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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황, 자작가 영애가 되다-172화 (172/248)

〈 172화 〉 과거, 그리고 결심(2)

* * *

“정말 빌어먹을 인간이네. 그 인간!”

솔리드는 순수히 분노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얼마나 힘들 게 굴었으면, 그 형이란 사람이 그런 선택까지 했겠어.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그 인간은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베아트리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이라면 그랬겠지만, 그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 그럼?”

“이정도도 버티지 못했으니,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살다보면 시련이란 게 있을 것이고,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그건 필연이었지. 차라리 더 큰 고통을 받지 않고 일찍 죽어서 다행이라고 하더군.”

솔리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사람… 악마야?”

“그럴지도 모르겠군.”

베아트리체의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실패작이었던건가. 아쉽군, 능력은 좋았는데. 정신력이 강하지 못했어.

­…….

­그거 아느냐? 난 네 형보다 널 더 믿고 있었단다. 능력은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넌 노력을 하잖니.

사람이 할복을 하며 죽었다.

철저히 남이 그러는 걸 보았어도 충격을 받을만한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었다.

자식이 보는 앞에서 칼로 배를 그어 죽었음에도 부모인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아이는 어떤 충동을 느꼈다.

형이 느꼈을 고통을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단 충동.

­노력도 재능이지. 그 근성과 고통을 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어쩌면 단순 머리가 뛰어난 것보다 더 대단한 재능이다. 아들, 넌 분명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태산 같이 높아보였던 아버지.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그 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 속에 숨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읽었다.

그렇다. 그는 두려워보였다.

자신의 남은 유일한 실험체 하나도 똑같은 결과로 남을까봐.

그렇게 되면 무능을 인정하는 꼴 밖에 되지 않으니까.

4월.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던, 이미 죽어가고 있던 베아트리체에게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

그저 배가 고파, 먹을 걸 배불리 먹는 게 전부였던 아이는 증오란 감정을 배웠다.

형의 과업을 그대로 이어가야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14살이 되던 해.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그날.

아이는 식칼을 하나 들고 아버지의 침실로 향한다.

­아빠.

­…….

­아빠. 일어나 있는 거 알아요.

­…너.

­난 형이랑 달라요. 사실 형이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을까. 그럴 힘으로, 그럴 용기로 당신을 죽이면 되는 건데.

아이는 식칼을 들었다.

아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목을 찔렀다.

역수로 쥔 식칼엔 힘이 실렸다. 중학생만 되어도, 성인은 칼을 든 아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수차례 찔러냈다.

어떤 감흥도, 희열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냈다.

침대와 바닥이 피로 흥건해질 무렵.

아이는 문득 두 가지를 깨닫는다.

어떤 재능도 없을 줄 알았던 자신에겐 사람을 죽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 신은 없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데도 안 나타는 걸 보면.

신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아이는 확신했으나.

신은 아이의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나타났다.

[내 이름은 가브리엘. 소년이여, 나와 계약하겠나?]

아이는 놀랐다.

[대답해라. 한 마디면, 대천사인 내가 네 후원인이다.]

그는 자신을 성좌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신의 대리인이라고도 덧붙였다. 자신의 뜻이 신의 뜻이니, 영광스러워하라며 명했다.

그리고 선택받았으니 넌 축복 받은 존재이며.

어떤 인간도 진짜 신을 성좌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신에게 선택 받은 인간은 천 년만에 처음이니, 감사히 여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그건 정해져 있었다.

신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

아이의 뇌리에선 완벽히 지워진 후였기에.

­꺼져.

아이는 신을 증오했다.

증오하는 존재와 계약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이에게 있어 증오하는 존재는 죽여야할 대상일 뿐이었다.

자신의 아비처럼.

그 이후로 아이는 악착 같이 살았다.

검을 한자루 쥐고 죽어라 노력했다.

다행히 일말의 재능이 있었지만, 아이는 알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말했던 아비가 말했던 재능. 바로, ‘노력’하는 재능.

그게 있던 덕분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증명했다.

­내가 검황이란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성좌와 계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필요 없었다.

신이 없더라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으며, 어쩌면 신은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지만.

업적을 쌓으면 쌓을수록, 베아트리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사람들을 귀기울였다.

그러나, 오래가진 않았다.

인간의 한계인 것일까.

그는 결국 어떠한 벽을 넘지 못했다.

[이봐. 이제 슬슬 계약하지 그래?]

삶의 마지막 순간.

[곧 있으면 너는 죽는다. 그러나, 나와 계약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더한 업적을 쌓아 성좌가 될 수도 있겠지. 너는 계약을 하지 않아야 성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엄연한 착각이다. 나는 네게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권유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신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나와 계약하겠나? 어린 소년이여.]

베아트리체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인간보다 신과 가깝게 지냈다면 지냈기에.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다만, 베아트리체는 ‘신’을 믿지 않을 뿐이다.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마디면 된다. 여전히, 그건 같다. 너는 증명했다. 신이 없어도 인간이 강해질 수 있다는 걸. 그러나, 인간에겐 신이 ‘필요’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베아트리체의 대답은 같았다.

고집이라 해도 좋고, 아집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그것을 신념이라 불렸으니, 남의 시선은 전혀 생각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었다.

