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대관식(4)
* * *
정말이었다.
국왕의 시신을 보관해둔 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게… 경비를 서던 이의 말에 따르면, 분명 계속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
“저, 정말입니다! 똑바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에…….”
베아트리체는 팔짱을 끼고 아이리를 불러오라 명했다. 경험상, 이럴 땐 마법으로 알아보는 게 최고였다.
“젠장,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루엘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국왕의 시신이 사라지다니.
아직 대관식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지금 사라지는 건 곤란했다. 물론, 정적들은 전부 쳐냈기에 루엘의 대관식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다른 게 문제였다.
왕족의 피는 그 쓸모가 많다.
예를 들면,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대도서관 기록실, 온갖 역사가 담긴 서고, 수 백 년을 모아온 보고들을 모아놓은 창고. 그것들의 자물쇠는 왕족의 피로만 열 수 있었다.
불순한 자들에게 국왕의 시신이 들어가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루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든 걸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가 발목을 잡다니.
‘그러니까, 네 말로 따지면 큰일 났다는 소리군.’
[그렇다. 어린 베아트리체여. 이는, 크라포스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다.]
베아트리체 역시, 방금 솔리드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 심각해졌다.
그녀는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국왕의 권능으로 혈족의 피를 제할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서고들의 위치는 전국에 흩어져 있어. 이번 일로 왕실 기사단의 인원이 대폭 줄어서, 경비를 설 인원이 부족한 게 문제야.”
루엘은 고심하는 눈치였다.
베아트리체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베베 꼬았다. 그녀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구리군. 그것도, 상당히 구려.’
뭔가 아슬아슬하게 생각이 날 듯, 나지 않는 기분.
국왕의 시신이 사라졌다.
원래라면 하등 가치 없는 시체지만, 이곳에선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베아트리체 생각엔 그런 놈들, 크라포스엔 이미 싹 다 착해져서 없다.
‘또 제국인가?’
구린 내엔 항상 제국이 있었던 게 떠올랐지만, 그들이 재물 좀 훔치자고 이런 짓까진 하지 않을 거 같았다. 뭐가 필요했으면 진작에 달라 했겠지.
베아트리체는 ‘시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시체를 활용하는 놈들은 딱 한 부류였다.
“설마. 그 코쟁이랑, 꼬마?”
“뭔가 집히는 게 있는가?”
“…그 죽은 놈들 살리는 애들 있잖습니까.”
아르고스 사건 때 마주했던 이들.
‘이름이 아마, 미야라고 했었나.’
흑마법을 쓰는 어린 꼬마가 생각났다.
“네크로맨서.”
“…네크로맨서?”
“모릅니까?”
“생전 처음 듣는군.”
‘이곳에선 그 단어가 없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크로맨서가 뭔가?]
별에 별 게 다 있는 세상에, 이건 없구나. 솔리드가 디아블로는 안 해봤나 봐.
베아트리체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말했다.
“저번에 보고 드린 아르고스 사건 때, 갑자기 나타난 이들 말입니다.”
루엘은 생각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 흑마법사를 말하는 것인가.”
‘흑마법사라고 하나 보군.’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세한 건 아이리가 와봐야 알겠지만, 내 촉이 그렇습니다. 단순 도굴꾼일 거 같진 않습니다.”
“일리 있다. 확실히, 의심 가는군.”
“…이거 국왕도 살리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루엘은 고개를 저었다.
“살려도 아무 의미 없다. 이미, 백성이 보지 않았느냐. 국왕이 내 손으로 시해되는 걸.”
“대관식은 무리 없는 거군요.”
‘참, 빌어먹을 세상이야.’
죽은 이가 버젓이 살아 돌아다닐까 걱정하는 세계라니.
농담으로라도 정상이라곤 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고심하는 세자를 위로 하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아이리가 도착했다.
“…정말인가요? 국왕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게.”
“거짓이라고 믿고 싶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선 흔적을 확인해볼게요.”
아이리는 국왕이 있어야 할 관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백색의 빛 무리가 흘러나왔다.
“Trouvez des traces(흔적을 찾아라).”
긴장된 기색으로 그걸 지켜보고 있는 루엘과 베아트리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리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읏.”
“아이리!”
“괘, 괜찮아요.”
