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 자작가 영애가 되다-206화 (206/248)

〈 206화 〉 죽은 자들의 군주(2)

* * *

데구르르.

“…….”

현장엔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비단, 베아트리체가 기사의 목을 날려서는 아니었다.

“목이 단단한 건가, 아님 없는 건가.”

결론부터 말해서, 떨어져 굴러가는 건 기사의 목이 아니었다.

투구였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알고 있었다.

‘분명 목을 가로질렀다. 나는 제대로 베어냈어.’

손끝에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 수도 없이 느꼈던 그 감각은 확신이란 감정을 주었다.

“마, 맙소사.”

가웨인은 다리의 힘이 풀렸다.

투구가 떨어진 기사는 어떤 감정 없이 걸어가 무심히 주웠다.

“그, 그대는 정녕… 인간이 맞소?”

가웨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기사의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번과는 비슷하나, 다르다.’

기사의 얼굴은 암흑이었다.

형태는 존재했지만 볼 수 없었다.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 확실한 건 ‘인간’이라 부를 순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저번에 베었던 죽은 기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얼굴이 보였나?

그건 알 수 없지만, 지성은 틀림 없이 없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자는 있었다.

“무례한 년이군.”

말을 하며.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분노란 감정도 느낄 수 있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넌 알 필요 없다. 그저 길을 비키면 될 뿐.”

­후욱!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간단한 행동으로 기사의 검을 올려쳤다. 약간 떠버린 빈공간에 강하게 발길질 했다. 거구의 기사는 날아가 성벽에 처박혔다.

베아트리체는 가웨인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귀찮은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 보수하려면 시간이 걸리겠군.”

“아, 아닙니다.”

베아트리체는 검을 늘어트리고 성벽에 박힌 기사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아이리는 차마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평소 알던 귀여운 리체가 아니었다.

그건, 절대자의 모습이었다.

베아트리체는 검을 역수로 잡고 기사가 있는 곳으로 힘껏 날렸다.

쿠와앙!

굉음이 들리며 성벽 전체가 떨렸다.

가볍게 던진 투검치곤 굉장한 위력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배에 검이 꽂인 기사 앞에 쭈그려 앉았다.

“건방진 놈. 하나만 묻지. 대답하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크큭, 대답한다면 살려줄 것인가?”

“그래도 죽일 거다. 하지만 깔끔하게 죽여주지.”

베아트리체는 박힌 검을 뽑았다.

기사는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군주가 누구지?”

“죽은 자들의 왕.”

“숨기지 않는군. 네가 죽은 자라는 걸.”

“숨길 이유가 있나?”

기사는 여전히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베아트리체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단, 궁금한 게 있었다.

“침묵의 기사를 아는가.”

침묵의 기사를 물은 건 단순한 직감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자라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의 군주다.”

“산 자가 어찌 죽은 자들의 왕이 될 수 있지?”

기사는 빈 투구를 들이밀었다.

한참 동안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베아트리체는 한 번 더 베려고 했다. 그제서야 기사는 입을 열었다.

“넌, 닮았군.”

“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일격. 그리고 행동. 지고한 군주와 닮았다. 인정하지. 넌 강하다. 내가 아직 살아있었더라면, 널 따랐을 것이다.”

그건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베아트리체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넌 군주가 될 수 없구나. 그러기엔, 너무 가녀려.”

“기분 나쁜 소리군. 다른 건 몰라도 난 냄새나는 놈들을 싫어한다. 너희에겐 썩은 내가 나.”

베아트리체는 흥미를 잃었다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이의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그가 쉽게 말해준 거까지가 정보의 한계라고 느꼈다. 그이상은 말해주지 않으리라.

“끝까지 고고함을 유지하라 성녀여.”

뒤를 돌아가는 베아트리체에게 기사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더럽힐 때, 그 가치가 있을 테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베아트리체의 하얀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게 왜 필요하지?”

베아트리체는 저번에 죽은 자들을 한 번 더 죽게 만들었던 참격을 한 번 더 준비했다. 다만 이번엔 앞에 있는 기사에게 집중했다.

“너는 여기서 한 번 더 죽게 될 텐데.”

그 순간, 공간이 베어졌다.

**

“그들의 발걸음을 막았다고 했나. 심지어 죽였다고?”

“예.”

“죽지 않는 이들을 죽였다라. 필시 그 주인공은 성녀겠지.”

“그러하옵니다. 처분을 내리시겠습니까? 정상위 마스터라고 해도, 지금은 제국군입니다. 정당한 절차로 그녀를 처벌할 수 있습니다.”

“성녀가 어찌 불길한 그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겠나. 다 예상한 일이다.”

황제는 기분 좋은 듯이 미소 지었다.

“단.”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왕좌에서 일어섰다.

“대가는 받아야겠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침 황태자 전하께선 그녀와 다른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성녀를 보호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뭘 망설이나? 제국은 언제나 걸리적 거리는 게 있으면 치웠다. 새싹이 피어났다면 뿌리채 뽑았고, 인지 못할 숲이 생겼다면 철저히 불태웠다. 그렇게 했기에 이 큰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어.”

보좌관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침묵의 기사에게 알리겠습니다.”

보좌관의 입장에선 당연했다.

베아트리체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라면, 그녀를 잡을 수 없다. 침묵의 기사쯤은 되어야한다.

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성녀의 처단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 고작 성녀를 처단하는 일에 침묵의 기사를 쓸 순 없지.”

“…전쟁 말입니까?”

“고작 전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황제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곧 있을 일에 대한 기대감 탓인지 그를 벌하진 않았다.

