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12명의 기사(3)
* * *
조롱하는 듯이 써있는 팻말을 그렇다치고, 베아트리체는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기운에 화가 날 정도였다.
“누가… 이랬을까요?”
아이리가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검은 가루를 손으로 만졌다. 마디 사이로 힘 없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진 이 ‘가루’가, 어쩌면 사람의 가루일지도 모른다고.
“도적일수도 있고, 전염병일수도 있습니다.”
“도적은 그렇다치고, 전염병?”
“전염병이 도는 마을은 폐쇄하는 게 제국의 법치니까요.”
‘하긴, 중세면 그런 미개한 방법을 쓰고도 남지.’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시대, 전염병은 재앙이었고 그 재앙을 막는 방법은 하나였을 테니까.
“헌데, 도적들이 굳이 애꿎은 마을을 태울 이유가 있는가?”
알렉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엔 악명 높은 도적들이 많습니다. 그 중엔 재물을 탐하는 거에서 그치지 않고 순수히 폭력을 즐기는 이들도 있죠. 그들은 한 마을을 털고 나면 항상 마을을 태우곤 합니다. 조롱 하듯 써놓은 팻말을 보았을 때, 그들일 확률이 큽니다.”
“그들?”
무언가 아는 것 같은 알렉스의 눈치에 베아트리체가 물었다.
“이따금씩 재정난을 겪는 용병단이 도적으로 돌아서 버리는 일이 있죠. 제국에선 꽤 흔하게 일어납니다.”
알렉스는 설명을 마치며 혹시 몰라 뽑은 검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햇볓이 잘 드는 자리에 주저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아리아도 옆에 앉아 합류했다.
베아트리체는 타박하지 않았다.
까맣게 재가 된 마을, 명복이라도 빌어주지 않는다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젠장, 눈만 배렸네. 대장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고. 좋지 못한 느낌이 들어.”
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그런데 아이리,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건 어째서지?”
베아트리체는 마나를 주위에 흩뿌렸다. 그러나 막히는 기색 없이 잘만 나갔다.
아이리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모르겠어요. 분명, 접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
아이리가 당황했다. 베아트리체는 그 이유를 알았다.
“제어구다. 전원, 전투 준비.”
베아트리체의 한 마디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도 생생히 느껴졌다. 자신의 마나를 억제하는 제어구의 파동이.
긴장되는 순간, 작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인지하던 베아트리체는 어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너진 오두막, 잔해들이 들썩였다.
“하, 씨발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뒤봐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런 시골 마을에 누가 오기나 한다고.”
“됐어. 높으신 나으리들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나저나, 다음 마을은 어디……”
“대장, 저기에 사람이 있는데요?”
서로의 무리는 각자 당황했다.
검은 잿가루를 얼굴에 묻힌 거구의 사내들이었다.
‘저쪽에 통로가 있는 모양이로군.’
베아트리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있긴 하네. 애들 불러와라.”
“예.”
남자 한 명이 잔해더미 밑으로 쑥, 들어갔다.
거구의 사내가 베아트리체 무리로 다가왔다.
껄렁껄렁한 발걸음에, 긴장감은 일절 찾아볼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댁들은 뭐더러 이런 곳을 찾아왔슈?”
구수한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베아트리체 일행은 갖춰 입고 있어서, 아마 어느 귀족가에서 나온 이들로 착각한 모양이다.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현역 영애였다.
“제도로 가는 중이었다. 이쪽이 제일 빠르다기에.”
베아트리체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딱 봐도 구린 이들이었다. 한 대 쥐어패는 건 당연하고, 그 전에 거는 워밍업 같은 거였다.
“이야, 그 사실을 알 정도면 제국 토박이겠네? 이거 아무나 모르는 건데.”
남자는 넉살 좋게 손을 흔들었다. 이따금 뒷쪽을 슬쩍 보는 걸 보니, 대놓고 ‘나 시간 끄는 중’이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그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들이 어떤 발악을 해도 자신은 커녕, 여기서 제일 약한 기사도 어떻게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 그쪽은?”
“그 전에 신분부터 물어야겠슈.”
“첸치 자작가에서 나왔다.”
“허, 뭐라고? 자작? 그럼 이들은 자작가의 기사들이겠고.”