그녀는 약간의 충격을 입은 듯 비틀거렸다.
“…쉽지 않은가?”
“이건, 제힘으론 아직 무리에요.”
그녀는 우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파파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일이 꽤 복잡해짐을 느꼈다.
베아트리체는 입을 열었다.
“외숙… 아니, 아르반체코 공작은 어딨지?”
“파파는……”
아이리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말했다.
“어딨는지 아무도 몰라요. 벌써 한 달째 아무 소식 없는 걸요.”
‘조카는 여기서 개고생 중인데. 외숙부라는 인간이.’
베아트리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어딨는진 몰라도, 만나면 한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전하.”
베아트리체는 루엘을 바라보며, 아마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전했다.
“제가 직접 찾아보겠습니다.”
**
뚜벅.
알프스 산맥 초입.
검은 코트를 입은 백색의 남자가 숲 속을 거닐었다.
카르드 아르반체코였다.
탁.
그는 어딘가에서 멈췄다.
나무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카르드는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여기군.”
그는 손을 뻗었다.
바사삭.
나무는 어떤 저항 없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카르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있어야 할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잠깐 반짝이더니, 작은 병이 하나 나왔다.
카르드는 나무의 재를 병에 담아, 다시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사라졌다.
‘최근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카르드는 현재, 크라포스에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일을 조사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찾았다.
그가 최근 수도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이유였다.
한 달 동안이나 이 기묘한 사태를 조사 중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거라곤 몇 가지 있었다.
‘이 땅에, 강대한 흑마법사가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생명력이 고갈된 나무.
곳곳에 실험한 듯한 흔적.
아마 제국의 계획일 터인 흑마법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카르드는 이 모든 것들이 꽤 오랫동안 준비되었던 것이란 걸 깨달았다.
좀처럼 나서지 않는 성격인 카르드.
그러나 그는, 이번 아르고스 사건에서 큰 심각성을 느꼈다. 신에 권위에 도전하는 제국, 그 신의 실험장으로 크라포스가 선택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왔다.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물론, 언제나처럼 크라포스에 대한 위협은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 할 것이다.
그것이 아르반체코의 규율이었다.
“Trouvez des traces(흔적을 찾아라).”
카르드의 마나가 길게 늘어졌다.
이 나무의 생명력을 없앤 장본인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의 흔적이 육안으로 뿌옇게 보였다.
카르드는 굳은 안색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라이카노프. 그대는 정녕,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 하는가.’
신이 되려는 황제.
어리석었지만, 아르반체코에겐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황제가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룰 장소로 크라포스를 선택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아르반체코는 크라포스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수사의 목적은 그거 하나였다.
황제에게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네가 뭘 원하든, 크라포스에선 이룰 수 없다.’
다행히, 때는 늦지 않았다.
아르반체코는 그들이 죽은 이를 살리기 위해선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게 무엇인진 정확히는 모르나, 알 수만 있다면 또 있을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몇 번 제지하면 그들도 깨달을 것이다.
‘신의 실험장’으로 크라포스는 적합지 않다고.
오직 그거 하나면 됐다.
“이제 나오는 게 어떤가.”
“…….”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자는,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엿보는 이는 없어.”
카르드는 멈춰 서서 말했다.
산맥의 정상. 넓은 평지와 함께 사방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딱, 마법사인 그가 싸우기 좋은 지형이다.
그 안갯속에서 어느 한 남자가 나오며 말했다.
“크라포스에선 체코의 눈을 피할 수 없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제국의 마스터가 여긴 웬일인가. 한참, 전쟁 준비로 바쁠 터인데.”
“자네도 알잖아? 마스터라고 해봐야 허울뿐인 것을. 이 경지에 오르면 좀처럼 싸울 일이 없지.”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인가.”
카르드의 눈에 살기가 담겼다.
“칸.”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스타일처럼, 그는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정상인은 아니었다.
“고맙네. 두 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 짧은 이름 하나 못 외우더니.”
그는 황금의 창을 등에 지고 카르드에게 다가왔다. 뭐가 즐거운지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라.”
“오랜만에 봐도 이기적인 친구군. 나만 그대의 ‘범위’에 들어가 있으라고?”
어깨를 으쓱거린 칸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좋아. 뭐, 싸우러 온 건 아니니까.”
