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뾰족 튀어나왔었던 입은 어느새 일자로 꾹 다물려 있었다. 눈매는 여전히 샐쭉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당한 일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그걸 그냥 내버려 뒀어요?”
“돌아오자마자 세금 쪽은 원래대로 해 놨어.”
“처벌은요?”
“불법적인 건 아니라서, 아직.”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데본더스의 편에 선 자들을 정리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들이 관리하는 사업체, 광산, 사교 모임, 병력을 처리해야 하기에 일이 늘고 부담이 커진다. 그 부담은 곧 영지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라이오넬에게는 영지를 키워 쓸모를 증명하라는 여왕님의 명령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지가 발전하면 정리할 생각이야.”
“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마차에 올랐다.
넬리의 얼굴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축제를 구경한다는 기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괜한 얘길 했군.’
라이오넬은 넬리가 저렇게 반응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본인부터가 크게 분노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가 소식을 들은 것은 전쟁터에서였다. 이미 하인의 배신과 암살 기도를 겪고 도망친 후였던 것이다. 그러니 가신들이 제게서 등 돌린 것에 충격받을 일도 없었다.
레반스는 전쟁터로 오는 길에 감정을 갈무리한 뒤였고, 아레트는 원체 뭘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델하르트와 타티아손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둘 다 암투에는 이골이 난 놈들이라 말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분노해 주는 것도 썩 나쁘진 않군.’
그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넬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즐거운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화제를 바꾸려는데 마차가 멈춰 섰다. 마을 어귀에서 내린 라이오넬이 넬리에게 들고 있던 후드를 내밀었다.
“자.”
넬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작게 감탄했다.
라이오넬은 공작이고, 영주였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면 사람들이 예의를 차리느라 불편해할 것이다.
주민들은 물론 넬리와 라이오넬까지 축제를 즐기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가린다고 모를까요?”
넬리는 축제 날 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외지인이 많아 후드 쓴 사람이 부쩍 늘어났었지. 그러니 후드만 쓰면 라이오넬인 걸 알아보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가까이 가거나 대화를 나누면 금방 들통날 텐데.
라이오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넬리를 응시하다 설핏 웃었다. 그가 후드를 펼쳐 넬리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글쎄.”
적어도 눈치가 있다면 아는 척은 하지 않겠지. 라이오넬은 그 말을 삼키고 후드를 입었다.
넬리도 그를 따라 팔을 꿰어 입고 후드를 눌러썼다.
평소보다 뽀얗던 얼굴이 넓은 천에 가려지자 라이오넬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잠시 넬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후드를 넘겨 주었다.
“나만 가리면 되겠지.”
공들인 머리가 가려지는 게 내심 아쉬웠던 터라 넬리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이 손을 뻗어 넬리의 잔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이제부터 아까 한 대화는 생각하지 마.”
“그럴게요.”
그들은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깝게 걸었다.
가로수에 걸린 색색의 등이 광장으로 이어진 큰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제야 넬리의 마음도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둘러봤다.
넬리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이 사라지자 라이오넬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라이오넬, 저기 좀 봐요!”
넬리가 가리킨 방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특이하고 요란한 복장의 남자가 불이 붙은 막대기로 저글링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별 감흥 없이 지나쳤을 광경인데, 넬리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자 없던 흥미도 생겨났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네!”
라이오넬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를 알아본 영지민들이 슬금슬금 길을 비켜 주었다.
이미 소문이 퍼진 덕에 누추한 곳에 나타난 공작을 보고 기겁을 한다거나, 인사한답시고 분위기를 깨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와…….”
넬리는 넋을 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을 눈으로 좇았다. 반면에 라이오넬의 시선은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불꽃이 이리저리 튈 때마다 넬리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남자가 횃불을 입에 넣었을 때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라이오넬은 그녀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허리에 팔이 감겨 있는데도 넬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라면 소스라치게 놀랐을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라이오넬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간격이 더 가까워졌다.
자의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듯 천천히 라이오넬과 넬리를 서로에게로 밀었다.
‘사람이 늘어난 것 같진 않은데.’
가볍게 둘러봤지만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라이오넬은 그냥 기분 탓이라 여기며 사람들에게 발이 밟히지 않도록 넬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요란한 복장의 남자가 불을 꺼트리고 인사하자 그제야 넬리가 몸을 돌렸다.
