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힘법사가 사는 법-23화 (23/145)

23. 존재들

***

늦은 시간이었지만 골목에는 행인들이 꽤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사이 범수는 루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양친은 아주 어렸을 때 역병으로 여의었으며 그 후로는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는 것. 열일곱 살이 되자 그 집에 더 있을 수 없게 되어 독립했다는 것.

또한, 그 나이 또래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몇 번 일터를 옮기다가 몇 달 전부터 여관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것.

혼자서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지금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것 따위의 자질구레한 정보였다.

범수는 다른 것에 신경이 팔린 사람처럼 적당히 대꾸하거나 침묵을 지키면서 걸었다.

사실 그는 계속 내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도 위험은 안 느껴져.'

지금의 감각은, 그가 길가에서 임의의 행인과 마주치고 또 대화를 나눌 때와 비슷했다.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소녀다.

딱, 그 정도의 위험.

‘여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100% 확률로 발동했어. 그런데 지금은 왜 잠잠할까? 맥케인이 죽여버리겠다고 한 대상인데도. 그럼 평범한 여자애일 리가 없잖아.’

루체가 갑자기 말했다.

“그때 상단이 우리 여관에 들어왔을 때, 나도 모르게 자꾸 당신을 보게 되더라구요. ··· 눈치챘죠?”

“······.”

기억에 없는 일은 침묵으로 응한다.

이렇게 하면 루체가 조곤거리며 더 많은 정보를 푼다는 걸 범수는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많은 인원 중 내 또래는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반가웠어요.”

범수는 부캐를 만들 때 소년과 청년 중간쯤에 해당하는 외모로 설정했다.

길드 사람들이 초면임에도 하대하는 건 위계질서가 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가 봐도 어려 보이는 까닭이다.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멋있기도 했고. 특히, 게르베그 님이었나? 하루 종일 욕하면서 소리는 왜 그리 지르던지. 그분은 지금 잘 계시나 몰라요.”

게르베그?

일주일이 지났으니 짐승밥이 되는 것을 넘어 소화도 다 되고 분변이 되어 배출되었겠지. 지금은 숲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을 터다.

그의 잔재는 숲에 남으리라. 영원히.

“···어딘가에 정착하신 것 같긴 합니다.”

“어쨌든, 이제 그와 함께 있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루체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늙은 마법사는 오크 굴에 끌려가기 전부터 성질머리가 더러웠던 것 같다.

여관에 머무는 사이에도 범수에게 온갖 역정을 다 냈는데 직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범수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는 모양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난 사장님이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거든요. 부끄럽지만, 울어버릴 때도 있고요.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넌 짖어라, 난 내 일 하겠다.’ 이런 느낌으로 보여서 신기했죠.”

살짝 키득거린다.

“나랑은 달리 힘든 일을 잘 견디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더 눈길이 갔나 봐요.”

그의 검은 머리를 보며.

“여기 출신이 아니니 당연히 고생이 많았겠죠. 그래서 더 단단해졌을까? 제멋대로 그런 상상을 해 보기도···. 앗!”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입을 가린다.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울쌍이 되어 변명했다.

“아, 내 말뜻은요. 당신이 동방인이니 당연히 고생을 더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요점은 이해했습니다.”

“···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부드러운 밤바람이 남녀를 스친다. 소녀의 집은 상업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접차 길이 좁아지고 통행인 수가 줄었다.

잠시 후, 정적을 다시 깬 사람은 루체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범수의 머리칼을 보며 말한다.

“동방인에게 함부로 구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알아요. 흑발을 꺼림칙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구요. 하지만 난 오히려 당신의 검은 머리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

“봐요, 나 같은 갈색 머리는 너무 흔하잖아요? 그에 비해 까만 머리는 확실히 희귀하고 눈에 띄니까.”

머리색 같은 건 그냥 생각 없이 골랐는데.

그때, 루체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일을 시작할 때 선배 언니들이 충고했어요. 여행자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

“그들은 우리를 하루, 이틀의 추억으로 볼 뿐이라고. 여행자들은 결국 미련도 없이 떠나버리고 우린 홀로 남겨진다고. 그래서 망설였죠. 상단이 떠나던 날 당신에게 처음 말을 건 건··· 내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모든 용기를 끌어내 말을 건 그때.

검은 머리의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겠다고 했죠. 이번엔 다행히 약속을 지켰지만.”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이틀이나 사흘 뒤 다시 이곳을 떠나면··· 그 다음은 언제 돌아올까요?”

범수는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

타실리아에 다시 올 일이 있을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므로.

두 사람이 루체의 집 앞에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춘다.

루체가 범수의 얼굴을 깊이 응시했다. 이번에도 엄청난 용기를 끌어내는 것 같더니, 굳게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난 언니들과 생각이 달라요. 이대로 떠나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면, 혹시라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영원히 간직할 추억이라도 만들고 싶어요.”

범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은 루체의 집에 꽂혔다. 손이 움찔거리며 자꾸 얼굴로 올라가려는 것을 참는다.

그는 간신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루체는 안쓰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들어가서 차 한 잔 할래요?”

그게 루체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인 것 같았다.

반응이 없자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몇 마디를 덧붙였다.

“친구들은 같이 살지만 방을 다 따로 써요. 문닫으면 방해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는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어요. 원하는 만큼 계속.”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피부색은 온데간데없다. 완전히 달아올라 불처럼 화끈거리는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대문이 굳게 닫힌 집을 볼 뿐.