“잘 들어라. 보좌관. 우리는 고작 소피에르 연방 같은 조무래기들을 무너트리는 게 목표가 아니다. 영광. 그래,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다. 그리고 신의 권위에 도전할 것이다. 전쟁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보좌관은 이해되지 않았으나 깊게 묻지 않았다.

그저 땅을 바닥에 처박으며 외칠 뿐이었다.

“폐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황제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제국군에게 공문을 내려라. 성녀가 배신했으니, 처단하라는 공문을.”

“예, 알겠습니다.”

“또한 크라포스에도 전하라.”

황제는 악마처럼 웃었다.

‘건방진 네년도 끝이다. 내게 이빨을 보였으면 물어 뜯던지 했어야했어.’

황제는 그런 인물이다.

조금이라도 적이라고 판단되면, 그 즉시 없애버리는, 그런 인간.

그런 점에서 사사건건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던 베아트리체는 반드시 없애야할 대상이었다.

그를 위해 여러 가지 계획도 세웠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치워버릴 순 없었다. 성녀는 교단과도 연결되어 있어 상대하기 껄끄러웠으니까.

고맙게도 벌써부터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수 십의 계획 중 딱 하나를 시도해봤을 뿐인데도.

엄연히 제국 소속인 기사를 죽여버린 것이다.

‘침묵의 기사처럼 다루기 쉬운 인물이군. 내 적이라는 게 아쉽구나.’

황제는 이제, 대가를 받을 것이다. 곱절로.

“크라포스 소속인 성녀가 문제를 일으켰으니, 직접 처리하라고 전해라. 제아무리 성녀가 강하더라도, 아르반체코 공작이라면 가뿐히 처치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날, 제국군과 크라포스에 ‘성녀를 처단하라’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 전해졌다.

**

루엘은 황실에서 내려온 서신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 날이 오고야 말았군. 베아트리체, 생각보다 너무 이르다.”

베아트리체를 처치하라는 서신이었다.

집무실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카르드는, 루엘이 넘겨준 서신을 보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칼을 빼들 때가 왔다.”

카르드는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시간을 벌기 위해 했던 계약인데.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이 또한 운명이겠지.’

카르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칠 생각이십니까.”

“그거 밖에 없지 않겠는가. 베아트리체를 버릴 수 없다. 그녀를 버린다면, 크라포스도 끝이야.”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루엘은 지나친 현실 주의자다.

그 현실 주의자의 논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를 버린다면, 다음은 크라포스다.

약간의 시간을 벌 순 있겠지만, 얼마 못가는 산소호흡기를 달아놓을 뿐이다. 루엘은 추하게 갈 생각이 없었다.

“또한, 어찌 충실한 신하를 버리겠나. 버린다면, 그 누가 날 믿고 따를 것인가. 이건 정해져 있다. 카르드 경.”

“전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소피에르 연방과 손을 잡는다면, 그렇게 현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비공식 안건으로 소피에르 쪽에서 카르드에게 서신을 보낸 건, 루엘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는 딱 한 가지.

‘불가침 조약’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카르드였지만 마나의 맹세를 한 건 알려줄 수 없었다.

말하면 죽을 테니까.

꼼수를 써 베아트리체에게 알린 게 한계였다. 그때의 여파로 카르드의 몸은 아직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국을 치겠다는.

불가침 조약과는 완벽히 위배되는 행동을 하겠다는 루엘의 말에도 어떤 거부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심장이 터져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억 나는가?”

루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 밖을 보며 뒷짐을 지었다.

“자네가 과거, 내게 조언했던 말인데.”

그는 뒤를 돌아 카르드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완벽히 가로 막힌 상황에서도 정답은 존재합니다. 그 확률은 적지만, 틀림 없이 있습니다.’ 자네가 했던 말이네. 진실의 마법사 다운 말이기도 하지.”

카르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떤 게 정답인 거 같은가?”

분명 루엘은 카르드의 사정을 모른다.

말해주지 않았으니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마치, 카르드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 의도가 다를 지언정, 현재 카르드에겐 큰 울림으로 들렸다.

“…과거 제가 했던 말이 다른 이에게서 들려오니 알겠습니다. 정작 그 말을 했음에도 그렇게 살지 않았군요.”

카르드의 흐릿한 눈이 선명해졌다. 또렷한 눈빛으로 루엘을 쳐다봤다.

“제게 말미를 주십시오 전하.”

“…….”

“그리고 믿어주십시오. 제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건 크라포스를 위한 일일 것이니.”

“카르드 아르반체코 공작.”

루엘은 그 어느때보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국왕이 되는 그날보다 더.

“난 단 한 순간도 널 믿지 않은 적이 없다. 그건 자네가 수 백년 동안 이 나라를 지킨 진실의 마법사가여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굳건한 믿음이다.”

카르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얼 하든 믿겠다. 경.”

루엘은 방긋 웃었다.

카르드는 죄스러운 표정이었다.

“당분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뭐하는가?”

루엘은 고갯짓했다.

“어서 자네 딸 곁으로 가지 않고.”

카르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카도 한 명 있습니다.”

“…응?”

“베아트리체 첸치. 내 동생의 딸입니다.”

“…!”

충격적인 진실을 처음 들어버린 루엘은 경악했다. 그러나 그 경악이 사라지기도 전에, 카르드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니 베아트리체를 좋아한다면, 저부터 넘으셔야할 겁니다.”

잠시후 혼자 남은 루엘은 자신의 뜨거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나도 내 주제는 안다. 카르드. …되겠냐 그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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