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저 녀석, 정체가 뭡니까?
***
콰---앙---!
폭발음과 섬광이 밤을 살랐다.
돌풍이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폭발은 직접 휘말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뇌를 뒤흔드는 충격을 남겼다.
그 진동이 어찌나 컸는지, 크리스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와 배 속에서 북을 두들기는 것처럼 느꼈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아픔은 덤이었다.
당황한 것은 맥케인 역시 마찬가지. 그는 범수가 에너지 볼트를 그 타이밍에 한 발 더 쓸 수 있었다는 사실에도, 그 위력에도 경악했다.
‘마법의 파괴력이 나흘 전보다 더 강해졌어!’
범수의 마력량이 며칠 사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걸 의미했다.
어떻게?!
두둑! 두두둑!
공중으로 튕겨 나갔던 벽돌과 자갈의 파편들이 주변으로 떨어졌다. 흙먼지와 검은 연기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났다. 범수는 이번엔 정말로 기절해 있었다. 원래는 라이트 주문 직후에 펼쳐졌어야 할 광경.
그리고 그가 쓰러진 방향으로는 도시 한복판에 만들어졌다고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맙소사.”
나지막이 크리스가 침음을 흘린다.
그곳에는 셀레나의 뒤뜰에 생긴 흔적을 확대한 참상이 보였다.
땅은 참혹하게 유린당했다. 단단한 벽돌과 암석을 진흙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누군가, 장난처럼 파헤치고 주물럭대다가 싫증을 느끼고 도중에 떠난 듯한 모습. 남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지 정령술사들 여럿이 머리를 맞대야 겨우 만들 결과물이라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구덩이 끄트머리에 범수가 노린 타깃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절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캬악! 캬아아아!”
방금 전의 폭발은 그녀의 하반신을 날려 버렸으므로.
끼릭! 끼리릭!
강철검처럼 솟아오른 손톱으로 여인은 세차게 땅을 긁는다. 그것이 반쯤 녹거나 깨진 암석과 마찰하며 불꽃이 튀었다.
끔찍한 고통일 것이다. 크리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몸의 절반이 날아간 아픔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몸의 절반을 소실한 상태에서도 숨이 붙어 있는 건 어떤 느낌일지.
‘역시, 뱀파이어다. 질기디 질긴 생명력!’
배꼽 아래가 날아가면 정상인은 당연히 즉사다. 하지만 아직 심장과 뇌가 남아있기에 여인은 살아서 발악했다.
크리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니 정보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터다.
‘빗나가서 다행이야. 즉사했으면 인질로 잡지도 못했겠지.’
곧, 생각을 바꾼다.
‘아니··· 범수, 설마 일부러 빗맞힌 건가?’
맥케인과 크리스가 놀란 것 이상으로, 다른 뱀파이어들은 경악하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싸움은 이미 멈췄다. 그들 대다수가 시력을 되찾은 것도 그쯤이었다.
누군가 한걸음 뒤로 빼며 중얼거린다. 눈동자는 앞의 참상에 꽂혀 있었다.
“사, 상급 마법?”
“이야기가 다르잖아!”
범수가 당당하게 시동어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뱀파이어들은 저것이 설마 에너지 볼트의 결과물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애초에 전달 받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수장까지 전투불능.
놈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도망···!”
뱀파이어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가 몸을 돌리던 순간.
콰직!
“크으륵!”
그의 가슴을 뚫고 검날이 튀어 나왔다.
“으, 읍!”
끈적한 피거품이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온다.
맥케인은 가차 없이 검을 뽑은 뒤, 그대로 다시 목을 쳤다.
팟!
하늘 높이 치솟는 머리.
그 몸이 허물어 지기도 전에 맥케인은 힘껏 뛰어 올랐다. 방금 목을 벤 뱀파이어의 시체, 아직 완전히 쓰러지지 않은 그의 어깨를 밟는다. 그것을 디딤돌 삼아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쐐애애액!
착지와 함께 공격. 그 뒤에 있던 뱀파이어가 타깃이었다.
콰직! 검날이 두개골을 부수며 꽂힌다. 그대로 손잡이를 뒤틀어서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캬아악!”
“도망가! 철수! 철수··· 크헙!”
도주하던 놈의 뒷통수에 암기가 날아와서 박힌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한 명마저 맥케인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하들이 전멸했다.
“내 예상보다도 훨씬 쉽게 끝냈군.”