그가 침묵한 것은 답변을 고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범수는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현대 기준으로 아직 미성년자인 소녀의 제안을, 성인의 정신을 지닌 자신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범수가 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하나 더 존재했다.

---찌릿!

이 집에 접근한 순간. 범수의 모든 신경이 힘을 합하여 외치고 있었다. 소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전혀 반응하지 않던 알람이 지금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려 댄다.

범수는 직감했다.

저 집에 한 발이라도 들여 놓는 순간···.

그는 틀림없이 죽는다!

찌릿! 찌릿!

다시 소녀를 본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위험한 상황인데, 여전히 본능은 그녀가 안전하다고 말한다. 저 집에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등에 땀이 흘러 내린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선 상태에서, 범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습니다.”

소녀의 얼굴이 실망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진다.

“아··· 네. 미안해요.”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미쳤었나봐.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제발 잊어주세요.

들릴 듯 말 듯한 말을 남기며, 소녀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범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집을 향해 달렸다.

끼익!

그녀가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두터운 나무문이 저절로 열리고.

그 너머의 컴컴한 어둠이 드러났다. 이 집에 가까워질 수록 범수의 코를 자극하던 그 이상한 냄새가, 이제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농밀하게 흘러 나왔다. 범수는 자칫하면 질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냄새만큼 지독한 긴장감도 함께 엄습했다. 보이지 않는 차가운 칼날이 몸 곳곳을 도려내는 것 같다.

그렇게, 문 너머 어둠 속으로 루체가 뛰어든 순간.

끼익!

문이 다시 닫혔다.

이번에도 소녀는 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음에도.

“······.”

범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3, 4, 5···.’

5초까지 센 뒤 몸을 돌린다.

루체의 집을 등진 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밤의 도시를 걸었다. 올 때 경로를 그대로 되짚는다.

그렇게 다시 여관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범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죽는 줄 알았네.”

등 뒤로 말을 던진다.

“이제 나오시죠.”

담벼락의 그늘에서 답이 돌아왔다.

“아무튼, 이런 쪽의 감은 귀신 같다니까. 나름 최선을 다해 은신했는데도.”

그림자 속에서 남자가 걸어나온다. 그는 대수림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범수에게 말했다.

“아까, 위험했었네.”

“네,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잘 따라오시더군요?”

“자네를 놓치면 길을 잃을 테니 필사적으로 쫓아가야 했지. 언제부터 알아차렸나?”

“여관 복도에서부터요. 어차피 제가 눈치챌 걸 알고 그때부터 미행하신 거죠?”

“그래. 혹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내가 나설 거라는 신호인 동시에,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지.”

신호이자 경고로 기능한 맥케인의 암행 덕분에, 범수는 루체를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범수는 자신이 느낀 걸 맥케인에게 말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루체는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음에도, 정작 그녀의 집 안에 있는 어떤 ‘존재들’에 대해서는 형언하기도 힘든 공포를 느꼈다고.

“대체 루체의 정체가 뭡니까? 그 집 안에 있는 건 뭐구요? 당신은 알고 계신거죠?”

그때였다.

“어? 왜 다들 여관 앞에 모여 있어요?”

정보를 수집하러 나갔던 크리스가 돌아왔다.

“범수 너는 표정이 왜 그래? 하얗게 질렸네?”

“저, 오늘 죽을 뻔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는 경악했다.

“뭐?!”

그런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맥케인이 중얼거린다.

“집안에 있다는 루체의 친구들은 아마 사람이 아닐 거야.”

연속으로 튀어나온 영문 모를 발언에 크리스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 집이 무슨 집인데요? 루체 친구는 또 무슨 말이고? 그러고 보니, 이제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맥케인, 아까 루체는 왜 죽이려고 한 거에요?”

그러자 맥케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질 급한 크리스를 다시 한 번 미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올라가서 이야기하지.”

***

여관 내부는 조용했다. 숙박객들은 물론이고 직원들 역시 대부분 퇴근하거나 잠자리에 든 시간.

방으로 돌아온 세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범수는 제일 궁금했던 것부터 질문했다.

어쨌거나, 맥케인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루체는 대체 뭡니까? 사람입니까?”

맥케인은 즉시에 가깝게 답했지만, 그 짧은 시간이 범수에게는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사람일세.”

의외라는 듯 반응하는 두 사람 앞에서, 맥케인은 덧붙인다.

“아직은.”

“?!”

그는 범수가 문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루체의 집을 언급했다.

“그 집에서 풍기는 냄새, 루체의 것과 거의 흡사했지?”

“종류는 같지만 집 쪽이 훨씬 더 독했습니다.”

크리스의 얼굴에 혼란이 떠올랐다.

“아니, 아까부터 두 사람은 대체 무슨 냄새를 말하는 거에요? 나도 후각이라면 예민한 편인데, 그런 건 전혀 못 느꼈다니까?”

“이건 범수처럼 사람 수준을 초월한 감각을 지녔거나, 아니면 나처럼 그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봐야 알 수 있는 냄새라네.”

“그러니까 그게 뭔 냄새인데요?”

“경계에서 배회하는 존재들의 냄새지.”

맥케인은 약간의 음울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항상 경계에 서 있다네. 삶과 죽음의 경계. 사람과 짐승의 경계. 이성과 본능의 경계. 그 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어. 그 어느 한쪽에도 받아들여 질 수 없도록 만든 오랜 저주 때문에, 그들은 불가역적으로 빛을 두려워하고 피를 탐하지.”

크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극도의 혐오감을 표했다.

“설마··· 뱀파이어요?!”

맥케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