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대화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지!
파우트 씨도 나와 대화했었다. 심지어 취한 상태였으니 그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맞다고 우기면 수긍할 것이다.
“본인 입으로 말하던걸요?”
라이오넬이 수상하다는 듯 묘한 비음을 냈다.
가슴이 뜨끔했으나 몸을 들썩이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마침 넓은 땅이 휴작기도 아닌데 놀고 있잖아요. 그게 파우트 씨와 똑 닮아서 맡긴 것뿐이에요.”
“닮아?”
“크고, 놀잖아요.”
공작 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거짓말하는 기색이 보이면 단숨에 내 밥줄을 끊어 버릴 것만 같은,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그런데 의심받을까 봐 마른침조차 삼키지 않았다.
그저 나같이 선량한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참 그러고 있자 라이오넬이 매서운 눈길을 거둬들였다.
“단순히 직감을 믿고 파우트에게 5000평을 맡겼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직감이 맞길 바라야 할 거야. 만약 내 영지에 문제가 생긴다면…….”
라이오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가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라이오넬이 나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나는 홀린 듯 방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문이 탁 닫혔다. 그 소리에 꿈에서 깨어난 듯 번쩍 정신을 차렸다.
날 버리고 도망쳤던 배은망덕한 레반스 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뒤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서늘해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투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왜, 왜 따라오세요?”
“영지 관리인이 잘 적응하는지 걱정돼서 따라간다고 해 두지.”
라이오넬이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하려면 걱정스러워하는 척이라도 하던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공작이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보통 마차 바닥이 높아서 마부가 단을 꺼내 놓은 뒤에도 남성이 여성을 보조해 주기 마련이었다.
물론 라이오넬은 처음 보는 사람을 에스코트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뭐지? 친해지기 전에는 이런 거 안 해 줬었는데?’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손을 더 뻗었다.
일단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단단하고 거친 라이오넬의 손끝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스쳤다.
“굳은살이 많군.”
“아, 네.”
괜히 손을 오므리며 후다닥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오며 물었다.
“귀족이 아니었나?”
“아버지가 비세습 귀족이셔서, 반쪽만요.”
“흐음…….”
라이오넬의 묘한 비음과 함께 대화가 뚝 끊겼다.
귀족인지 아닌지 물어보는 이유는 뻔했다.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영지 관리인은 보통 가세가 기운 귀족들이나 준귀족이 하니 그냥 물어본 거겠지.
아니면 아직도 공작 자리를 탐내는 방계 혈족들이 가세가 기운 귀족을 첩자로 보냈을까 봐 의심스러운 건가?
에이. 아니겠지. 설마 나를 의심하겠어?
그에게 말을 꺼내 볼 새도 없이,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으악!”
마차 벽이 훅 가까워졌다. 머리를 박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감싼 손과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라이오넬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으악!”
나도 모르게 다시 비명을 질렀다. 라이오넬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얼굴과 가슴이 멀어졌다.
나는 놀라 자빠질 것 같은데 라이오넬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멈춘 마차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공작님. 돌부리에 걸렸는데 바퀴가 빠졌습니다.”
마부의 말을 들은 라이오넬이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꺼냈다. 마차가 기울어진 게 보였다. 타고 가긴 그른 것 같았다.
“출근 시간에 늦으면 미안한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마자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우린 말을 타고 가겠다.”
그러고는 나를 봤다. ……저 우리에 포함된 게 말이나 마부가 아니라 나인 모양이다.
기울어진 마차에서 어정쩡하게 내렸다. 라이오넬이 마차에서 말 한 마리를 풀어 데려왔다.
“말 탈 줄 아나?”
“아니요.”
성큼 다가온 라이오넬이 양해를 구했다.
“실례하지.”
“뭘 실례한…… 으악!”
뭐에 대한 양해인지는 당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내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덕분에 말도 끝맺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비명이 끝났을 때, 나는 말 위에 앉아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인 채 라이오넬의 팔뚝을 붙잡고 있었다.
“허리를 펴.”
“넘어질 것 같아요!”
“정말 말 탈 줄 모르나?”
