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안 믿기지?”
“예.”
“누군지 궁금하네.”
“알아보겠습니다.”
“그럴래?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이었는데.”
집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몇 달 전, 라이오넬과 브라슈테테에 나타나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소문의 영지 관리인인 것 같습니다.”
“브라슈테테?”
“예.”
아델하르트의 얼굴에 작게 감탄이 어렸다.
그도 알터우드의 관리인이 여왕 폐하의 걱정거리를 살필 정도로 사려 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로 뎀스까지 따라오진 않았을 것이다.
“엘링에게선 연락 없었어?”
“관리인이 영지민들을 잘 챙긴다고 하더군요.”
“그게 다야?”
“예.”
“영양가 없네. 첩자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그는 관리인의 인품이나 능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엘링은 두 달 후면 돌아온다고 했나?”
“예.”
“더 있으라고 해.”
“어느 정도 말입니까?”
“글쎄.”
아델하르트는 고민하는 듯하다가 웃었다.
“내 흥미가 식을 때까지?”
“알겠습니다. 편지에 추가하겠습니다.”
“넬리 페퍼에 대한 것도 최대한 많이 알아 오라고 하고.”
“예.”
집사가 대답하고 난 뒤에도 아델하르트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발끝을 까딱이다가 좋은 게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곧 무도회가 있지?”
“예.”
“직접 보는 것보다 좋은 건 없지. 알터우드 공작과 그의 관리인에게 초대장을 보내.”
“예, 왕자님.”
아델하르트는 오랜만에 무도회가 기다려졌다.
그에게 무도회는 짝을 찾기 위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 그는 그 자리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저를 혈통 좋은 종마처럼 쳐다보는 시선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아델하르트는 반쪽짜리 왕자다.
여왕과 국서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왕가의 방계 혈족이었던 아델하르트는 마침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상태였다.
여왕은 그를 아들로 들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왕 부부는 완벽한 후계자를 원했다. 아델하르트는 노력했으나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반면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라이오넬 공작은 쉽게 여왕을 만족시켰다.
‘그래도 어렸을 땐 제법 어울려 놀았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라이오넬이 아델하르트의 곁에 있었기에 여왕의 눈에 든 것이다.
‘그가 있으니 나에게 왕세자 자리를 주지 않은 거겠지.’
여왕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델하르트가 왕가의 피를 이어야 자리를 넘겨줄 마음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후로 노골적인 유혹과 결혼에 대한 압박이 이어졌다.
그 상황이 진저리나 무도회를 기피하게 되었다. 왕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제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부족하면 유능한 자를 아래에 두면 돼. 그것도 왕의 덕목이니까.’
라이오넬의 관리인이 그렇게 유능하다면, 뺏어 오면 그만이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라이오넬의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중한 거절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알터우드 공작령에 심어 뒀던 엘링과의 연락도 단절되고 말았다.
‘설마 들켰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주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을 알터우드 공작령으로 보냈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몰라도, 들켰을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너!”
아델하르트가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왜 창문으로 들어와.”
“이게 멋있잖아요.”
“나사 하나 빠진 건 여전하구나.”
엘링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델하르트에게로 걸어왔다.
아델하르트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사고라도 난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네. 보시다시피.”
엘링이 한 바퀴 빙글 돌아 보였다. 아델하르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소파에 앉았다.
“연락이 없기에 변심한 줄 알았는데.”
“설마요. 다른 곳에서 보낸 첩자가 한 명 더 생겼는데, 그놈이 들키는 바람에 검열이 심해졌어요.”
“첩자가 둘이라니. 역시 여왕 폐하의 기대를 받는 사람은 달라.”
“그럼요. 인기인은 피곤한 법이죠.”
맹한 목소리로 동조하던 엘링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좀 빠듯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잠을 못 잤거든요.”
“괜찮아. 편하게 대하라고 했잖아.”
엘링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한 번 비빈 뒤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들어오고 나가는 편지를 다 뜯어보는 모양이더라고요. 출입 기록도 더 세세하게 적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
“모르죠. 알터우드 공작 성격상 어쩌면 평생 저럴지도요.”
엘링이 어깨를 으쓱였다.
“연락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말 하려고 왔어요.”
“그렇네. 뭐, 그건 천천히 생각하고. 그것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아델하르트가 자세를 고치고 진지한 얼굴로 엘링을 보았다.
“내 초대장은 왜 거절한 걸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각한 얼굴로 묻는 게 고작 저런 거라니. 긴장했던 엘링의 얼굴이 조금 떨떠름하게 변했다.
대상이 누구인지 예상이 갔지만 대화도 이을 겸 예의상 되물었다.
“누가요?”
“라이오넬의 관리인.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왕자의 초대인데.”
