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5화 (5/145)

05. 고기 먹고 싶다.

붉은 웅덩이 위로 밀림의 강렬한 햇살이 떨어졌다.

‘죽었다.’

마법사의 깨진 머리에서는 쉴 새 없이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왔다.

오크가 아닌, 인간의 시체.

‘죽였다.’

첫 살인.

하지만 얼어붙을 여유도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죄책감을 억제하고 충격을 마모시키는 듯했다.

“······.”

고인 핏물에 범수가 비친다.

반사광을 통해 그는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 전에 생성한 부캐의 이목구비를.

모니터로 봤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장.’

이마를 매만진다.

야수왕의 인장을 소환한 뒤 그는 아이템에 박치기를 해서 몸속으로 흡수했다. 덕분에 이마에 문신을 새기듯 독특한 문양의 인장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이런 세세한 설정은 전혀 바뀌지 않은 듯했다.

‘본캐 때는 가슴팍에 새겼지.’

캐릭터 낯짝에 문신을 남기는 건 범수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는 일부러 장비로 가려지는 부분에 인장을 찍었다.

‘이러고 돌아다니면 동네방네 광고하는 꼴이 되겠군.’

게르베그는 죽기 전 범수가 '야수왕의 인장'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문양만 봐도 정체를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이 세계 NPC, 혹은 주민들이 인장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췄는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부욱!

찌이이익!

급한 대로 마법사의 옷을 찢었다. 꽤나 좋은 원단인지 더럽혀진 상태에서도 광택이 났다. 범수가 걸친 견습 제복과는 차원이 달랐다.

찢어낸 검은 천을 그대로 이마에 둘렀다. 무협지의 영웅건처럼.

‘머리색 때문에 날 동방인으로 알겠지. 그쪽 문화권에서 드문 패션은 아니다.'

안면이 함몰된 시신을 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인장의 존재는 숨겨야 해. 죽여서라도 빼앗으려는 놈들이 몰려들 거야. 게르베그처럼.’

오크 굴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범수는 마법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숙련도 빵점인 어설픈 주문보다 칼질(혹은 칼로 하는 몽둥이질)이 훨씬 나았기에.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괴력에 의존할 일이 또 생길 터다. 그걸 목격한 이들은 힘의 원천을 궁금해하겠지.

‘툭 치면 뼈가 꺾일 것 같은 마법사가 트롤보다 강한 근력을 지녔다? 누구든 의심할 거야.’

범수의 고뇌가 이어졌다.

‘살려면 힘을 길러야 해. 날 노리는 자들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최종적으로는 그들이 의심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어질 정도로. ’

아이러니하게도, 힘의 원천을 숨겨야 한다는 화두는 힘을 더 길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생존하려면 이대로 안주해선 안 돼.'

정체하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내 힘이 세 봤자 레벨 100이 넘는 전사계 괴수라면 도달 가능한 영역이다. 각종 스킬로 무장한 자들과 싸우면 난 필패야.’

더군다나 모두가 정공법으로 접근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게르베그가 비겁한 수를 썼듯이.

당장 누가 속임수를 써서 약이라도 먹이면··· 범수에겐 그걸 분별할 스킬이 없다. 그의 감각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누군가 저주 같은 마법적 수단을 동원해도 위험했다.

하다 못해 잘 때 습격당한다면? 게임에서는 로그아웃을 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누구도 캐릭터를 건드릴 수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심지어 그가 무방비 상태일 때 지켜줄 동료도 전무.

‘혼자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어.’

본캐와 동등한, 혹은 비견되는 스펙이 되기 전에는 그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필요하다.

결국 그가 직면한 과제는 두 가지였다.

힘을 기르는 것과 믿을 만한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범수는 이 두가지 과제를 모두 해결할 방법을 알았다.

‘마탑으로 돌아가자.’

***

범수는 시신에서 쓸 만한 물건을 챙긴 뒤 남쪽으로 향했다.

그에게만 보이는 월드맵은 지도 역할을 100% 해내지 못했다. 미답지는 까맣게 물들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한 가지 유용한 구석이 있다면···.

