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누군가 발밑에서 붙잡고 있는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나 가끔 보여 주던, 그런 미소였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외면하고 가려는데 여자가 다가왔다.
“넬리.”
조금 앞서가던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잠깐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부채를 살랑이며 라이오넬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다 불쾌한 시선이었다. 슬그머니 라이오넬 앞으로 나섰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굳고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붙잡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여자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저들끼리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관심이 여자에게 쏠렸다.
“몰그란 자작 부인. 알터우드 공작령의 관리인과 아는 사이인가요?”
“소문만 무성해서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저도 소개해 주세요.”
“저도 소개받고 싶어요.”
여자, 아니. 이제 몰그란 자작 부인이라고 불리는 내 어머니는 환희에 차 미소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부채를 흔들었다.
“제 오라버니 집에 잠시 몸을 의탁했던 아이예요.”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쌌다.
“넬리. 이제 가야지.”
평소보다 퍽 다정한 투였다.
당황한 눈으로 라이오넬을 올려다봤다. 그가 가자고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런 말 없이 몸을 돌리려 하자 다른 이들의 이목이 따라왔다.
한순간에 관심을 빼앗기자 당황한 몰그란 자작 부인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을 뻗은 탓에 소매가 조금 밀려 올라갔다.
그 자리에 시퍼런 멍 자국이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잠깐! 넬리. 여기 앉아서 이야기 좀 하고 가렴. 응?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도 않니?”
궁금했다. 왜 10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버렸는지, 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왜 마주쳤을 때 차갑게 외면했는지 묻고 싶었다.
소매에 가려진 손목에 눈이 갔다. 단순히 어디에 부딪혀 난 멍인지 폭력의 흔적인지는 모른다.
‘버렸으면 잘 살기라도 하던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궁금하지 않다.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몰그란 자작 부인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넬리. 저번에 내가 모른 척해서 서운했구나? 정말 미안해.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
차라리 삼촌처럼 위협을 했다면 의자라도 던졌을 텐데. 저렇게 애원하듯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까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대공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라 과거를 끄집어내거나 원망을 쏟아 낼 수도 없었다.
난감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전하께서도 붙잡지 않으신 것을 자작 부인이 붙잡으려 하는 건가?”
그제야 몰그란 자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공작님.”
“조심하도록.”
라이오넬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라이오넬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은 여전히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는지 그가 멈칫했다가 손을 떼어 냈다.
“고마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설핏 웃었다.
“뭐에 대한 감사인지 모르겠군. 더 있기 싫어서 서두른 것뿐이야.”
거짓말. 아레트에게 보고받아 내가 외삼촌 댁에 버려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몰그란 자작 부인은 대놓고 나보고 ‘제 오라버니에게 의탁한 아이’라고 했다. 그 말로 몰그란 자작 부인과 내 사이를 유추해 냈겠지.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니까.’
말하지도 않은 사생활을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조금 가셨다. 괜히 뾰족하게 한번 쳐다본 뒤 마차로 갔다.
마부가 계단을 내려 주자 라이오넬이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 * *
10살. 아직 내 손이 작고 보드라웠을 적이었다. 고생의 흔적이 없는 손으로 나는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 저 그냥 엄마랑 살면 안 돼요?”
“넬리. 네가 외삼촌네 간다고 했잖니. 아니면 혼자 살고 싶은 거니?”
“엄마랑…….”
“엄마랑 결혼할 사람은 엄마한테 네가 없는 줄 알고 결혼하자고 한 거야.”
“그럼 엄마라고 안 할게요. 그냥, 어……. 이모라고 할게요. 아니면 고모나, 아주머니나. 아! 부인. 페퍼 부인이라고 할게요!”
그녀는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죄책감을 보였다면 원망이 덜했을 텐데. 시종일관 제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들개 새끼를 보는 눈이었다.
그래도 애원했다. 내게 남은 건 엄마뿐이었으니까.
“제발요. 엄마 딸이라는 거 절대 안 들킬게요.”
“넬리.”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니?”
“엄마…….”
“너는 어설프고, 눈치도 없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잖니. 종일 쫓아다녀도 사고를 치는데, 엄마가 널 어떻게 믿고 거길 데려가.”
“그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러면 엄마랑 살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을걸.”
그녀는 제 치맛단을 움켜쥔 내 손을 뿌리치듯 털어 내고 마부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나를 마차에 태운 뒤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나는 달리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계속.