엘링은 입술 모양을 읽을 줄 알았기에 입만 보이면 멀리서도 무슨 대화를 하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초대장이 왔던 날, 그는 때마침 넬리 페퍼를 훔쳐보고 있었다. 엘링은 그들의 대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공작이 좀 추궁하는 것 같더라고요. 왕자님이랑 아는 사이냐고.”
“하여간, 그놈의 의심병은.”
“아마 초대에 응하면 의심이 심해질 테니까 기가 질려서 안 간다고 했겠죠.”
“벌써 그렇게 사이가 발전했나?”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번에 봤을 땐 제법 친해 보이던데?”
“넬리 페퍼는 공작한테 약간, 음……. 이걸 뭐라 그래야 하지.”
엘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증? 아니야. 그렇게 감정이 깊어 보이진 않았는데. 흠…….”
“크게 좀 말해 봐. 같이 유추라도 해 보게.”
“그게 좀, 모호해요. 넬리 페퍼가 일방적으로 공작을 싫어하는데, 또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 그런 느낌이거든요.”
엘링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 넬리 페퍼가 라이오넬 공작을 굉장히 불신하더라고요.”
“라이오넬이 뭘 잘못했나? 아니면 알터우드 가문에 원한이 있는 것일 수도.”
“그런 것치고는 엄청 열심히 일하던데요.”
“성과는 있고?”
“개발한 약물을 밭에 뿌렸는데 토질도 좋아지고 작물도 건강해졌어요. 아마 이대로라면 전해 대비 30% 정도 수확량이 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조금 탐이 나는 이야기다.
아델하르트가 직접 밭을 가꾸는 건 아니지만 농민들에게 보급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싫어하는 사람 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니.
분명 책임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델하르트는 넬리에 관해 더 말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엘링은 그동안 영지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말했다.
대부분 넬리의 성과나 그녀가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칭찬뿐이었다.
“사람을 쓰는 것도 탁월하고, 행정에 대한 이해도 뛰어나네. 곁에 두면 쓸 곳이 많겠어.”
“그건 그렇죠.”
“마음에 드는데, 뺏어 올 수 있을까?”
“글쎄요.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서요. 그리고 좀 이상해요.”
“어떤 부분이?”
“일을 몰래 해요.”
“……관리인도 첩자 아니야?”
“근데 보면 다 영지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에요. 그걸 왜 숨기지? 보통 과시하지 않습니까?”
“라이오넬을 싫어한다며. 싫은 놈을 위해 좋은 일 하는 거니까. 몰래 하고 싶었나 보지.”
“아항.”
아델하르트가 발끝을 까딱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뺏어 오든 말든 할 텐데. 들으면 들을수록 괴짜라는 생각만 들 뿐, 어떤 사람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직접 만나 봐야겠네.”
“영지 밖으로 잘 안 나가던데요.”
“그럼 내가 안으로 들어가야지.”
“……응? 졸려서 헛것이 들리나?”
엘링이 고개를 기울여 귀를 털며 중얼거렸다.
아델하르트가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알터우드 공작령에, 그것도 단순히 관리인을 만나기 위해 들어오겠다고?
이건 물불 안 가리는 게 아니라 빙하 용암을 안 가리는 수준이다.
“관리인만 보고 가실 건 아니죠? 혹시 알터우드 공작을 암살하려는…….”
“죽일 거였으면 진작에 너한테 시켰지.”
“저는 왕자님이 사람 죽이는 일 안 시키신다고 해서 첩자 노릇하는 건데요.”
“그래서 안 시키잖아.”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얄미워 보였다. 엘링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진짜 와서 뭐 하시려고요?”
“관리인의 취향, 성격, 성향, 능력, 평판을 직접 봐야겠어. 그래야 회유라도 하지. 친해지면 더 좋고.”
“자리를 오래 비우면 티 날 텐데요.”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다녀온다고 하면 돼.”
“진부해요.”
“그만큼 잘 먹히지.”
“알터우드 공작이 받아 줄까요?”
“요양은 다른 곳으로 가고, 공작령에는 숨어들어 갈 건데?”
“……그럼 저는 어쩌고요?”
“어차피 마무리할 게 있어서 몇 달 걸릴 거야. 내가 가자마자 사라지면 이상하니까 적당히 눈치 봐서 빠져.”
맹한 표정의 엘링을 내버려 둔 채, 아델하르트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수 테라스 문을 열어 주며 엘링을 향해 말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동물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으라고, 엘링 프레르.”
* * *
근육통이 사라질 때까지 누워 있는 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 무슨 저주에 걸렸길래 망치려는 일마다 잘되는 거야?
아니야.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건가? 어쨌든 잘되잖아. 근데 나는 망치려고 했는데?
‘쓸데없이 헷갈리잖아!’
책상에 엎드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다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