 보고하지 말고 불태워라.
예. 알겠습니다. 헌데, 만약 살아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살아 있더라도……
죽여라.
레이센은 자신의 아비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침대 밑에서 숨을 죽였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가슴이 욱씬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얼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전부가 부정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르고스 후작, 자신의 아버지에게 치하의 말을 단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지난 날들.
후계자로 낙첨되고 위대한 아르고스가 되기 위해 피땀 흘려 이룬 경지들.
모든 게 의미 없어졌다.
[레이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나 그때.
솔리드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넌, 위대한 전신 솔리드의 유일한 계약자이다.]
‘솔리드님…’
[극복하거라.]
레이센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 죽을 순 없었다. 자신은 조금만 더, 살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대우한 가주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는 침대 밑에서 빠져 나왔다. 자신과 체구가 적당한 이를 찾아 죽였다. 옷을 바꿔 입은 뒤, 신분을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을 뭉갰다.
그리고 때마침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 급히 이리로 도망쳤다.
“하악, 학. 지, 진작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레이센은 나무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그는 울고 있진 않았지만, 슬픈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르고스 후작은 항상 이런 말을 했었다.
좀 더 뛰어날 순 없겠나? 네 형, 에드워드에게 자극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열심히 좀 하거라. 열심히. 요즘 들어 에드워드가 나태해졌다. 네가 못나서!
왜 넌 그것 밖에 못하냐고.
네 형에게라도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처음부터 모든 기준이 형인 에드워드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르고스로 태어난 이상 가문에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르고스 가문은 다른 가문과는 다르게 ‘낙오자’들에게 후한 편이다. 반드시 죽여야하는 룰도 없었고, 무작정 출가를 시키지도 않았다. 가주만 허락한다면 가문 안에서 적당한 요직을 받아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레이센은 후계자가 아닌 시절에서도 가문에 도움이 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던 거였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오늘 가주의 말로 깨달았다.
애시당초 가주는 자신을 에드워드를 위한 소모품. 말 그대로 ‘에드워드를 자극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그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난 분명, 방금 널 죽였다.
베아트리체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옳다.
아르고스로써의 자신은 아까 전에 죽었다. 가주는 ‘살아있더라도 죽여라.’라고 명했다. 그러니, 레이센 아르고스는 이미 그 순간 죽었다.
하지만 레이센은 살아있었다. 죽은 건 아르고스다.
“솔리드님. 날 버린 아르고스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베아트리체.]
솔리드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녀를 찾아가거라. 어린 베아트리체는 오는 이를 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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