“저런 거 처음 봤…….”
넬리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 걸 깨달은 탓이었다.
라이오넬은 그녀의 얼굴에 분홍빛이 번지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눈빛이 부드럽고 뜨거웠다.
라이오넬의 단단한 몸이 느껴지자 넬리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 물러나고 싶어도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불가능했다.
눈이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숙이면 이마가 라이오넬의 가슴에 닿을 것 같았다.
“다, 다른 곳으로 갈까요?”
“어디로?”
주변이 시끄러운데도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넬리는 열심히 눈을 굴리다가 가판대가 줄지어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요!”
라이오넬이 넬리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이 언제 붙어 있었냐는 듯 길을 터 줬다.
넬리는 저도 모르게 라이오넬의 손을 잡고 인파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라이오넬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손등을 제 손가락으로 완전히 뒤덮자 갈증이 충족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자그만 손을 다시 붙잡아 깍지 꼈다.
“사람이 많아.”
누가 봐도 핑계였다.
넬리는 잠시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손을 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먼저 나아갔다.
라이오넬은 넬리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문득 발갛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깨물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제 파렴치한 생각에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물건들을 대충 구경하던 넬리가 점점 빨라지는 음악을 듣더니 물었다.
“광장에도 가 볼까요?”
“좋을 대로.”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광장에는 마을 사람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간혹 보였다.
손바닥을 맞대 높이 들고 경쾌하게 뱅글뱅글 돌다가 사람을 바꿔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박자에 맞춰 다리를 낮게 차는 간단한 춤이었다.
넬리는 잔뜩 신이 난 얼굴을 하면서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라이오넬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춤은 안 추나?”
“그냥, 끼어들기 그래서요.”
라이오넬은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작정 넬리를 끌어당겼다.
“어어?”
넬리가 딸려 오며 당황한 소리를 냈다.
라이오넬이 짓궂게 웃으며 사람들 사이에 밀어 넣고 물러났다.
“치사하게 혼자 빠지……!”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넬리는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갔다.
라이오넬은 근처에 앉아 그녀를 지켜봤다.
넬리 주변에서 조용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녀와 춤을 추려고 자리를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넬리와 손을 맞대려는 사람에게 슬쩍 다리를 걸어 자리를 강탈하기도 했다.
영지민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특히 남자와 춤을 출 때는 신경이 곤두섰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질투라니.’
당장 넬리를 빼 오고 싶어 반쯤 일어났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허디거디와 플루트, 바이올린 소리가 어우러지고, 높이 매달린 등이 바람에 춤췄다. 그 아래에서 넬리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색하게 경직되었던 얼굴이 점점 풀렸다. 춤을 추며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소극적이던 움직임도 어느새 빠르고 경쾌하게 변해 있었다.
‘저런 표정도 할 줄 아는군.’
항상 음험한 계획이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흐흐흐’ 하고 웃거나 어색하게 미소 짓는 게 다였기에 라이오넬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별안간 튀어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음악이 끝나도록 넬리만 보며 앉아 있었을 것이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돌렸다. 파우트가 음흉하게 웃으며 벤치 뒤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벤치를 훌쩍 뛰어넘어 라이오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뭇하면서도 얄궂은 미소를 보자 어이없고, 민망하고, 조금 못마땅했다.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넬리를 보았다. 이번엔 레반스가 나타나 라이오넬의 왼쪽을 차지했다.
“아주 눈을 못 떼시네요.”
“그치? 푹 빠지셨다니까.”
라이오넬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둘 다 나가.”
“이미 밖입니다.”
레반스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라이오넬이 뒤를 돌아봤다. 쥐 죽은 듯이 서 있던 아레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라이오넬이 그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치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레트가 레반스와 파우트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아레트, 잠깐. 으악!”
“야, 인마. 내가 선배야!”
등받이가 없는 벤치였기에 두 사람은 그대로 넘어갔다. 아레트는 두 명의 장정을 아무렇지 않게 질질 끌어 멀리 버려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키듯이 라이오넬의 뒤에 섰다.
라이오넬은 눈빛으로 아레트를 칭찬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연주하는 사람 중에 눈을 가린 갈색 머리의 남자가 끼어 있었다.
눈이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혹 넬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디거라고 했나.”
“예.”
“의심스러운 행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