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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황, 자작가 영애가 되다-193화 (193/248)

〈 193화 〉 업적 쌓기(1)

* * *

노인의 이름은 호프만.

아만 왕국의 왕실기사단장이자 몇 안 되는 마스터 중 하나였다.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지금, 잊고 살던 먼 기억이 떠올렸다.

호프만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랑자였고, 평민조차 되지 못한 화전민이었다.

5살이 될 때부터 구걸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아비와 어미는 부모로서의 최소한 터울도 제공하지 않았다.

구걸을 실패하고 돌아온 날에는 잔인한 폭행이 돌아왔다.

호프만은 그때의 자신을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라 표현하곤 했다.

너무 비참하고 끔찍해서, 되도록이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9살이 되던 해였다.

호프만은 죽고 싶었다.

그러나, 스스로 죽기는 싫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생명이란 담보를 써보지도 못하고 죽기 싫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지막 배팅을 한 번 해봤다.

때마침 게시판엔 ‘검투사 모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던 그는 검투사에 지원했다. 한 번이라도 이긴다면 굶지 않아도 되니까.

9살 소년이 목숨 걸고 싸우는 건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그 가혹한 걸 위해 존재하는 검투사였기에, 의외로 쉽게 될 수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검. 그거 하나 들고 생사의 전장에 선 호프만. 적은 베테랑 검투사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길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소년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호프만은 승리했다. 동시에, 어둠 뿐이던 그의 인생에 빛이 들어왔다.

호프만은 재능이 있었다.

검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재능이 있었다. 검투사로선 최고의 재능이었다.

검투사로서의 삶이 남이 볼 땐 비극적이라 생각할진 몰라도 적어도 그는 좋았다. 이젠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은 것도 있었지만, 검이 좋았다. 즐거웠다. 처음으로 세상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다.

호프만은 이제,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검투사가 되었다.

적수를 더이상 찾아볼 수 없을 때 쯤. 그는 콜로세움에서 나갔다.

강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호프만, 그는 강자와 싸우는 걸 즐겼다.

­넌 이름이 뭐지?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왕세자와 만난 건 말이다.

­호프만입니다.

­제도에서 제일 가는 검투사의 이름과 같군.

­그게 저입니다.

­뭐라?

화전민의 아이였던 호프만.

태어날때부터 고귀했던 왕세자는 희한하게도 죽이 잘 맞아 떨어졌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은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강자를 찾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거라면 좋은 방법이 있지.

왕실 기사단에 오는 건 어떤가?

호프만은 그렇게 왕실 기사단이 되었다.

운 적도 있었고, 힘들어 제대로 말도 못하는 나날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런 감정보단 웃는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37살이 되던 해, 그는 마스터가 된다.

50살이 되던 해에는 왕실기사단이 된다.

그리고 63살, 즉, 현재로부터 5년 전.

호프만은 마나를 잃는다.

­허허, 보통 내기는 아니로군. 그래서 자네 같은 강자가 이 조용한 나라에는 무슨 볼 일인가?

5년 전, 그 날.

호프만은 어떤 젊은 남자와 마주쳤었다.

특이하게 검은색 머리와 검은색 눈을 한 남자는 갑자기 나타나 수많은 생명을 짓밟았다.

그렇기에 호프만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와 마주한 호프만은 단번에 알았다.

규격 외였다. 그 남자는.

­겨루자는 건가? 난폭하군.

한 마디 없이 호프만에게 검을 겨눈 남자는 어떤 감흥도 없어보였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호프만은 사실, 두려웠다.

하지만 나서야했다.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여기서 저지해야만 했다. 그는 왕실기사단장이니까.

­그래, 언젠간 자네 같은 강자와 겨루어보고 싶었네. 내게도 순서가 왔군.

호프만은 두려움을 벗어 던졌다.

언제부터 강자와 싸우는 걸 두려워 했었는가. 그는 자책했다.

왕실기사단이란 직위를 잠시 내려놨다. 그는 지금, 배가 고파 검을 들었던 9세의 소년이었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지루해보였다.

호프만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지금까지 길을 걸으며 깨달았던 수많은 비기를 보였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남자는 너무나 강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은 다한 거 같다.

한계치까지 영령을 운용하는 건 물론, 마나가 고갈 될 때까지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정체 불명의 남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의 60년 인생이 부정 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남자의 검은 호프만을 꿰뚫었다.

힘이 다 할 때까지 방어만 하다가, 이제 시시해졌다는 듯이 그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호프만은 죽지 않았다.

남자는 치명상을 입혔지만 확인 사살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사라졌다. 그 후, 나타난 사제들이 호프만을 간신히 살릴 수 있었다.

후유증은 지독했다.

마나를 잃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사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마나가 없으면 영령도 운용할 수 없다.

호프만은 하루 아침에 무능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경험은 진짜였다.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온 그는, 이번 전쟁의 선두에 섰다.

전장에서 삶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그때 그 자와 같구나.”

호프만은 흐릿한 동공으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녀 뻘인 손자의 검이, 복부를 관통했다.

꼭 5년 전 그때와 같다.

절망적인 격차다. 영령과 마나를 제한하고 싸웠다. 꽤 치열한 접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지막 수에서 깨달았다. 소녀는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는 게임이 아니었다. 그나마 합이 맞았던 건, 순전히 소녀의 배려였을 것이다.

‘…마지막 예우인가.’

노인은 허허, 웃었다.

어찌 조막만한 소녀가 이런 힘을 가졌는가.

자신은 한 때나마, 왕국의 최고 기사였다.