검에 묻은 눅진한 피를 털어내며 맥케인이 중얼거렸다. 시선은 붉은 머리에게 닿는다.
“크으! 크으으···!”
여자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이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없어진 다리 대신 두 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기어간다. 손톱을 땅에 박아 넣으며, 지지대삼아 몸을 끌어당겼다. 으깨진 복부 아래에는 내장이 꼬리처럼 남아 땅에 질질 끌렸다.
맥케인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앗!”
크리스가 황급히 외쳤다.
“맥케인! 살···!”
정보를 캐야 하니 죽이지 말라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
쉭! 쉬익!
은빛 호선이 두 줄, 어둠을 갈랐다.
촥!
머리와 몸통만 남은 뱀파이어를 보고, 크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맥케인은 머리를 날리거나 심장을 꿰뚫는 대신 두 팔만 자른 것이다.
‘하긴, 그도 산전수전 다 겪었을 테니.’
단서가 될 적의 수장을 대뜸 죽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은 것.
“흐음.”
뱀파이어를 내려다보며 맥케인은 생각했다. 멀쩡하게 움직이는 건 머리뿐이지만, 저 입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누굴 물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위험은 사전에 차단하자.
맥케인은 단호한 얼굴로 오른발을 들어올리더니.
체중을 실어 힘껏 걷어쳤다!
퍽!
콰직!
“···으, 으으으으!”
뱀파이어의 턱이 부서진 채로 덜렁거렸다. 그제서야 맥케인은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만족한 투로 중얼거린다.
“이러면 깨물지도, 주문을 외우지도 못하겠지.”
그리고 약 1초 뒤.
뭔가를 깨달은 듯 당혹감과 함께 중얼거린다.
“···아, 이러면 말도 못하니까 심문이 안 되나?”
“그건 대장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잡은 오크랑 같이.”
“그래. 아무래도 이쪽 상황을 셀레나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군.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해지고 새로운 의문도 생겼어.”
“캄파네로 돌아가요?”
길드원이 아님에도, 맥케인을 리더로 간주하며 의견을 물었다.
“아니, 일단 여기 머물면서 소식부터 알리지. 우리가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녀가 여기로 오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전서구라도 날릴 생각인가?
그 의문을 표하기 전, 크리스는 다른 질문부터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바닥에 쓰러진 범수를 본다.
마력 탈진으로 기절했을 뿐 부상은 없는 것 같다.
“대장에게 말을 듣긴 했는데··· 이건 그 이상인데요? 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뭡니까?”
대체 동방의 어떤 명가 출신이기에 초능력 수준의 오감을 보유했고, 말과 힘싸움을 할 정도로 천하장사에다가, 저런 엄청난 마법을 두 번 연속으로 펼칠 수 있는가?
맥케인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자네도 들은 것처럼 이대륙의 귀족 출신으로, 사정 때문에 이곳에 와 마법을 배우고 있지. 그리고··· 드래곤의 마법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비술’을 익혔어. 이게 내가 아는 전부일세.”
드래곤도 흉내낼 수 없는 비술.
크리스는 그 말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며 묻는다.
“방금 본 것도 비술의 일종일까요?”
“그 현상을 설명할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네.”
지금까지 목격한 범수의 특수 능력이 대체 몇 가지인지 크리스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전부 어떤 명가의 비술이라면···. 그 가정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남자는 자문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동대륙은 아직도 통일되지 못한 거지?’
범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이들이 큰 가문을 이루었다면, 그들은 ‘동방 제국’의 시조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뒤 크리스는 추측을 멈췄다.
이런 종류의 의문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답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 당사자는 질문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크리스는 대신에 질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기로 했다.
“맥케인. 당신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붉은 머리의 흡혈귀가 한 말을 크리스는 똑똑히 들었다.
염후의 애완동물이자, 여흥거리.
그런 존재가 왜 대수림 밖으로 나와서 방황하냐는 말도 했다.
“···제 귀가 잘못된 게 아니면, 방금 전 염후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그것은 일반인에게 친숙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일반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수림 깊숙한 곳의 금역에 레어를 튼 드래곤이 있다. 염후는 그 드래곤이 지닌 여러 이름 중 하나였다. 주로 인간이 아닌 종족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크리스가 이어서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
“······.”
맥케인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에 대해 더 논하기 싫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크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이쪽! 이쪽이다!”
