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어떻게 이뤄 주신다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왕자님께서 라이오넬을 없애고 넬리 페퍼를 손에 넣으시면 됩니다.”
“라이오넬이 없다고 넬리의 마음이 내게 오진 않을 텐데요.”
“원래 사람 마음이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에게 기울기 마련입니다.”
아델하르트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며 데본더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노골적으로 흥미를 보이자 데본더스가 제 생각을 더 자세하게 풀어냈다.
“넬리 페퍼에게 벌어진 일을 모두 라이오넬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라이오넬이 넬리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고 했던 게 된다.
넬리는 배신감에 괴로워할 테고 그때 아델하르트가 그녀를 다독여 주면 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델하르트는 허술해 보이는 부분을 꼬집었다.
“라이오넬에게 뒤집어씌우기엔 범행 동기가 부족합니다. 그가 넬리를 죽일 리가요.”
순진한 소리를 한다는 듯, 데본더스가 은근한 조소를 입에 물었다.
“듣기로는 왕자님의 최측근도 벼농사에 성공했다죠. 라이오넬의 영지는 첩자가 들어 난리가 났었고.”
“그리고 벼농사법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넬리죠.”
“바로 그겁니다. 라이오넬이라면 넬리 페퍼를 첩자라고 의심했을 겁니다. 그게 확신이 됐고, 배신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이런 일을 꾸몄다고 하면…….”
“완벽한 동기가 되겠군요.”
데본더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는 제가 만들 테니 왕자님은 적절한 시기에 터트려 주십시오.”
아델하르트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팔을 세워 턱을 괬다.
“소득도 없이 도와주진 않을 테고, 데본더스 공이 원하는 건 뭡니까?”
“알터우드가를 온전히 손에 넣고 싶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필요하긴 하겠군요.”
아델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데본더스가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럼 제 조카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델하르트는 대답 대신 의뭉스러운 미소를 남겼다.
* * *
메리가 잠깐 정신을 차렸다. 프레르는 묽은 수프를 가져왔다.
그는 메리가 수프를 먹을 때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리고 수프를 다 먹은 메리가 잠들자마자 우리에게 그녀의 상태를 알렸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가 수면 부족, 탈수, 영양실조가 겹쳤어요. 아마 한동안 못 일어날지도 몰라요.”
“생명엔 지장 없는 거죠?”
“네.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릴 뿐이에요.”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메리를 간호했다. 그녀는 정말 하루 종일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늦게까지 메리 곁을 지키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몸이 피곤하고 눈꺼풀은 무거운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잠깐 잠들었다가도 불에 덴 사람처럼 깨어났다. 그러면 어김없이 온갖 걱정들이 물음표를 달고 이어졌다.
라이오넬은 아직 수도로 돌아오지 않은 걸까? 영지 일은 잘 처리했으려나? 어디 다치진 않았겠지?
“라이오넬.”
무심코 부른 이름에 코끝이 찡해졌다.
보고 싶다. 떨어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일 년은 못 본 것 같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훌쩍이는데 침대 옆이 푹 꺼졌다.
마치 누군가가 걸터앉았을 때처럼.
소름이 돋아 이불을 움켜쥐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파우트 씨를 부르려는데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훑었다.
“넬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굴을 내밀던 공포가 다시 기어들어 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봤다. 환청인가 싶었는데 진짜 라이오넬이 앉아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 봤다. 온기가 느껴졌다.
“진짜 라이오넬이에요?”
“그래.”
“내가 여기 있는진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델하르트가 말해 줬어요?”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빤히 내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붕대 때문에 라이오넬의 입술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붕대를 내려다보고 있자 그가 작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에 옅은 한숨이 스쳤다.
“게드너가 이렇게 험하게 움직일 줄 몰랐어.”
“기껏해야 손 조금 다친 건데요. 라이오넬은 괜찮아요?”
“화가 날 정도로 멀쩡해.”
라이오넬의 팔이 몸을 꽉 조였다.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연신 짜증 섞인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멀쩡한데 나 혼자 다친 게 어지간히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같이 가는 게 나았을 거라는 말을 안 꺼내는 걸 보면 그의 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차마 그에게 칭얼거릴 수 없어 그냥 마주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손을 풀었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군.”
라이오넬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딜요?”
“몰그란 부인을 잡으러 갈 거야.”
“같이 가요.”