‘그나마 나침반 역할은 하는군.’

지도의 동서남북 표시만큼은 믿을 만했다.

사실 나침반 없이 해나 별자리만으로 방향을 가늠하는 건, 범수 같은 초보 여행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맵 덕에 적어도 방향이 어긋날 일은 없어.'

대수림은 동서로 길게 펼쳐진 밀림이다. 이대로 계속 남진하다 보면 결국 숲에서 벗어날 테고, 거기서부터는 문명화된 땅이니 가까운 자유 도시로 가는 이정표라도 찾을 수 있을 터다.

길잡이 게르베그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범수는 생존 본능때문에 제쳐 두었던 안건들에 대해 생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난 어쩌다, 왜 여기로 떨어진 거지?’

‘어떻게’라는 질문의 답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왜’에 해당할 만한 단서는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래, 그 질문!’

자기 직전 인터넷 서핑을 했던 게 생각났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흔하디 흔한 ‘vs’놀이.

범수는 그 글의 내용을 되새기며 읊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게임 캐릭터에 빙의해서 칠일 버티고 일억 받거나, 7년 버티고 무슨 소원이든 한 개 이루기.’

설마 거기에 댓글을 남겼다는 이유로?

생각하다보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렇다면 그 글은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올린 걸까? 나는 또 어떻게 찾아냈고?

이런 식으로 따지다 보면 애초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이 안 됐다.

더군다나 범수를 더욱 숨막히게 만드는 사실은···.

‘7년? 7년이라고?’

그랬다. 범수는 분명 댓글로 ‘2번’을 선택했다.

게임 속에서 7년 버티는 대신 소원 하나를 빌겠다고.

어차피 현실성이 없는 댓글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취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또 한가지.’

하나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왜 부캐야?’

빙의 전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게임, The LIFE.

범수가 여기에 생성한 캐릭터는 둘이다. 본캐 전사와 부캐 마법사.

플레이한 시간으로 따지면 본캐가 훨씬 길 텐데, 왜 정작 빙의는 부캐로···.

‘아, 설마?’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범수는 기억하는 문장을 되뇌었다.

‘가장 최근에 플레이한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하여···.’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게임'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플레이한 (게임 속) 캐릭터'에 방점을 둔다면.

그게, 최후에 로그인한 캐릭터에 빙의한다는 뜻이라면.

‘그날 내가 부캐로 로그인한 다음, 바로 자 버렸으니까!’

범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걸 느꼈다.

‘젠장! 젠장! 젠장! 뭐, 이런 x같은 경우가!’

그럼 그날 자기 직전 본캐로 다시 로그인을 했다면.

마우스 클릭 몇 번만 더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면.

자신은 이 허접한 부캐가 아니라, 모든 게 완성된 본캐로 빙의했을 수도 있었다는 뜻?

“이런 씨아아아앙!”

범수는 울고 싶었다.

***

온갖 감정을 터뜨리면서도 그는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갔다. 밀림에 오래 있어봤자 생존 확률만 낮아지니까.

자신을 여기 떨어뜨린 존재를 저주하고 화를 터뜨리는 것도 몇 시간이었다.

더이상 그 생각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꼬르르륵!

‘뭐지,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범수는 자신의 얼굴이 몹시 헬쑥해졌으리라 예상했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여태 겪어 본 적이 없는 깊은 허기였다.

뱃속 어딘가 구멍이 뚫려, 거기로 모든 기운이 회오리치며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탈진감.

평범한 배고픔과는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사··· 사람이 이렇게 배고픈 상태에서도 살 수 있는 건가? 몸이 움직이는 게 이상할 정도야.’

눈에 보이는 과일 따위로 허기를 채우려고 시도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어느 사이엔가 범수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찼다.

‘고기. 고기가 먹고 싶다. 고기···!’

그의 몸은 질 좋은 단백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본능이 고기를 갈망했다.

범수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사진을 떠올렸다. 언제 죽었는지 모를 동물의 뼈를 먹고 있는 기린의 모습.