“모른다니까요!”
게다가 허공에 덜렁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울상을 지으며 버럭 소리치자 라이오넬이 바로 내 뒤에 올라탔다.
두껍진 않으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팔이 나를 안았다. 뭘 느끼고 할 사이도 없이 배경이 흘러갔다.
“우, 움직여! 움직이잖아요!”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서워 죽겠는데 웃어? 너무한 거 아니야?
노려보고 싶어도 무서워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대신 원망을 담아 라이오넬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그게 힘을 다 준 건가?”
“시비 거세요?”
“손도 몸도 무술을 한 것 같진 않군.”
“무술은 못 해도 바느질은 잘해요.”
그러니까 바늘에 찔리기 싫으면 시비 걸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이 뛰기 시작해 혀를 깨물 뻔했다.
바람이 따귀를 때리듯 볼에 부딪혔다.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도 두려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몸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말이 멈췄다.
“응?”
고개를 들어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흘렀다.
누가 봐도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누가 따라오래?’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말에서 내렸다. 말 위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날 버리고 가려는 건 아니죠?”
“목적지에 도착해 내려 주는 것도 버린다고 표현하나?”
고개를 돌리자 관리소 건물이 보였다.
그냥 도착했다고 하면 되지. 하여간 예쁘게 말하는 꼴을 못 봤다니까?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그를 노려보다가 말에서 내리려 했다. 하지만 아래를 보자 다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못 내려가겠어요.”
“그냥 뛰어내려.”
“말이 놀라서 걷어차면 어떡해요!”
“내 말들은 그렇게 겁이 많지 않아.”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사람은 쉽게 안 죽는다는 라이오넬의 말을 듣자마자 죽었는데!
내가 꼼짝도 못 하자 그가 바싹 다가왔다.
“내 어깨를 짚어. 내려 주지.”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기를 부릴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나는 순순히 허리를 숙여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내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다시 말에 올랐다.
“가시게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갈 거면 왜 쫓아온 건데? 어이가 없어 쳐다보는데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말 머리를 돌리는 라이오넬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냉정했다. 마치 내가 돌아올 것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날처럼 말이다.
“설마 절 의심하신 거예요?”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을 때처럼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손바닥도 확인하고 무술 했냐고 은근히 떠본 걸 보니, 제가 첩자라도 되는 줄 아셨나 봐요?”
손끝이 떨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배신감과 원망이 뱃속에서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러나 곧 그 위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제 처음 만난,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게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인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맞아. 난 죽어서 과거로 왔지. 라이오넬에게 나는 낯선 사람일 뿐이야.’
끓어오르던 감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그 위로 서운함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다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았다. 괜히 야속함과 서러움이 벅차올랐다.
“그렇죠. 처음 본 사람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죠.”
힘없이 대답하자 라이오넬이 인상을 썼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말 머리를 돌렸다.
“알았으면 수상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떠나갔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사람들은 이제 없다. 지나치리만큼 익숙한 이곳에서 나는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었다.
빈자리에 외로움이 한기처럼 스몄다. 무기력이 팔과 다리에 매달렸다.
그 감각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우울해지면 정말 밑도 끝도 답도 없는 거야! 외로운 건 익숙하잖아. 징징거리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나 아직 머릿속에 상념이 떠다녔다. 뭔가 집중할 만한 게 필요했다.
‘그리고 집중에는 복수만 한 게 없는 법이지. 공작 놈한테 후추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어!’
파우트 씨에게 가야겠다. 그리고 내 계획에 잘 협력하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나는 영지민에게 우마차를 빌려 타고 그에게 맡긴 땅으로 향했다.
“파우트 씨!”
내 목소리에 얼굴에 모자를 덮고 누워 있던 파우트 씨가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밭에 나와 있다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게으름이라도 피워서 다행이다. 밭이라도 매고 있었으면 아마 당장 해고했을 거야.
“뭐야. 관리인이잖아.”
파우트 씨가 귀찮다는 듯 배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드러난 배에 우람한 근육이 박혀 있었다.
뭐야. 저 근육은. 힘깨나 쓰겠는데?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파우트 씨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