힘을 잃었으나 신체는 멀쩡했다. 호프만은 힘을 잃은 후에도 꾸준히 단련 해왔으니까.

동등. 아니, 어쩌면 자신이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에서 이리도 막심한 차이가 날 줄 몰랐다.

검술. 검술의 깊이가 달랐다.

60년 산 노장의 검술보다, 앞에 있는 핏덩이 소녀의 검술이 훨씬 우월했다.

“압도적인 격차다. 검술 실력도, 자네의 상대가 되지 않는군. 꼭… 그때처럼.”

“이 땀이 보여?”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하얀 얼굴을 가리켰다.

눈썹 부근에 땀이 송글송글하게 맺혀 있었다.

“그저 뒷방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래도 꽤 즐거웠다.

호프만은 조잘거리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복부가 꿰뚫린 사람치곤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니, 다르군. 그 남자와 자네는 달라.”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튼, 편히 쉬어라. 의외로 죽음 저편은 나쁘지 않거든.”

베아트리체는 중얼거리며 검을 뽑았다.

울컥, 피가 새어나온다.

호프만은 자신의 복부를 부여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베아트리체를 올려다보았다.

“자네는… 감정이 있구나.”

“?”

그럼 사람이 감정이 있지. 베아트리체는 말했다. 호프만은 실 없이 웃었다. 가만히 그의 최후를 지켜보던 베아트리체. 호프만은 문득 감사함을 느꼈다.

“고맙…네.”

“…….”

“이렇게 싸워 본 게 어, 얼마 만이던지. 이제 편히 잘 수 있겠어.”

“그래 쉬어. 다음엔 내 편으로 태어나.”

“허허, 그러면 좋겠군. 자네 같이 강한 자의… 편이라면… 정말, 든든하겠어.”

호프만의 숨은 점점 멎어 들어갔다.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몸은 축 늘어졌다. 그러나 호프만은 마지막 생명을 불살라 베아트리체에게 전했다. 그는 왜인진 모르겠지만, 꼭 이 말은 전하고 죽어야할 거 같았다.

“조심하게.”

“…?”

“아마, 자네의 유일한 적수일 그를.”

“내 적수?”

“그는… 감정이 없어.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네. 실력은 자네와 비슷할 터야. 내 직감이 그렇다네. 하지만… 그와 싸울 땐 명심해야 될 것이네. 인간이 아닌, 감정이 없는 괴물과 싸운다고.”

“…대체 뭔소리를 하는 건가?”

베아트리체는 눈을 깜빡였다. 호프만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침묵의 기사… 그를, 그를 조심해야 해. 그는 괴물이니까.”

익숙한 이름에, 베아트리체의 눈이 커졌다.

**

별로 슬프진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전쟁. 승패 유무였으니까. 적장을 베고 충분한 공을 세웠다. 승리로 돌아갔고 승리의 주역은 자신이다.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호프만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죽은 말 때문이다.

“감정이 없다라.”

그는 애매한 말을 던졌다. 실력은 비슷하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자신이 질 거라고 말하고 싶은 듯 했다.

전혀 공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베아트리체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영화 주인공처럼 정에 이끌려 대의를 그르치는 답답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잘못 본 거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뭔가 거슬렸다.

찝찝했다. 마치 삼킨 생선 가시처럼 말이다. 살아 있기라도 하면 자세히 물어볼 텐데,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으, 진짜! 베아트리체! 듣고 있는 거야?”

솔리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걸자, 그제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듣고 있다.”

솔리드는 베아트리체를 위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경전이라도 만들어야 될 기세로 아주 열일 중이다.

“카르마란 건, 플러스보단 마이너스를 피해야 돼. 특히 베아트리체 같은 경우는 더.”

“근데 고작 그거 알려주는데 시간을 멈춰야 하는 건가?”

솔리드는 카르마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무려 시간을 멈춰버렸다.

“어허, 자꾸 말대답 하지마. 집중하란 말이야.”

“…알겠다.”

베아트리체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였으면 싸가지가 없군, 이라며 검을 휘둘렀겠지만 그녀가 조용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딸기빵 덕분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오물오물 빵을 먹고 있었다. 아껴먹는 중이었기에, 이거 다 먹기까진 넉넉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일단 오늘 일을 계기로 알려줄 시스템은 이거야. 사람은 말이지? 그게 누구든, 죽고 나서 하나를 말해야 돼. 은인과 원수의 이름을 하나씩 말이야.”

“원수?”

“그래. 그래서 내가 아까 나선거야. 그대로 죽였으면 원수에 너 이름이 적힐 거 같아서.”

베아트리체는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근데, 나 이미 많이 적혔을 거다. 못해도 50명? 100명? 내가 누군갈 죽일 땐 배려하지 않는 편이어서.”

“괜찮아. 베아트리체가 죽인 사람은 대부분 악인이었어. 카르마가 낮은 사람, 마이너스인 사람이 적은 명부는 네게 플러스로 작용해.”

“아하.”

그러니까 악인이 원수라 자신을 적었으면 이득이란 소리였다.

꽤 일리 있는 소리라 생각한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프만은 높은 카르마를 가진 인간이야. 아마 삶을 살면서 배푼 덕이 많았겠지.”

“그 자의 이름이 호프만이었군.”

“응. 맞아. 그러니 하나 물어볼게. 네가 죽인 호프만은 과연 원수의 이름에 널 적었을까?”

베아트리체는 잠시 솔리드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마… 적지 않았을 거다.”

“왜라고 생각해?”

“그야.”

베아트리체는 호프만의 죽은 모습을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웃고 있었으니까.”

그는 행복해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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