“크라포스는 제국에 이빨을 드러낸 적이 없다.”
카르드는 핵심부터 물었다.
“제국은 크라포스를 왜 삼키려 드는가.”
“이미 다 알고 있네?”
“내 권능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칸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체코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하면 안 된다고 말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라고.”
“…딱히 숨기지 않는군.”
“자네가 움직인 이상, 이 비밀이 파헤쳐지는 건 순식간일 테니 말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직접 담판을 짓는 게 낫겠더군.”
그는 한가로운 태도로 인근 바위에 몸을 걸쳤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생각보다 성능이 구려. 이게 본질적인 문제가 있단 말이지?”
논점이 어디인지 모를, 애매한 소리였다.
알아서 이해해 들으라는 듯 굉장히 불친절한 어조였다.
“…….”
“아무래도 그 꼬마의 능력이 아직 너무 약한 모양이야. 강한 조력자가 필요한데, 자네도 알다시피 마법 쪽 인재가 제국엔 없으니까. 있더라도 아르반체코를 따를 이가 없지.”
카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이도 아닌, 감히 자신을 회유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어리석군.”
“맞아!”
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수를 쳤다.
“그게 문제야. 너무 어리석어. 죽은 자를 살리면 뭐하는가? 광기에 찌들어서, 지능이 원숭이보다 못한데.”
카르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자신을 회유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정보를 내놓고 있었다.
그는 극히 경계했다. 마나를 넓게 퍼트려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자가 있는지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꽁꽁 싸매던 비밀을 알려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궁금해 하길래, 알려줘도 까칠하군그래.”
칸은 그걸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뭘 원하는 거지?”
“죽은 이를 소생하려면 미리 작업을 좀 해야 하는데, 이게 말이야? 사람의 극단적인 사고를 부각해 정상적인 행동을 못하게 만들어. 너무 티가 나잖아. 이래서야… 신은커녕 악마도 되지 못해.”
칸은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놨다. 주어가 빠져 있고 전혀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태도.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 카르드는 무감각하게 답했다.
“단계가 있는 법이다. 신이 되고 싶다면, 악마부터 되어야겠지.”
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능력 문제란 건가?”
“자격도 갖추지 않은 너희가, 신이 되기엔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이 진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마법은 자네를 못 따라가는군. 제국으로 오지 않겠나? 이 계획 말이야, 자네만 있으면 금방……”
콰앙!
칸의 귀 옆으로 강력한 마법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조짐도 없는 마법. 카르드의 주특기였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거참, 농담 하나 한 거 가지고 더럽게 까칠하긴.”
“본론부터 말해라. 나에게 그 비밀들을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성격도 급하고 말이야. 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라포스를 고작 ‘실험장’으로 쓰긴 아깝다는 제국의 결론이다. 이번 계획을 진행하면서 크라포스엔 더 좋은 쓰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좋은 쓰임?”
“자네는 크라포스를 지키지. 그러니까, 우리 계획이 어떻든 크라포스만 무사하다면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칸은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계약 하나 하지 않겠나.”
“…계약?”
“금기 하나만 걸지. 서로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먼저 건든 건 그쪽이다.”
“그러니까, 그만하자는 소리야. 이건 서로에게 좋지 않거든. 제국은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고, 크라포스는 목숨을 부지하고 싶잖아?”
“협상을 원한다면, 자세히 말하라.”
카르드는 싸늘했다.
그럼에도 칸은 빙긋 웃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크라포스를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일 작전이다. 우리 동맹국이지 않나? 이게 더 상식적이고, 효율적이야.”
“…그건.”
“그건 자네 역할이 아니라고? 그런 말 할 줄 알았지. 내 대답도 마찬가지다. 그건 정치하는 양반들이 해결할 문제고. 내가 그대에게 할 제안은…”
칸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오른손은 내민 채였다.
“그대는 이 사건의 뒤를 파는 걸 멈춰. 그럼, 제국은 적어도 일 년 동안은 크라포스에 일절 손을 대지 않지.”
물론, 방금 자네가 내게 들은 말들을 침묵하는 것도 계약 조건이야. 어때 나쁘지 않지?
칸이 말하자, 카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들은 순간 이미 답을 정해놓았다.
‘…나쁠 게 없다.’
제국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카르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