“맞다.”
“이쪽은 시녀?”
정확히 솔리드를 가리켰다.
솔리드는 감히 신보고 시녀라 말하는 그의 발언에 기절할 뻔했다.
“그것도 맞지.”
“다행이네. 어디 높은 나으리였으면 뒤처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부스럭.
때마침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 통로로 나오는 용병들은 그 숫자가 제법 많았다. 나와도 나와도 끝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들이 전부 등장했다. 넉넉잡아 50은 되는 숫자였다.
“이거, 그쪽들에게 원한은 없어. 높으신 분들의 뜻을 우리 같이 천한 놈들이 뭘 알겠나?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
“그래?”
“저승가서 우리 탓할까봐 그래. 그럼 꿈자리가 사납거든. 애들아, 빨리 정리하고 내려가자.”
“어, 대장. 근데 예쁜 년들 꽤 많은데… 어떻게 안 되나?”
“…하긴, 나도 꽤 많이 쌓였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곤 진부한 대사를 읊었다.
“여자는 포획하고, 남자는 전부 죽여라. 그래도 기사니까 조심은 하고. 제어구 켰지?”
“아이, 두 말하면 잔소리지.”
“푸하하하—!”
거기까지 듣고 엘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걸론 부족했는지 때굴때굴 굴렀다. 베아트리체가 어떤 지령도 내리지 않아 가만히 있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저거 저 놈 미친 놈 같은데?”
“이봐.”
웃음은 전파되는 법이다. 용병 대장도 슬그머니 미소를 띄며 엘에게 다가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나도 같이 좀 알자.”
“크하합, 재밌지 그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 강아지들이, 제들이 왕인 줄 알고 지껄이는데.”
엘은 정색을 하며 이어 말했다.
“그게 어떻게 안 웃겨?”
“…뭐?”
“대장. 얘네 같은 잔챙이는 나 혼자서도 충분할 거 같은데. 전부 죽일까?”
엘이 섬뜩하게 웃으며 베아트리체에게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명은 살려둬라. 설명은 들어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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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야 뻔했다.
엘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헤엄쳤다. 검도 쓰지 않았다. 그냥 맨손으로 뚜들겨 잡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기고만장 했던 용병 대장은 여기에 없었다. 그저 살고 싶어하는 미련한 인간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엘은 건들거리는 폼으로 주저 앉았다.
“그럴거야. 우리 대장이 한 명 살려두라고 했거든.”
그게 너라는 걸 감사하게 여겨.
용병단 대장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베아트리체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리며 물었다.
“나는 두 번 묻지 않는다. 여기서 어떤 수작을 벌이고 있는지 모두 말 해.”
“저, 저도 잘 모릅니다!”
“뻔해 빠진 말이군. 굳이 험한 꼴을 봐야겠나?”
어차피 아이리가 있는 이상, 그가 입을 열든 열지 않던 상관 없었다. 마법으로 캐물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정말,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여, 여기가 뭘 하는 곳인지조차 모릅니다. 그저…”
그는 자신들이 나왔던 통로를 가리켰다.
“이 통로 안을 지키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모,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 마을을 불태운 건 누구지?”
“명령이었습니다! 어쩌다 이 마을의 주민이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을 알게 되었고 입막음을 하려 저희 용병단에게 명령한 것 뿐이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한참 동안 용병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더 알 수 있는 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즉, 이 자에겐 더 볼 일이 없다.
콰득!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베아트리체는 죽은 용병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리곤 수상해 보이는 통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 안을 조사해본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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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진척은 어떠한가.”
“예.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폐하께서 지은 이름 그대로, ‘죽은 자들의 마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국에선 비밀리에 황제의 주관으로 하나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실험이 그것이다.
그를 위해 변두리에 있는 마을 하나에 연구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었다.
“프로토타입 이후 지성을 가진 실험체는 처음입니다. 결과는 봐야 알겠지만, 마법사들이 말하길 이번에는 성공적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처음 마을 사람들을 하나 둘 납치해 실험을 이어갔던 그들은, 가능성을 보자마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이 그 실험이었다. 이번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다가도, 혹시 모를 위험에 긴장을 놓지 않았다.
“결코 교단에서 낌새를 눈치채면 안 된다.”
