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 자작가 영애가 되다-128화 (128/248)

〈 128화 〉 반역(1)

* * *

루스펠트의 눈이 분노로 차올랐다.

“…따라가겠습니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왕궁으로 처들어가 엎어버릴 기세였다.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의 음성은 서늘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

“대장.”

항상, 장난스러운 표정의 엘은 오늘만큼은 진지했다.

“말 해. 우리가 무얼 하면 되지?”

최상급 기사 두 명.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들은 당장에라도 손에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말했다.

“너희는 이곳에 남아, …정리해라. 곧, 부르겠다.”

베아트리체는 밖에 있는 페리루스 후작을 쳐다봤다. 기사들의 시선이 같이 이동했다.

무슨 의도인지, 그들은 깨달았다.

루스펠트와 엘은, 자신의 상관이자 연대장인 베아트리체에게, 당분간은 하지 못할 마지막 경례를 했다.

“충!”

베아트리체는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의 시선이 고정됐다. 원통한 표정이었다.

‘…세자의 선택이 궁금하군.’

[어쩔 생각이느냐?]

리라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떨어지진 않았다. 아이리는 옆에서, 입술을 가득 깨물고 쳐다보았다.

기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포승줄을 내밀었다. 베아트리체는 어떤 저항 없이 포박 당했다.

아이리는 슬픈 눈으로 리라의 눈을 가렸다.

1415. 1. 12.

서부의 영웅은 체포되었다.

죄목은 반역죄였다.

**

“이럴 순 없습니다. 각하.”

아르델타인 후작은 분개했다.

“이 세상에 영웅을 이리 홀대하는 나라가 어딨단 말입니까.”

“…….”

그 앞, 아르반체코 공작은 차분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일어서야 합니다. 아니면, 각하께서 나서주십시오.”

“…안 된다.”

탁.

찻잔을 내려둔 그는 말했다.

“아르반체코는 왕실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이 나라를 망국으로 향하는 길이더라도 말입니까?”

“…그래.”

“…한 마디면 됩니다. 각하께서 입을 열면, 제아무리 패권을 잡으려는 스코필드 국왕도 감히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르반체코가 할 역할이 아니다.”

“각하의 역할을 무엇입니까? 허구언날 풍경이나 관찰하며, 이곳에 앉아 있는 게 공작 각하의 역할입니까?”

“정확하군.”

“각하!”

아르델타인은 불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심장은 언제나 뜨거웠다. 그의 기준에선 최근 있었던 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16세의 소녀.

그 작은 손으로 이루어낸 것은 찬양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나라는 치하는 못 해줄 망정 그녀를 모질게 대했다. 반역죄라니. 세상 어느 반역자가 국가를 위해 달랑 검 하나를 손에 쥐고 수만 대군의 틈으로 뛰어든단 말인가.

이건 어거지였고,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르반체코 뿐이었다.

아르델타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이 고집 불통 공작의 마음부터 돌려야 한다. 하지만, 그는 서운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안다.”

“예. 당연히 알겠지요. 크라포스의 현자라 불리는 게 각하이신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서셔야죠. 어린 소녀가 지금 떨고 있지 않습니까.”

“…베아트리체가?”

“그야, 당연히…!”

“아니. 그녀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

아르반체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헤아렸다. 신비의 마법을 다루는 아르반체코 가문. 그의 통찰력은 예지라 칭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판단하기에, 크라포스의 미래는…

밝았다.

잘 흘러가는 바다의 물살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게 그렇게 원망스럽느냐.”

“…예. 수호의 가문이라, 한 걸음 내딛기 어려운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대의의 싸움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새끼들이라면, 베아트리체를 존중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나는 가만히 있겠다.”

“젠장! 오늘따라 앵무새랑 대화하는 거 같습니다.”

아르델타인은 다리를 떨었고. 아르반체코는 그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탁탁 쳤다.

“뭐라 해도 내 태도는 바뀔 일이 없다.”

“…내가, 각하의 마음을 돌리려 한 게 잘 못이지요. 이런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

“그러나.”

아르반체코는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말리겠다곤 안 했다.”

“…예?”

그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르델타인.”

“…예.”

“넌, 너의 길을 가라.”

“…!”

“아르반체코는 지난 300년간 크라포스의 왕실을 지켜왔지만, 아르델타인도 그 길을 가야할 이유는 없다.”

아이리도, 마찬가지고.

