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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9)화 (19/130)

19화

시원치 않은 변명이었다.

라이오넬의 무의식마저 넬리 페퍼가 첩자라는 것을 거부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피해를 보상받으려면 잡아 와야 하니, 직접 가서 도주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뒤에 사족을 붙이자 조금 그럴싸해졌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뎀스로 온 그는 브라슈테테부터 갔다. 하지만 넬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를 한 잔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이니 어쩌면 넬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넬리가 보였다.

“너 거기 안 서?! 저 애 좀 잡아 주세요! 소매치기예요!”

라이오넬은 돈을 지불하고 곧장 브라슈테테에서 나왔다.

아래로 내려가 두리번거리며 넬리를 찾았다. 그녀는 헉헉거리면서 아이를 따라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대도시의 골목은 위험한데, 겁도 없이.’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리며 넬리를 뒤쫓았다. 그는 인파를 헤치고 겨우 넬리가 들어간 골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넬리는 보이지 않았다. 앞에는 갈림길이었다. 라이오넬은 직감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그러다 멀리서 남자 무리가 우르르 몰려가는 걸 발견했다.

‘따라가면 있겠군.’

그가 도착했을 때, 넬리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라이오넬이 넬리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담장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의문의 남자가 순식간에 불한당들을 쓰러트렸다.

넬리에게 가던 라이오넬은 걸음을 멈췄다.

주위가 어두운 데다가 후드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검을 쥐고도 굳이 손잡이로 기절시키는 몸놀림과 후드 밑으로 언뜻 보이는 금발이 제법 익숙했다.

‘아델하르트 왕자.’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역시 관리인은 그가 보낸 첩자였나?

아니야. 아직 단정 짓긴 이르다. 라이오넬은 주먹을 말아 쥐며 몸을 숨겼다.

이내 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도망치는 불량배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앗, 내 돈! 야! 내 돈!”

“이거 찾아요?”

“세상에! 맞아요! 제 전 재산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돌려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뭐요?”

“긴장감이 없네. 그러니까 깊은 골목까지 들어왔을 테지만.”

“……워, 원하는 게 뭔데요?”

넬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겁에 질린 기색이 느껴지자마자 라이오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넬리에게 다가가는 아델하르트에게 경고했다.

“장난은 그쯤 하십시오, 아델하르트 왕자.”

* * *

이상하다. 왜 라이오넬 목소리가 들리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진짜 라이오넬이 보였다.

공작님이 왜 여기서 나오지? 그리고 왕자? 왕자는 또 뭐야?

둘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왕자라고 불린 남자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지체 높은 공작께서 뎀스의 골목길엔 어쩐 일로?”

아무래도 좀 비꼬는 것 같다. 저 사람, 라이오넬과 사이가 안 좋은가?

슬쩍 고개를 돌려 라이오넬을 보았다. 심기가 불편한지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왕자님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여왕 폐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공작에 비하면 나는 혈통만 좋은 애완견에 불과하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뒷골목은 애완견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떠돌이 개라면 모를까.”

두 사람이 난데없고 쓸데없는 기 싸움을 시작했다. 나를 사이에 두고. 그것도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물론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어서 상관없긴 하다. 둘 사이가 안 좋든 말든 알 게 뭐람.

대신 손에 든 돈주머니나 좀 돌려주면 좋겠는데.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왕자의 곁으로 붙었다. 사이좋게 말다툼하던 라이오넬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왕자가 나를 보기 전에 얼른 손을 뻗었다. 그리고 돈주머니를 낚아채 냉큼 뛰었다.

“이건 제 거니까 가져갈게요! 공작님은 마저 싸우고 오세요! 이기셔야 해요! 지지 마세요!”

“넬리 페퍼!”

라이오넬이 나를 불렀지만 안 들리는 척 달렸다.

아까 한 차례 뛴 탓인지 금세 숨이 차올랐다. 헉헉거리면서 달리는데 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무언가가 뒷덜미를 확 낚아챘다.

“으악!”

“달팽이가 뛰어도 그것보다는 빠르겠군.”

과장은. 달팽이가 어떻게 사람보다 빨라?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라이오넬이 물었다.

“어딜 가려던 거지?”

“어디긴요. 영지로 돌아가야죠.”

라이오넬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고 뒤를 돌아봤다. 나도 그를 따라 뒤를 봤다.

동시에 라이오넬이 내 뒷덜미를 잡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질질 끌려가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쓴 왕자가 보였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후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돈주머니도 안 돌려주려고 했으면서!’

어쨌든 덕분에 돈주머니를 찾은 건 맞으니까. 뒷덜미를 잡은 라이오넬의 손에 무게를 싣고 편하게 끌려가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왕자님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참……. 웃음이 많은 분이시네.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편한 마음으로 끌려가는데 라이오넬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왕자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왜 멈추지? 길을 잃어버렸나?

빤히 보자 라이오넬이 내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도주하려 했다던데?”

