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가장 어두운 시간(1)
* * *
엘프의 마을.
뜬금 없이 나타난 소녀가 위그드라실이란 충격적인 사실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위그드라실은 그들을 불러 놓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허가 받지 못한 사람은 나갈 수 없어.”
위그드라실은 낭낭하게 말했다. 엘은 그녀의 모습이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가 세계수면 어쩔건데? 그래봤자, 우리 대장한텐 한 주먹 거리면서!’
물론, 정말 베아트리체가 위그드라실을 쥐잡듯 잡았다는 걸 엘은 모르고 있었다.
“허가 받지 못한 사람은 못 나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데이비드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위그드라실을 노려봤다.
“말 그대로. 나머진 돌아가야 해.”
위그드라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어? 이 꼬맹이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네가 하늘의 마법사구나.”
주먹을 치켜든 성질 나쁜 도로시를 보며 웃었다. 위그드라실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끝이 나긴 하려는 모양이야.”
“…응?”
“저기이…”
그때 헤나가 꼼지락거리며 소심하게 말했다.
“그래두, 우리 위그드라실님 세계수인데… 존칭을 써주실 순 없.”
“없어.”
엘은 벌떡 일어나 양팔을 벌렸다.
“그쪽이 그렇게 나오면, 우리는 존중을 해줄 수가 없어. 빌어먹을! 빨리 이 엿 같은 곳에서 나가게 해줘. 그럼 절이라도 한 번 해줄테니까.”
“굳이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단다. 헤나, 이들에게 있어 난 악역이니까.”
위그드라실은 빙그레 웃으며 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계수의 사랑을 받는 엘프는 행복하기 마련. 헤나의 표정은 이미 늘어져 있었다.
“리체 보고 싶은데요… 나가게 해주세요.”
아이리는 이와중에도 리체를 찾았고, 베아트리체가 자랑스러워 하는 기사단은 개판 오 분전으로 변해갔다.
길길이 날 뛰는 엘, 즉사기를 써야 하나 고민 중인 데이비드, 논리적으로 따지려 하는 가레스 등등.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수록 위그드라실은 입을 닫았다.
한참 실랑이가 있고 나서야 오두막 안은 조용해 질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은 여유롭게 말했다.
“왜? 더 하지 않고.”
“…젠장.”
그제야 여기서 갑이 누군지 알아차린 엘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
“나는 이미 진리를 말했어. 허가된 자만 이곳을 나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 허가 된 사람이 누군데?”
제 2차 전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데이비드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맞다. 인간. 네놈은 똑똑하네.”
위그드라실은 몇몇을 바라보았다.
아이리, 엘, 그리고 루스펠트.
각자 지긋이 5초 정도 바라본 이후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셋만 갈 수 있다.”
“씨발… 뭐?”
참다 못한 도로시가 욕을 뱉었다.
“야, 나는 왜 거기서 없는데? 네가 뭔데 내 나라에도 못 가게 하냐고!”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이런 곳에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도로시는 저렇게 보여도 책임감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이 소피에르 연방에서 얼마나 중요한 룰을 맡고 있는 지를 알고 있었다.
“세계수다. 너희가 아는 그대로.”
그래도 엘은 이곳에 나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나서진 않았다. 다만 생각할 뿐이었다.
‘와, 진짜 재수 없네.’
“…이유를.”
데이비드의 주변에 짙은 살기가 띄었다.
그 또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제국의 황태자, 실질적 제국군의 지휘관이란 칭호를 떼더라도.
그는 자신의 유일하다 시피한 오랜 친구를 잃을 뻔했다는 끔찍한 사실에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이 너머에 있을 침묵의 기사를 반드시 다시 만나야 했다. 그것만이, 알렉스에게 은혜를 갚는 방법이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희생하려 했던 알렉스의 숭고한 정신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라.”
이 기사단에 소속되고, 단 한 번도 자신의 권위를 이용한 적 없던 데이비드는 권위적으로 말했다.
그 권위가 반신인 세계수에게 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신이 정해준 운명이라면, 받아 들이겠나.”
위그드라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눈동자로 데이비드를 정확히 쳐다봤다.
“아니면, 네가 이 너머에서 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납득시킨다면 받아들이겠나.”
“세계수. 네가 신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고 있다.”
위그드라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뜻이 신의 의도라는 건 왜 모르는가.”
“전쟁은 신의 뜻이었나.”
“…….”
위그드라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나.
위그드라실은 이들에게,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다. 인간, 알려주지.”
“…….”
“왜 여기서 대부분은 이곳을 넘을 수 없는지 말이야.”
정적이 흐르고, 모두가 위그드라실의 입을 주목했다.
“제국의 황태자 데이비드. 네가 해야할 일은 제국에 있다.”
“…뭐?”
“네가 생각하는 거와는 반대다. 아마, 너희는 내가 계획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위그드라실은 씁쓸하게 웃었다.
“도와주려는 것이다.”
“도와주는 건 길을 열어주는 것 뿐이다.”
“말했을 터다.”
위그드라실은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 끝을 따라 어떤 공간이 열렸다.
그건 하나의 형상을 비추고 있었다.
“네가 할 일은, 이 너머에 있지 않다고.”
데이비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위그드라실이 보여준 공간에서는, 자신의 세력 귀족들이 군에 의해 처형 당하는 장면이었다.