“물론입니다. 그를 위해, 용병단 하나를 고용해 마을을 불태우라 명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죽여라.”
“그 또한 안배해 놓았습니다. 다만 그냥 죽이긴 아까우니, 새로운 실험체로 쓰려고 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이군. 잘만 되면, 이번 전쟁에 투입할 수 있겠어.”
처음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때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황제는 포기하지 않았고, 꾸준히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아르고스’ 때를 계기로 속전속결로 연구는 진행되었다.
마침내 소생을 하더라도 ‘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코 교단이 이 연구에 대한 조금의 실말이도 알 게 해선 안 될 것이다.”
“예, 폐하.”
제국의 내부는 양강 구도였다.
황실과 교단.
황제와 교황.
힘은 황제에게 쏠려 있지만 교단도 만만치 않았다.
라의 교단은 비윤리적인 행동을 금한다.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 꽤나 골머리를 앓을 것이 뻔했다. 명분을 내세우는 라의 교단은 상대하기 까다롭기도 하고, 그들이 가진 권력도 결코 작지 않다.
명분을 쥐어주면 끝인 것이다. 이 거대한 제국은 황제 한 명이 지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황제는 후사가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자신의 막강한 ‘황권’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자신이 죽는다면 제국은 반으로 갈라질 게 뻔했다.
그렇기에 이번 연구가 중요했다.
황제는 ‘영생’을 원했으니까.
우웅.
그때, 신하의 품 속 수정구에서 진동이 울렸다.
“폐하, 제 4연구소에서 온 연락입니다.”
“당장 주거라.”
“예.”
황제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이야.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
“그런 듯 합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축배는 보고를 들은 다음 들도록 하지.”
황제는 수정구의 연락을 받았다.
곧이어 수정구가 활성화 되며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황제는 당황했다.
왜냐면 마법적 형상으로 보인 것이, 사람이 아닌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꼭 파충류의 눈을 닮은 금안.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섬뜩하기까지 하다.
리, 리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멀리서 얌전히 있으셔야해요.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리체 눈 밖에 안 보인다고요!
내가 왜 얌전히 있어야하지?
진짜… 혼나고 싶어요?
…크흠. 알았다. 좀 떨어지란 말이지.
소란스러운 말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 자는.”
황제의 눈이 커졌다.
투명한 금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저 소녀의 얼굴은 황제는 알고 있었다.
“성녀.”
베아트리체 첸치였다.
아아. 들리나 황제?
리체! 존댓말!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들리십니까?
“…네가 어떻게.”
황제의 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베아트리체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지나가는데 제국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보여서 말입니다.
“…벌레?”
친히, 우방국의 성녀인 제가 청소를 해드렸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어떤 자의 머리를 들었다.
황제가 직접 임명한 연구 소장의 머리였다.
황제는 크게 당황했으나,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아, 그런 표정 지으실 건 없습니다. 무언가 사례를 받고자 하는 일이 아니니.
베아트리체는 몸을 살짝 비켰다.
그녀의 뒤로, 완벽히 반파된 연구소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황제의 손에 핏줄이 솓아올랐다.
그러나 티를 낼 순 없었다.
저 연구와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교단에 알려지면 큰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인체 실험을 하고 있더군요. 라의 교단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이죠.
“타국의 성녀에게 못볼 꼴을 보였군.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그러나 굳이, 자네가 해결할 필요는 없었는데. 수고가 많군.”
베아트리체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요. 이건 제 선물이니, 괘념치 마시길.
베아트리체는 무언가 안다는 듯, 깊은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지.”
곧이어 교신이 끊켰다.
무릎을 꿇고 조아린 신하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황제는 아무 말 없다가.
푸화아악!
신하를 반으로 갈랐다.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간 황제는 충열된 눈으로 수정구를 바라보며 단말마를 뱉었다.
“선물이라, 재밌군.”
그는 거친 걸음걸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어떤 글씨를 휘갈기곤, 봉투에 넣었다.
황제 인감을 찍고 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로 향했다.
“황제가 돼서 받고만 있을 수 있나.”
그날, 제국의 기사 서열 3위 ‘칸’에게 하나의 서신이 전달 되었다.
베아트리체 첸치를 죽이라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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