“아델하르트랑 같이 있는 게 안전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여기 있어.”
라이오넬이 내 손을 떼어 내고 문으로 향했나. 나는 그에게 달려가 덥석 허리를 안았다.
몸을 돌린 그가 내게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느리고 애틋했다. 라이오넬은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한 번 안고는 금세 떨어졌다.
“곧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 줘.”
나는 애써 활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델하르트가 사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깨어나지 않은 메리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뜸 물었다.
“넬리. 연기 잘해?”
“네.”
아델하르트가 나를 빤히 보다가 프레르와 파우트 씨를 봤다.
프레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파우트 씨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델하르트의 시선을 피했다.
뭐야. 반응들이 왜 이런담. 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아델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아니야. 말 안 하는 게 낫겠어.”
“뭐를요?”
아델하르트는 대답하는 대신 생긋 웃었다.
“넬리. 이제 슬슬 궁전으로 돌아가자. 소란이 있고 넬리가 갑자기 안 보여서 그런지 다 자작극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거든.”
갑자기 연기를 잘하느냐고 물어본 게 이 소문 때문인가?
폐하께서도 궁전을 어지럽힌 범인을 찾으신다고 했었지.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긴 해야겠다. 자작극이라는 말이 도는데 계속 모습을 안 보이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자 파우트 씨가 내 옆에 섰다.
“같이 가.”
“그래도 돼요?”
아델하르트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 출신이잖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야.”
“무슨 상관입니까.”
“사병을 궁전에 데려왔다는 게 밝혀지면 넬리나 라이오넬이 곤란해질걸?”
“사병 아닙니다. 누가 뭐라 그러면 대충 하인이라고 하죠, 뭐.”
파우트 씨가 퉁명스럽게 부정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그는 하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파우트 씨는 남아서 메리를 지켜 주세요.”
“뭐? 혼자 들어가면 위험하다니까?”
“전직 기사가 하인이랍시고 툭 튀어나오면 납치 자작극을 위해 밖에 사람을 숨겨 뒀었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저는 괜찮아요. 아델하르트가 있으니까!”
파우트 씨는 영 마음이 편치 않은지 뒷덜미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관리인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그의 말에 아델하르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 * *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나는 궁전에 들어오자마자 몰려온 기사들을 멍하니 보다가 아델하르트에게 물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델하르트가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와 나를 힐끔대며 귀족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넬리, 나 믿지?”
너라면 믿겠냐!
“나는 여왕님이 맡기신 일을 해야 해서. 나중에 봐.”
아델하르트가 태평하고 얄미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퍼졌다더니, 이미 기정사실화된 거였어?
혼란스러워 굳어 있는데 기사들이 나를 포박했다.
“넬리 페퍼 경은 지금 횡령과 그것을 덮기 위한 납치 자작극으로 궁정 질서를 어지럽힌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구금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횡령이라뇨?”
영문을 모르겠네. 누군가 설명해 주길 바랐지만 아델하르트는 이미 떠났고 기사들은 말이 없었다.
다행히 아델하르트의 여상스러운 태도 때문인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와서 담력이 좀 세진 덕인지 크게 무섭진 않았다.
“들어가십시오.”
기사가 탑 맨 꼭대기 층의 문을 열어 주었다. 사실 지하 감옥에 갇힐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지만.
침대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뭘 해야 할지 몰라 하늘이 점점 주황색으로 물드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문에 난 작은 창이 열리고 음식이 담긴 접시가 내밀어졌다.
나는 문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혹시 제가 뭘 횡령한 건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
“아니면 라이오넬, 그러니까 알터우드 공작님이나 왕자님 좀 불러 주세요.”
“…….”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접시를 받아들자 한마디 했다.
“다 드신 그릇은 내일 아침에 주십시오.”
그게 끝이었다. 작은 창이 닫기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혹시 열릴까 싶어 문고리를 잡아당겨 봤지만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탈출을 시도하면 나중에 불리해질 수 있다는 경고만 받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나는 라이오넬의 말을 떠올리며 쓰러지듯 누워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 라이오넬을 믿자. 금방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이것도 나를 지키려는 거겠지.’
그러나 신년 무도회의 원무곡 소리가 창밖에서 종일 들렸던 날에도 나는 혼자였다. 그 뒤로 일주일이 더 흘렀으나 라이오넬은 오지 않았다.
나는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소식도 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