카르드는 마지막 말은 삼켰다.

아르델타인 후작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어떤 결심을 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

**

크라포스의 민심이 심상치 않았다.

“그거 들었어? 이번에 깨어난 국왕이 서부의 영웅을 반역죄로 집어넣었대.”

“뭐? 그게 정말이야?”

베아트리체의 수감 소식은 크라포스 전역에 퍼졌다.

그녀의 민심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게, 세자가 직접 나서서 홍보 대사로서 베아트리체를 알렸으니 말이다.

그녀가 최전방에서 같은 영지를 두 번이나 탈환한 건 전설로 취급되고 있었다. 전쟁의 공이란 게 원래 백성들에게 퍼질 때는 배는 과장돼서 퍼진다. 베아트리체는 혈혈단심의 몸으로 5만의 병력을 홀로 썰어버린 영웅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녀에 관한 무훈시가 유행이었고, 어느 주점을 가도 베아트리체 전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특히 지금, 솔리드 교단에서는 성녀가 아닌지에 대한 논의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교황님. 이제, 나서셔야 할 때입니다.”

교황을 모시는 12 추기경 중 한 명, 쿼츠가 말했다.

크라포스는 조금 독특하게 교황의 권위가 낮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개중 가장 큰 건, 솔리드 교단의 교황은 무조건 ‘여자’만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서 여자의 권위란 말해야 입만 아플 뿐.

물론 단순 교황이 여자라서 교단의 위치가 낮은 것만은 아니었다.

솔리드 교단도 힘이 강할 때가 있었다. 마도 시대 때였다.

성녀는 대체적으로 ‘솔리드’의 화신이라 불린다. 전신 솔리드의 화신이다보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이 특징이다.

그렇게 강한 존재가 뒷받침 했던 마도 시대 때에는 교단의 힘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마도 시대 이후,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성녀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솔리드 교단에게 성녀는 중요한 존재였다. 아무나 막 뽑을 수 없었다. 단순 교황이 ‘오늘부터 너 성녀’라고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선 인물을 찾아야한다. 상당히 강한 무력의 소유자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인물.

그리고 제단으로 데려와 한 달 밤낮으로 같이 기도를 해야한다. 언제까지? 전신 솔리드가 응답할 때까지.

문제는 인재의 기준이 높았다. 400년 전 마도 시대. 솔리드 교단의 성녀는 기록으로 봤을 때 마스터였다.

여러 인재를 데려왔다. 그중엔 최상급 기사에 이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솔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솔리드 교단 내부에선 최소 ‘마스터’는 되어야 솔리드가 응답할 거라 예상했다.

성녀니까 성별은 여자여야하고.

수준은 마스터거나, 그에 이를 만한 재능을 가진 이.

그리고 한 달 동안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인내심.

성녀니까 인성도 훌륭해야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있을까? 차라리 사막 속에서 금덩어리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렇게 솔리드 교단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솔리드 교단에선 중대한 회의가 하나 열렸다.

그들은 베아트리체의 수감 사건이, 솔리드 교단을 살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 어쩌면 유일한 기회입니다.”

쿼츠는 깍듯이 말했지만,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듯 두 눈은 확고했다.

교황, 엘라는 소심하게 말했다.

“…그치만, 솔리드님이 그걸 원할까.”

“…교황니이임!”

추기경 아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는 고구마를 100개는 먹은 표정이었다.

“빨리 베아트리체 경을 잡아와야 한다구요! 솔리드님도 교황님 보면 암 걸려서 죽을 거예요!”

“맞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베아트리체 경이 수도에 있을 때, 당장 빼내야 합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우리 교단의 유일한 권위, 성녀 간택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조건이 너무 괴랄하여 반쯤 포기하고 있던 성녀 찾기.

그러나 최근 베아트리체란 인물이 급부상하면서 강력한 후보로 거론 되고 있었다.

조금 늦긴 했다. 능력이 되어도 성녀니까 성품이 훌륭해야한다. 검증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베아트리체의 성품은 뛰어난 걸로 판단 됐다. 센트럴에서 보인 행동은 그야말로 성인(成人)이었다.

이정도면 입맛 까다로운 전신일지라도 만족할 터였다. 남은 건 교황이 직접 찾아가 애걸복걸 하는 방법 뿐이다.

“그, 그치만… 한 달 기도는 저도 드리기 힘든데.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어요.”

“으아아악!”

“아, 아리아! 죽지 마라!”