나중에 과학자들이 그 기린의 피를 뽑아 검사를 돌려보니 심각한 칼슘 부족 상태였다고 한다. 몸에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면 뇌는 그것을 섭취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솥뚜껑 위에 구운 오겹살이 먹고 싶다. 두껍게 잘라서 김치랑 마늘이랑 같이 구워서···.’

가끔 숲짐승의 기척이 감지되면 사냥을 시도했다. 몬스터들과 부대끼며 생존한 동물들은 쉬운 사냥감이 아니었지만 극한의 힘은 서툰 사냥꾼에게 초심자의 행운을 허락했다. 덕분에 범수는 생전 처음으로 땅다람쥐를 먹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식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양이 모자라. 간에 기별도 안 가.’

빙의 전 몇 끼 식사에 해당하는 양을 먹었는데도. 범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더 무서운 점은, 열매와 설치류 따위를 아무리 먹어도 빙의된 몸에 조금의 변화도 없다는 점이다. 뱃가죽은 여전히 등과 붙은 듯 납짝했다. ‘내가 뭘 먹었다고?’ 라고 되묻듯이.

그 사실이 범수를 더욱 분노케했다.

‘이런, 가성비 똥망인 몸뚱어리 같으니!’

그 분노 역시 금방 사그라들었다. 욕망이 화를 빠르게 대체한다.

‘고기, 고기, 고기.’

점차 발걸음에 힘이 빠졌다.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비싼 삼겹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앞다리살이라도 좋아. 제육이 먹고 싶다. 파를 아주 조금만 넣어서 볶은 다음, 흰 쌀밥에 올려서 먹고 싶다···.’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퀭해지고 있었다.

다리가 몸을 남쪽으로 인도하는 동안, 그의 의식 역시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치킨이 먹고 싶다. 아삭한 튀김옷을 한 입 베어물면 그 너머로 육즙이 촤악! 터지는, 야들야들한 닭다리를 뜯고 싶다.’

굶주림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던 범수의 발이.

멈칫!

갑자기 멈췄다.

“······!”

뇌리를 파고든 어떤 감각 때문이었다.

‘이건?!’

오크 굴에서 처음 느낀 그것과 비슷했다.

게르베그가 마법을 발동시킬 때의 느낌과.

‘저기 마법사가 있나?’

눈을 찌푸리더니.

‘아니, 조금 달라.’

그때와는 결이 약간 다르다. 훨씬 단순하고, 거칠다.

‘뭐지?’

어쨌건 마나를 다룬다는 건, 상대가 오크는 아니라는 뜻.

“···!”

다음 순간 범수는 위화감을 느꼈다.

숲이 침묵하고 있었다.

범수를 경계하면서도 바쁘게 움직이던, 밀림의 동물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아주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대수림을 가로지르면서 처음 겪는 현상.

그리고.

으르르릉!

응집된 마력이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범수는 대상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의 예측대로 오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래, 마나 감응력은 마법사가 외우는 주문에도 반응을 하지만.’

으르르르릉!

‘마수 체내의 마정석에도 반응하는 거였어!’

수풀 한 구석이 무너지더니 그 빈자리에 생경한 붉은색이 보였다.

제멋대로 뻗은 나무와 풀을 꺾고 나타난 그것은 초저음으로 위협적인 목울림을 낸다.

현실감을 잃을 정도로 압도적인 거체.

온 몸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를 내며 멈춰선다.

꿀꺽!

범수는 침을 삼켰다. 시선은 전면에 고정한 채.

시퍼런 한 쌍의 불꽃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온 몸을 덮은 선홍색 털. 큼지막한 바위 같은 머리 양쪽엔 뾰족한 뿔. 오밀조밀한 근육이 우아하게 이어지는, 고양이과 특유의 날렵한 몸.

이 마수의 이름을 범수는 잘 알고 있었다.

“···크림슨 타이거!”

꿀꺽!

다시 한 번, 범수의 목울대에서 크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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