그렇게 나는 생전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삼촌 댁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적응하려 했다. 사랑받고 싶었고, 신뢰받으려 했다. 하지만 전부 쉽지 않았다.
“이 그릇 누가 깨트렸어? 빨리 말 안 해?”
“그거, 넬리가 그랬어.”
“제가 안 그랬어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하긴. 지 엄마한테 뭘 배웠겠어.”
사소한 누명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유 없는 불신은 심해졌다. 외사촌이 훔친 돈을 내가 훔쳤다고 뺨을 맞은 일도 있었다.
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어디선가 굴러들어온 돌일 뿐이니까. 그건 외삼촌 집을 나와 일거리를 찾아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정산이 맞지 않는데? 누가 돈 가져간 거 아니야?”
“에이. 다 아는 사람들인데 누가 돈을 가져가. 들키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
“타지에서 온 녀석도 한 명 있잖아. 들어 보니까 부모도 없다는데. 그런 애들이 다 똑같지.”
일을 열심히 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의심받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면서 말이다.
나중에 단순한 계산 실수나 다른 사람의 소행이라는 게 밝혀져도 사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뒤에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껄끄러워져 내가 먼저 떠났다.
그리고 안착한 게 의심병 말기 환자인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의 영지였다.
정말 운도 지지리도 없지!
* * *
“헉!”
그 여자를 만나서 그런지 악몽을 꿨다. 내 인생을 꿈으로 한 번 쭉 훑은 거였긴 하지만. 악몽이나 과거나 그게 그거지 뭐.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좀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라이오넬이 쓰는 방 문을 바라봤다.
문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 그래도 마차에서는 조금 자는 것 같더니.
혼자 두면 어김없이 밤을 새우는 모양이다.
‘혹시 혼자서는 잠을 못 자나?’
고개를 저어 툭 튀어나온 생각을 지웠다.
에이. 설마. 라이오넬은 의심이 많은 만큼 예민했다. 누가 옆에 있을 때 못 자면 못 잤지, 혼자라고 잠을 못 자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 앞에서, 그것도 좁은 마차 안에서 몸을 구기고 잠이 든 게 기적이었다.
‘아니면 구겨져서 자는 게 취향인가? 추측이긴 하지만 알려 주기라도 해 볼까?’
답을 내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방문을 두드린 뒤였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몸이 생각을 앞서는 모양이었다.
“들어와.”
라이오넬에게 구겨져서 자는 게 취향인 거 같으니 구겨져 보시라고 하면 미친 사람 보듯 할 게 뻔했다.
도망갈까? 도망가자.
문 열었는데 아무도 없으면 대충 귀신이라고 생각하겠지!
라이오넬이 내 인기척을 느끼기 전에 방으로 갈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후다닥 뛰어가려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넬리.”
들켰네. 어색하게 웃으며 뒤돌아서자 라이오넬이 한 박자 늦게 내 성을 덧붙였다.
“페퍼.”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죽기 전에는 보통 영지 관리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종종 넬리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따뜻한 색감을 지닌 불빛이 그의 피부 위에 일렁였다. 새빨간 눈동자가 더 붉게 빛났다.
그 찬란한 빛깔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미쳤어, 넬리 페퍼! 홀리지 마. 정신 차려!’
양 뺨을 찰싹 때리려는데 라이오넬이 내 볼을 감쌌다. 덕분에 내 손바닥이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앗, 죄송해요.”
크게 한 걸음 물러나자 볼이 라이오넬의 손바닥 사이를 스치며 빠져나왔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말아 쥐고 아래로 늘어트렸다.
“무슨 일이지?”
“그냥, 밖에 나왔는데 불이 켜져 있길래요.”
“이 시간에 밖엔 왜?”
“화장실이요.”
라이오넬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한 빛이 어렸다. 나는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쉽게도 라이오넬은 너무나 빨리 평소의 낯빛을 되찾았다.
그는 몸을 비켜서며 들어오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돌아가 볼게요.”
“잠은 다 깬 것 같은데.”
“저요? 아니면 공작님이요?”
그렇게 고민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라이오넬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공작이라는 단어를 몇 번 곱씹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편하게,”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답지 않게 몸을 돌렸다.
“편하게요?”
얼떨결에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라이오넬이 내 어깨 위로 긴 팔을 뻗어 문을 닫았다. 그는 비켜서지 않은 채, 그대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대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