멀리서 경비대원들이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밤중의 사건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
범수가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살아있네?’
일단 장소는 어제 짐을 푼 여관이 분명하다. 아직 죽지 않았고 뱀파이어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제 마력 탈진이 발생한 시간이 꽤나 늦었기 때문에, 전처럼 금방 깨는 대신 그대로 푹 자 버린 것 같다.
정신을 잃은 사이 싸움은 아군의 승리로 끝났으리라.
‘휴우, 살았으면 됐다.’
어제도 참 아슬아슬했다.
스킬 이름을 외치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자신은 뱀파이어에게 갈려 나갔을 터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 여태 대체 몇 번을 죽을 뻔한 거야?’
확신하듯 중얼거린다.
‘···1억은 너무 싸다.’
빙의되기 전 선택지에서 1번을 선택했다면, 그는 일주일을 버티고 일억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일주일은 어제의 전투까지 포함하는 기간이었다.
그동안 구르고 죽을 뻔하고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너무 싸게 느껴졌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고작 그 돈’ 받자고 이세계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시간을 되돌리면 애초에 본캐로 빙의했겠지.’
후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캐릭터의 선택.
그렇다면, 일주일 대신 7년을 버티기로 한 선택도 후회하는가?
“······.”
대수림에서는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한번 위기를 이겨내고 맞는 다른 세상에서의 아침.
정확하게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낙관이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단단한 결의로 바뀌었다.
‘아니, 버텨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말 7년이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드래곤볼을 일곱 개 모은 것처럼 신룡이라도 나타나나? 정말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줄 것인가?
‘이런 세계에 떨어진 것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야.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약속을 믿을 수밖에.’
그때,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일어났나?”
크리스였다. 범수 곁으로 다가와 앉는다.
“어제는 대단한 활약이었어.”
칭찬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맥케인도 말했어. 네가 없었다면 훨씬 힘들었을 거라고.”
뱀파이어들의 눈을 일시적으로나마 멀게 만들고, 행동을 굼뜨게 만든 것은 엄청난 기여였다.
“그 붉은 머리 여자, 기억하지? 맥케인이 말하던데, 뱀파이어 중에서도 급이 엄청 높다나봐. 원래는 죽였으면 죽였지 생포는 힘들었을 상대라더군. 하지만 네 덕분에 산 채로 잡았어.”
“아, 지금은 어디에 가둬 놨습니까?”
“바로 저기 있잖아.”
“?!”
크리스가 가리키는 쪽 구석에는 못질을 해서 봉인한 나무 상자가 보였다.
범수는 의아해했다. 아까부터 그쪽에서 지독한 냄새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다른 뱀파이어의 수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마 살아 있는 뱀파이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왜냐면···.
‘키 큰 여자 하나가 들어가기엔 상자가 너무 작은데?’
팔다리가 모두 잘려서 수납하기 좋은 형태가 되었다는 걸 범수가 예측할 리 없었다.
그때 크리스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이요?”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아마 범수 네 기여도가 매우 높게 책정될 거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보수가 높아질 것 같아. 그것도 많이.”
돈을 많이 준다는 건 확실히 기쁜 소식이였다.
“또 있어. 사실, 이건 원래 내 임무인데도 널 굳이 같이 보냈지? 그 이유는 내가 곁에서 너를 보면서 평가하려는 목적도 있었거든. 신입이 어떤 사람인지 며칠 같이 지내보면서 알아가는 거지.”
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츄리온 길드에 명목상 견습 개념이 없다지만, 그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단계는 필요할 터다. 그 감독관의 역할을 크리스가 맡은 것 같았다.
“대장이 여기 도착하면 네 활약을 자세하게 설명할게. 너에 대한 길드 내부 평가가 올라가면, 앞으로 중요한 임무가 많이 할당되고 보수도 급격하게 오를 거야.”
다 좋은 내용이지만, 범수는 그가 앞서 말한 내용에 주목했다.
“길드장님이 오신다고요?”
“응. 맥케인이 불러오기로 했어.”
그제서야 범수는 그가 여기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맥케인은 도시 근처의 마탑으로 갔다고 한다. 셀레나에게 가장 빠르게 전언을 전할 방법은 다른 마법사를 경유하는 것이기에.
한밤중에 보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차피 셀레나가 자고 있을 게 뻔했고, 그 시간에 마탑까지 안내할 길잡이를 수배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좋은 소식은 또 있어.”
크리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