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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16화 (16/145)

16. 그게 왜 당연하죠?

***

범수는 숙소로 돌아왔다. 여정에 필요한 물건은 보급된 행낭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거기에 개인 소지품 몇 개를 추가했다. 비상시를 대비해 구입한 검은 천 몇 장과 특수한 재료로 만든 염료였다. 이 도시에 도착하고 구입한 물건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지.’

오늘 셀레나가 준 펜던트.

범수는 이걸 행낭에 집어 넣는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오크굴을 탈출한 뒤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목소리를 내어 외친다.

“인벤토리!”

촤락!

그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 창이 펼쳐졌다.

전에 ‘야수왕의 인장’을 여기에서 꺼냈기에 여전히 안은 비어 있었다.

‘나만 여닫고 꺼낼 수 있는 창고라 이거지.’

전에 아이템을 꺼낼 때는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서 육성으로 그 아이템 이름을 외치는 방식으로 꺼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들고 있던 펜던트를 허공의 창에 조심히 가져다 대 보았다.

접촉.

팟!

순식간에 손 안의 물체가 사라지고 대신 창 안에 수납된 형태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된다.’

그곳에 다시 손을 대 보았다. 작은 창 하나가 새로 뜨며 설명이 나열된다.

[센츄리온 펜던트: 셀레나가 준 정체불명의 아티팩트.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애매한 설명이군.’

그 후 인벤토리 창에 손을 대서 아이템을 꺼내는 방법과, 육성으로 ‘센츄리온 펜던트’라고 외쳐서 꺼내는 방법이 모두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다. 범수는 몇 가지 물건을 더 넣고 창을 닫았다.

그리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짐이 든 행낭을 맸다. 이것마저 인벤토리에 넣어 버리면 간편하겠지만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다.

‘인벤토리도 꽤나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는걸?’

이 세계에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범수만의 특권.

이걸 어떻게 잘 써먹을지 고민하며 범수는 채비를 마쳤다.

“오, 범수. 준비는 끝났나?”

복도로 나오자마자 맥케인이 등장했다. 이미 며칠째 반복되는 패턴.

‘혹시 이 아저씨, 하루 종일 내 방문 열리는 소리만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소드 마스터도 범수와 비슷한 가방을 짊어 매고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하세! 공국으로!”

“···저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소드 마스터께서 동행하시면 좋지만.”

조금 전 지하실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맥케인은 뜬금없이 자신도 같이 공국까지 가겠다며 제안했다.

“맥케인은 길드원도 아니시라면서요. 보수도 딱히 안 받으신다고.”

“몬스터와 내통한 자들이 있다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지. 사람된 도리로 도와야하지 않겠는가? 난 해야할 일을 하는 걸세.”

한쪽 눈을 찡긋하며 덧붙인다.

“그리고 어차피 자네가 여기 없으면 수업도 진행이 안 될 테고.”

범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과 여유가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도와준다면 감사한 일이었다.

“가도를 달리면 타실리아엔 내일쯤 도착할 거야. 내려가세. 안토니가 기다리고 있어.”

안토니?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아직 못 만나 본 게 분명했다.

“그건 누굽니까?”

“이 저택의 마굿간지기. 아 참, 자네 당연히 말은 탈 줄 알지?”

···그게 왜 당연하죠?

***

“뭐?! 말을 탈 줄 모른다고?”

저택의 마굿간 앞.

행낭을 챙겨 나온 크리스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동방의 명가는 이쪽의 귀족 같은거라며. 어렸을 때 승마 안 배우나?”

범수의 (위장된) 과거 배경은 셀레나와 크리스에게도 간략하게 설명한 뒤였다.

“안타깝게도 기회가 닿질 않았습니다.”

“이러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데.”

“일단 오늘 범수에게 기초라도 가르치고 내일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래야겠네요. 대장에게는 말해 둘게요. 그러고도 영 안되겠다 싶으면··· 범수랑 나랑 같이 타던지 해야죠, 뭐.”