­꺼져라.

그렇게 베아트리체는 죽었다.

끝까지 신을 부정한 채.

어쩌면 어리석은 인간의 최후일지도 몰랐다.

“근데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사이가 안 좋긴 하지만 난 그 정돈 아니라고 베아트리체.”

다시 현실로 돌아온 베아트리체는 솔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했다.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거라고.”

“…꼭 나보곤 그런 자가 되지 말라는 거 같아서. 오해할까봐 하는 소리야. 난 가정적인 신이야. 내 딸을 사랑하고 아끼지. 설마 그렇게 파렴치한 신으로 본 건 아니지?”

“그럴리가. 고작 사춘기 앓고 있는 아이의 부모에게.”

“그럼 이 이야기는 왜……”

베아트리체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때,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어?”

“그정도로 죽는다면,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삶은 가치 있는 자들의 것이야. 그게 부담된다면 확 뒤져버리는 게 인류에게 더 도움이 된다.”

“진짜, 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얘는. 오만하다 베아트리체. 가치는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

솔리드는 화가 나 보였다.

베아트리체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달라졌으니 혼내지 마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슴켠에 놓아둔 머리끈을 하나 꺼내 머리를 묶었다.

베아트리체의 하얀 목선이 드러나며, 금새 깔끔해졌다.

“너희가 항상 바보라고 놀리지만, 나도 보고 듣고 배우는 게 있으니까. 덕분에 나도 공감이란 걸 해보는군.”

“정말…?”

베아트리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왕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겠느냐.”

“베아트리체는 열심히 살고 있어. 그건 신인 내가 보장할게.”

“나를 위해선 열심히 살았었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응?”

“지키고 싶은 이들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이제서야 인지를 한 것도 웃긴 일이다.

“힘이 생긴 이후론 처음이군. 어쩌면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어.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힘드니까. 나 하나 고사하며 살기도 버거운 게 인생 아니던가?”

“꼭 날 탓하는 것처럼 들리네."

“난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내 올곧은 신념이지. 그저, 주어진 조건하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은 그 범위가 넓어졌을 뿐이지만.”

베아트리체는 단호하게 말했다. 검을 뽑고 어딘가를 겨누었다.

제국이었다.

“얄궂은 병정 놀이는 이걸로 끝이다. 지금부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어?”

솔리드는 당황했다. 베아트리체는 개의치 않았다.

“두 달 동안 금식을 선언한다. 알렉스의 제안에 응하지.”

‘근데 베아트리체…… 고작 금식한다는 게 그렇게까지 결연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내 고민 상담은?

그러나 솔리드는 차마 따질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꼭… 마왕을 잡기 전 용사의 다짐처럼 초연해서.

**

“조건이 몇 개 있다. 알렉스.”

베아트리체와 알렉스는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협상이라 칭하기엔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한 명은 주장했고, 다른 한 명은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였으니까.

“그게 무슨 조건이든 받아 들이겠습니다. 성녀님과 기도를 드릴 수만 있다면야.”

“…그래도 들어는 보지 그래.”

‘대체 이놈은 왜 나랑 기도 하는 거에 집착인 것이냐.’

베아트리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광신도를 일반인의 범주에서 이해하려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예. 들어보겠습니다.”

알렉스는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철야기도인지 뭔지, 그거 한 명 더 참관해도 되는가?”

“당연히 신도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지요. 다만… 괜찮겠습니까?”

“뭐가?”

“우리들의 수준과 맞지 않는 자는 다소 힘들 수 있습니다.”

“수준? 신앙적인 수준을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검술 실력입니다.”

“?”

‘기도하는데 뭐가 힘들다는 거야?’

도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기도는 그냥 하면 되는거지, 검술 실력이랑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역시 광신도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베아트리체는 전생에서도 지독한 종교 쟁이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이럴 땐 대충 넘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알렉스.”

“저는 상관 없습니다.”

“좋다. 그럼 마지막 제안을 하지.”

“무엇입니까?”

“기도는 솔리드 교단에서 한다. 크라포스로 가줄 수 있겠나? 내가 그곳에서 할 게 좀 많아서 말이야.”

“아. 그야 물론입니다. 어차피, 귀화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알렉스는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떨떨에, 베아트리체는 제국행 한 번으로 마스터를 데려와버리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한편, 크라포스 왕실에선 국왕 루엘이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전하, 지나가다 인재 한 명 주워왔습니다.

[성기사 알렉스 귀화 요청서]

­신분증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작위도 적당한 걸로 주시고. 물론, 저보다 높으면 안 됩니다.

“…참고로 알렉스란 이름을 쓰는 라의 교단 성기사는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 자가 맞습니다.”

“제국 서열 4위 마스터. 난 그를 떠올리고 있네만.”

“예. 정확하십니다.”

루엘은 세바스찬을 쳐다봤다.

세바스찬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하하.”

루엘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얼굴을 쓸어올렸다.

“베아트리체도 참, 농담이 늘었군. 어느새 이리도 컸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베아트리체… 아니, 성녀께서 좀 짖궂으신 듯 합니다.”

“…그런데 왜 난 진짜 같지?”

루엘은 왠지, 농담이 아닐 거 같은 직감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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