“제가요? 왜요?”

“아닌가?”

“그럼요. 저는 알터우드 공작령에 딱 붙어 있을 거예요.”

복수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가요!”

“……아델하르트와는 아는 사이인가?”

“아니요.”

“흠…….”

라이오넬은 나를 빤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지.”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오넬을 따라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광장에 서 있는 알터우드가의 마차가 보였다.

라이오넬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

그를 따라 마차에 오르려는데 마부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잘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화답하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짐은 어쨌지?”

“예, 네?”

“짐을 가져갔다고 들었는데.”

하긴. 라이오넬이 모를 리가 없지. 아니까 한걸음에 달려왔겠지!

그럼 그 안에 든 게 드레스인 것도 알려나? 어떡하지?

거짓말해 봤자 어차피 들킬 것 같은데…….

라이오넬은 진짜 별의별 것을 다 보고받고 있다. 그러니 하녀에게 내 옷장이 비었다는 것도 보고받았을지 모른다.

그래. 기왕 들킬 거라면 차라리 실토하자! 당당하게!

“처분했어요.”

“처분할 짐이 있었나?”

“네! 공작님께서 선물해 주신 드레스들이요.”

다행히 불만스러울 때마다 들썩이는 라이오넬의 왼쪽 눈썹은 잠잠했다.

“왜 팔았지? 마음에 안 들었나?”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제가 입긴 너무 화려하고,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보상에 가까운 거니까요. 저는 드레스보다는 돈이 좋거든요.”

설마 드레스 판 돈을 달라 그러진 않겠지? 돈주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줄줄 읊었다.

“또 그렇게 여러 벌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아서요. 제일 수수한 것 하나만 놔두고…….”

말끝을 흐리며 라이오넬을 봤다. 그가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하군.”

……이게 먹히네.

* * *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일을 하면 안 된다. 특히 안 하던 운동은 더더욱.

고작 어린애 한 명 잡겠다고 뛰었을 뿐인데 몸살이 나고 말았다. 덕분에 황금 같은 휴일 동안 근육통 때문에 앓아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루 쉬고 나니 괜찮아졌다.

‘이 얄미운 몸뚱어리!’

기왕 아플 거면 오늘까지 아파서 하루 더 쉬게 해 줄 것이지. 처지는 발을 질질 끌고 관리소 문을 열었다.

“좋을 뻔한 아침이에요…….”

힘없이 인사하자 제럴드가 고개를 들었다.

“넬리 님. 못 쉬셨습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네. 근육통 때문에요.”

그 소리를 들은 소피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주물러 드릴까요?”

소피. 손가락이 뭔가 음흉한데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가오는 소피를 피해 뒷걸음질 치다 보니 엉덩이에 창틀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활짝 핀 꽃이 보였다.

“어? 이거 리지가 묵사발 내 놨던 화분 아니에요?”

소피가 내 어깨를 주물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생생하죠?”

“그러게요. 리지가 없으니까 신기하게 생생해졌네요.”

“알고 보니까 리지가 자기가 마시던 홍차를 주고 있었더라고요. 아침마다 먹은 달걀 껍데기도 화분에 버리고요.”

“먹다 남은 걸 버린 건가요?”

“아니요. 꽃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어디서 봤다던데, 책이 다 믿을 만한 건 아니잖아요.”

이거다!

나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소피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소피!”

“네? 아직 덜 주물렀는데…….”

“충분해요! 저는 잠깐 경작지에 다녀올게요!”

소피를 한 번 더 꽉 끌어안아 주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영지민들의 인사를 받아 주며 경작지를 둘러봤다.

이제 막 씨를 뿌리고 있었다. 좀 빠른 밭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아주 잘 자라 라이오넬의 창고를 풍족하게 만들어 주겠지?

그렇게 되도록 두 손 놓고 있으면 넬리 페퍼가 아니지!

“두고 봐. 기필코 성공하고 말 테니까!”

내뱉고 나니 조금 불안하다. 사실 두고 보라고 하는 악당 중에 잘된 놈을 본 적이 없다.

‘두고 보라는 건 취소.’

속으로 조용히 말을 번복했다. 그리고 싹이 나기 시작한 경작지를 유심히 본 뒤 다시 관리소 안으로 들어왔다.

“톰. 혹시 달걀 껍데기 좀 구할 수 있을까요?”

“껍데기를요?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냥……. 좀 필요해서요.”

빤히 바라보는 톰의 시선을 피하며 어물쩍 대답했다. 너무 수상한가 싶어서 힐끗 톰을 보았다.

의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달걀 껍데기를 가져왔다. 그것도 아주 깨끗한 것으로 말이다.

“씻어서 가져왔습니다! 넬리 님 손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요.”

“고마워요! 잘 쓸게요.”

“네!”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살짝 부담스럽다. 일단 껍데기 한 포대를 품에 안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상태로 뿌리면 너무 티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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