아리아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베아트리체는 강력한 후보여서, 무조건 성녀 간택을 시도해야하는 자였다. 문제는…….

이번 교황, 엘라는…

“자신 없는 걸요… 저는 지금까지 친구도 한 명 사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베아트리체님처럼 훌륭한 사람을 회유 하겠어요.”

…찐따 중에, 찐따였다.

­시무룩.

엘라의 안 그래도 좁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죄송합니다 교황님.”

“…네에?”

“…베아트리체 경 데려올 때까지, 교단에 돌아오지 마십쇼.”

“!!”

­폭.

엘라는 쿼츠의 품에 안겨 교단에서 쫒겨났다. 그녀는 죽을 상을 지었다. 밖에 나오니 벌써부터 속이 울령거렸다.

**

베아트리체는 차가운 감옥에 수감 되었다. 이번엔 별장에 가두지도 않았다. 어쩌면, 사형을 선고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습니다. 전하.”

그녀의 앞에는 씁쓸한 표정의 루엘이 서있었다.

“…미안하다.”

“…배가 고프면, 나 혼자 탈출할 겁니다.”

차가운 감옥에 수감된 그녀였지만, 기세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특유의 고집스러운 표정과 그에 대비되는 청명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필요하다.”

베아트리체는 루엘을 쳐다보았다.

“이번 사태에 반발하는 귀족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회유하려면, 조금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아트리체.”

루엘은 확답을 주었다.

“면목 없지만, 나를 믿어주거라.”

베아트리체는 결과에 따를 생각이었다.

사실, 그녀를 수감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었다.

베아트리체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당당히 두 발로 감옥을 나설 수 있었다.

다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내 병사들을 버릴 수 없지.’

그녀가 짊어진 게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함부로 모두를 죽이고 탈출한다면, ‘대역 죄인’ 부대장의 부대원이 되는 거니까. 그건 명예롭지 않았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줄 생각이 없었다.

떳떳한 방법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려면 세자를 믿는 방법 뿐이었다.

‘내 믿음을 저버리지마라. 세자.’

베아트리체는 그런 눈으로 루엘을 한참이나 쳐다보다 말했다.

“믿겠습니다.”

“…….”

“이제 가십시오. 국왕이 의심스럽게 볼지도 모릅니다. 난 잘 지내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하려는 일을 제대로 하십시오. 전하가 할 일은 그것 뿐입니다.”

실제로 베아트리체는, 차가운 감옥 바닥을 제외하곤 괜찮았다.

기사들에게 있어 베아트리체는 선망과 존경의 대상. 함부로 대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알겠다.”

루엘은 결연히 말하며, 천천히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혼자가 된 베아트리체는 기지개를 펴며 차가운 바닥에 덩그러니 누웠다. 감옥은 좁았지만 그보단 베아트리체가 더 작았다. 딱 안락한 사이즈였다.

[잘도 적응하는구나.]

‘놀리지 마.’

[…설마 그러겠는가. 마음이 아플 뿐이다.]

‘…….’

[그러니까 진작에 나랑 계약….]

‘죽인다.’

[난 신이여서 안 죽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무료함은 솔리드가 좀 달래주었다. 그녀를 독방에 수감했지만 솔리드와는 분리 시킬 수 없었으니까.

하릴 없이 솔리드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베아트리체.

그녀는 그때,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빼꼼.

반쯤 머리를 내밀고 있는 어떤 소녀였다.

“…꼬마야.”

“!!”

마스터인 베아트리체가 그 기척을 놓칠린 없었다.

베아트리체의 머리보단 옅은, 백금발의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성의 없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진 몰라도, 위험하니까 가라.”

“……닌데.”

“…?”

“꼬마, 아니거든요….”

누가봐도 꼬마였다. 베아트리체는 눈을 끔뻑거렸다. 베아트리체보다 살짝 큰 체구의 소녀는 창살 앞으로 걸어왔다. 겁을 잔뜩 먹은 걸음 걸이였다.

“저, 교, 교황… 인데요.”

“…….”

베아트리체는 솔리드에게 물었다.

‘교황 사칭죄는 벌이 뭐냐?’

[글쎄, 잘 모르겠지만 사형 아니겠는가.]

‘사형을 시키기엔 어리군.’

[아니다. 베아트리체.]

솔리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쟤, 진짜 교황 맞다.]

구라.

베아트리체의 동공이 잔뜩 커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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