범수는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뻔뻔하게 주장했다.

“아마 금방 배울 겁니다.”

사실 확신은 없다. 야수의 인장을 통한 보정을 믿을 뿐.

‘일단 타면서 익힐 수밖에.’

대화를 듣던 그레이 엘프가 말했다.

“이야기가 달라졌군.”

저택의 마굿간지기, 안토니는 날렵한 몸매의 중년이었다. 그는 잿빛 머리칼을 긴 귀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공국까지 왕복할 말 세 마리를 내 주기 전에, 일단 초보자를 연습시킬 말부터 데려와야겠어.”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해요~! 아저씨.”

마굿간으로 들어간 그레이 엘프는 잠시 후 갈색 털의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이 아가씨 이름은 에보니야. 올해 여덟 살이 된 숙녀지. 초보자를 여럿 가르친 경력이 있고, 인내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매우 침착하단다. 초보자가 승마 감각을 익히기엔 최적의 파트너가 될···.”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히이이잉!”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시작했다. 승마를 전혀 모르는 범수가 보기에도 거부 표현이라는 건 확실했다.

에보니는 더 움직이지 않겠다고 주장하듯 몸을 틀었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 에보니?”

말이 움직이지 않자 이번엔 범수가 다가갔다. 그러자 말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휘이! 착하지! 휘이!”

팔짱을 낀 맥케인은 에보니의 눈길이 가는 방향을 본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범수, 저 말에게 더 가까이 가 보게.”

“잠깐! 말이 흥분한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접근하면 위험···!”

범수는 이미 한 발자국 더 딛은 후였다.

그러자.

“히이이잉!”

에보니가 경련을 했다. 입가에 부글거리는 하얀 거품. 범수는 말의 두 눈에 가득한 두려움을 읽어냈다.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아,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범수가 그렇게 말한 순간.

푸득-! 푸드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똥오줌. 범수는 에보니의 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철퍼덕!

말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렸다.

“······.”

모두가 당황하여 침묵하는 가운데, 마굿간지기는 혀를 찼다.

“미치겠네. 어제 목욕 시킨 참인데.”

***

그 후로도 엘프는 몇 마리의 말을 더 데려와 봤지만 거의 비슷한 반응이었다. 에보니와는 달리 접근까지는 참아 주는 녀석도 있었지만 혹시 손이라도 대면 난리가 났다.

안토니는 혀를 찼다.

“참 이상하네. 거기 신입, 혹시 동물들이 질색하는 아이템이라도 가지고 있나?”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러는 거지?”

엘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야생성이 강한 종족을 태울 때 반응과 비슷해. 하지만 인간을 상대로 이런 적은 없는데?”

뜨끔.

범수는 저절로 이마 쪽에 신경이 쓰였다. 정확히는, 도시에서 산 검은 천으로 가린 인장에.

야수왕의 인장.

야수···.

“좋아, 최후의 수단이다.”

엘프는 마굿간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으잉?”

크리스는 깜짝 놀랐다.

“아니, 쟤 아직도 여기서 키우고 있었어요?”

맥케인은 눈을 빛냈다.

“오오, 정말 훌륭한 말이군!”

그리고 범수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저런 것도··· 말이라고 해야 해요?”

엘프가 마지막으로 데리고 나온 것은 한 마리의 흑마였다.

그런데 덩치가 심상치 않았다. 얼핏 보기에 전의 놈들과는 체고부터 달랐다.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크다.

더군다나, 범수의 상식으로 원래 말은 날렵한 근육 체질이 대다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내가 옛날에 다니던 헬스장 관장님 몸이랑 비슷하네.’

말은 왠지 마음만 먹으면 누워서 벤치 프레스를 들 수도 있을 듯한 체형이었다.

안토니가 말했다.

“이름은 흑제야."

흑제?

말 이름으로는 과하다고 범수는 생각했다.

"전 주인 이후로 아무도 길들이지를 못해 방치했던 녀석이지. 동방 대륙에 사는 ‘천마’의 피를 이었다는 말도 들었는데··· 뭐, 허풍이겠지만.”