“황제는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 황태자여.”
“…!”
위그드라실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는 영원을 즉위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
“괜찮을까.”
엘과 아이리, 그리고 루스펠트.
그들은 그 지긋지긋 했던 엘프의 마을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못했다.
“황태자 말이야. 혼자 감당하긴, 버거울 텐데. 우리 대장이라도 있었으면…….”
권력은 단순하다.
빼앗기 싫으면, 죽이면 된다.
같은 논리였다. 황태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야 했다.
“도로시는 뛰어난 마법사야.”
아이리는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훨씬.”
“분야가 다르잖아, 아가씨. 아가씨는 진실의 마법사라구. 그런 무식이랑은 다르지.”
“위로 하지 않아도 돼. 사실이잖아?”
아이리는 짧게 웃었다.
“그러니까 괜찮을거야. 여차하면 황제의 목 뒤로 워프를 해도 되는 거고. 물론, 좌표를 알아내는 건 아주 어렵겠지만, 황태자 스스로의 능력도 상당하니까. 그 부분은 어떻게든 되겠지.”
어쩌면 가장 억울한 건 도로시였다.
그녀는 소피에르 연방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수의 한 마디로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도로시는 데이비드를 돕겠다 선언했다.
데이비드의 약조 덕분이었다. 데이비드는 만약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소피에르 연방에 대한 주권을 인정해주며, 근 100년 동안은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겠다 했다. 피로 맹세했기에, 도로시는 데이비드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쩝, 허전하긴 하네. 다시 만난다면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래? 루스펠트.”
“…동감이다. 허전하군.”
다른 일행들도 전부, 데이비드를 따랐다. 그를 돕는 것이 베아트리체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제국에서 대대적으로 지명 수배된 그들이 정식적인 통로로 다엘리노디어를 밟을 방법도 없었지만 말이다.
“멀다. 대장은 그 짧은 다리로 어떻게 갔을까?”
“…응. 그러게. 리체 심심해서 울었을 지도 몰라.”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엘은 황당하게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뭘 봐. 이 바보.”
“아가씨는 꼭 남들한테 바보라고 하더라. 사실 아가씨가 제일 바보인 거 알아?”
“뭐?”
“자꾸 대장 걱정하잖아. 그거 진짜 이해 안 돼. 아가씨 백 명 있어도 대장 옷깃 하나 못 훔쳐.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리체는 아가야.”
“…….”
엘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대장이 아가? 내가 볼 때, 아가는 대장이 아니러 아가씨 같은데.”
“…뭐어?”
“그렇잖아. 대장은 혼자 있어도 앞가림 잘할 걸? 그러니까 본인 앞가림이나 잘 하란… 악!”
아이리는 엘의 팔을 꼬집고 루스펠트의 옆으로 갔다.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루스펠트가 말했다.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진거지?”
“친해진 거 아니거든!”
“친해졌겠냐!”
누가봐도 친해 보이는 모습에, 루스펠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
다엘리노디어에 도착한 아이리 일행.
그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늦은 건가.”
엘리노디어는 이미 초토화 돼 있었다.
곳곳엔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전쟁의 흔적이 낭자했고, 얼핏 봐도 생존자는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루스펠트가 한 걸음 내디뎠다.
“우리가 갇혀 있던 시간은 고작 해야 일주일이다. 그 당시, 제국의 진격은 ‘나’에 멈춰 있었어. 곧 엘리노디어를 먹을 수 있는 건 기정 사실이긴 했다만……”
엘이 루스펠트의 말을 끊고 말했다.
“어떤 군대가, 점령한 영지를 방치하고 떠나겠어. 이상하긴 하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를 해놓은 것도 말이 안 된다. 이래서야,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
전쟁은 애들 주먹다짐이 아니다.
명백히 무언갈 얻기 위해 하는 것이지, 부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허, 방벽도 다 깨졌네. 이곳은 더는 요새라 불릴 수도 없겠어.”
엘리노디어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의 방어 시설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제아무리 멍청한 지휘관이 지휘를 한다고 한들, 굳이 점령한 영지의 방어 시스템을 부수는 멍청이가 어디있단 말인가. 전쟁 중 상대방의 것을 이용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수상하군.”
루스펠트는 허리를 숙여 땅을 만졌다. 비옥 했을 토지가 수분이 없어 쩍쩍 갈라져 있다. 꼭, 누군가 생명령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리, 리체는 어딨지?”
아이리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엘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디서 딸기라도 먹고 있겠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대장은 걱정 할 필요가 없어.”
“…리체 성격이라면.”
아이리는 상식적으로 베아트리체가 어떻게 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됐어도 계속 기다렸을거야.”
“대장 지루한 거 싫어하잖아. 아마 이 다음인 로셸에 있지 않을까?”
“…잠깐.”
루스펠트는 황폐화 된 도시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는 허리를 숙였다.
“이거, 군단장님의 검 아니느냐.”
묵빛을 머금었음에도 장식은 화려한 검.
이런 검은 어딜가도 없을 것이다. 한 눈에 베아트리체가 들고 다니던 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티르빙…?”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아이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가가 그 검을 쥐었다.
쨍그랑.
그리고 검을 쥐자 마자 놓치고 말았다.
아이리는 덜덜 거리는 손을 시야에 가져다댔다. 그녀의 하얀 손엔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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