확실히 그 전의 말들과는 좀 다르긴 했다.

녀석은 범수가 가까이 와도 부들부들 떨거나 분뇨를 지리는 대신 푸르릉! 콧김만 거칠게 뿜을 뿐이다.

분명한 거부 표현이지만 경기를 일으키진 않았다. 덕분에 범수는 희망을 품었다.

“이거, 잘 하면 되겠는데요?”

엘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갑자기 붙지 말고 천천히··· 서서히 다가와 봐.”

그렇게 범수가 한 걸음씩 딛으며 가까워졌다. 하지만 흑제는 그 상황이 영 못마땅한 것 같았다.

말이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잠깐, 말 송곳니가 왜 저렇게 길어?

“저기, 안토니. 얘 정말 말 맞아요? 이빨이 왜 샤벨 타이거만해요?”

“과장하지 마.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얘는 원래 이런 말이야. 그냥 그렇게 이해해.”

푸히힝! 푸히힝!

말은 계속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다. 범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더 다가갔다.

그러자 흑제는 자기 주장을 더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곧, 그 자리의 모두는 낮고도 깊은 울림을 들었다.

으르르렁!

“······?”

범수는 다시 안토니를 본다.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이 왜 으르렁거리죠?”

“다시 말하지만, 얘는 원래 이런 말이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안토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

“이제 이 녀석 아니면 더 이상 보여줄 말도 없어. 마지막 기회라고.”

다가갈수록 으르렁거림은 더 커졌다.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온 헬하운드의 하울링과 같은, 묵직하고도 위협적인 소리였다.

크리스는 결과가 뻔히 보인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반대로 맥케인은 기대를 하듯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범수는 말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적어도, 내 눈을 바로 마주친 건 네가 처음이다.’

녀석의 눈에 일렁이는 감정을 해석하려 애쓴다.

‘이 녀석도 짐승이니까 본능적으로 알 거야. 나랑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미 크림슨 타이거를 맨손으로 사냥했던 범수다. 그의 본능은 저 말 정도는 때려 눕힐 수 있다고 말한다. 말도 그 사실을 느낄 테다.

‘지금은 나한테 잡아 먹힐까봐(?) 경계하지만, 적의가 없다는 걸 알면 결국 굴복할 거다. 싸워서 못 이길 상대니까.’

범수는 클리셰를 떠올렸다.

‘그 누구도 길들이지 못 했다는, 야수 같은 명마!’

전 주인이 이미 길들인 적 있다는 안토니의 말은 잠시 무시하며.

‘하지만 내가 두 눈을 마주보고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교감이 생기고 내게 복종하는 거지. 날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 거야.’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범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속으로는 말에게 뭐라고 말할지 고민했다. ‘복종하라?’ 너무 오글거린다. ‘내가 네 주인이다?’ 이건 너무 흔한데.

범수가 생각에 빠진 그때, 말이 기습적으로 목을 움직였다.

콰직!

으드득!

“?!”

“헉!”

“버, 범수!”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그들 중 가장 놀란 범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말이 콱! 물어버린 그곳을.

뚝! 뚝!

피가 방울지며 떨어진다.

머릿속의 아름다운 상상은 뭉게구름처럼 조각나 흩어졌다.

순간, 범수는 뚜껑이 열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이해했다.

“이···!”

포효하듯이 분노를 토한다.

“이 개좆같은 새끼가!”

그렇게, 말의 특정 신체부위를 파격적으로 과소평가한 뒤.

범수는 물리지 않은 왼쪽 손을 활짝 폈다. 그리고 아가리를 꽉 문 말의 뺨을 겨냥했다.

휘익!

바람 찢는 소리에 이어.

철썩!

찰지고도 위협적인 소리.

“허억!”

마굿간지기는 입을 쩍 벌린다.

그리고는 말의 싸대기를 힘껏 후려 갈긴 범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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