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은사자 기사단 (1)
***
셀레나 헤페토는 항상 공사다망하다.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는 삶이 어떻게 바쁘냐고 혹자는 딴지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셀레나는 깨어 있는 네 시간은 누구보다 알차게 쓰는 여자였다.
오늘도 그녀는 맥케인을 통해 접한 뱀파이어 마약 사범들의 배경과, 던전 탐사에서 돌아온 길드원들이 전한 소식,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뒤뜰의 수련장을 어떻게 복구할지에 대한 계획, 그 직후 떠나야 할 타실리아로의 여정 등으로 머릿속이 매우 바빴다.
“예전과 똑같은 상태로 복구하면 되는 거야? 그냥, 땅만 메우면 끝?”
저택 뒤뜰에서 셀레나에게 질문한 이는 드워프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린. 오랜 만에 던전 밖으로 나와 깔끔하게 면도를 한 그녀는 개운하고 기분이 좋은지, 푸르스름해진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기왕 복구하는 김에, 이번엔 좀 구조를 바꿔볼까 해. 저기, 저쪽에 높고 단단하고 두꺼운 암석 장벽을 하나 만들어 줘.”
“알았어. 그나저나···.”
다린은 대지의 정령을 부르기 전, 파괴의 흔적을 주의 깊게 살핀다.
범수가 수련장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구덩이.
“이게 정말 에너지 볼트 한 방으로 만든 흔적이라고?”
“심지어 지금은 이것보다 더 강력해졌다는걸?”
“어서 만나보고 싶네, 그 신입.”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데··· 언니가 뛰어난 마법사인 건 내가 잘 알지만, 뛰어난 교사인지는 의문이란 말이야. 정말 잘 가르칠 자신 있어?”
언니라고 불린 셀레나는 코웃음을 쳤다.
“마탑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몇백 배 낫다고 장담해. 범수, 그 아이도 지금쯤이면 자기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기뻐할걸? 마탑에서 경험한 수업과 지금 내 수업을 적나라하게 비교할 수 있거든.”
실은, 범수는 마탑의 수업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
당연했다. 범수의 부캐는 게임 스타트 시점에서 이미 마탑을 나온 상태였으니.
“탑에 들어간 지 3년이 되었다는데 스펠은 겨우 에너지 볼트 하나를 배웠더라고. 알겠어? 마탑은 아래 계급이 무조건 착취 당하는 구조야. 그래서 그 아이의 천재성도 묻혀 있었던 거고.”
마탑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다린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셀레나는 좀 더 설명해주기로 했다.
“견습은 공적 업무는 물론이고 수석의 개인적 수발까지, 온갖 잡일을 떠맡아도 동전 한 푼 못 받지. 마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혹사당하는 무보수 노예야. 심지어 특별한 날에는 수석들에게 선물과 동화 주머니를 갖다 바쳐야 하지. 주문 한 줄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마탑이라는 동네가 그 정도야?”
“그래. 그뿐인가? 돈도 많은 수석들이 돈 한 푼 못 버는 견습에게 당당하게 밥을 사라고 요구하지. 혹시 그 노인네들에게 아카데미 다니는 자식이나 손자라도 있어봐. 그 애새끼들 과제까지 네가 떠맡아서 밤새우는 일이 비일비재야. 그랬다가 학점이 나쁘게 나오기라도 하면 쓸모도 없는 쓰레기라고 욕이란 욕은 다 쳐먹고!”
다린은 그녀가 과장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굳이 반박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잘 가르치면 됐지 뭐. 그런데, 감이 좋다고?”
셀레나가 찡그렸던 표정을 다시 푼다.
“그래, 탐사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몰라.”
“예언 능력?”
“아니, 맥케인이 같이 다니면서 관찰을 해 봤는데··· 오감이 뛰어난 쪽인 것 같아.”
“호오, 그래?”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다린이 말했다.
“그 애, 혹시 정령도 다뤄?”
“아니? 아마 그쪽에 재능은 없을걸. 본인도 언급 안 했고.”
“흐음.”
다린이 영 시원찮은 기색이었기에 셀레나는 이유를 물었다.
“언니는 정령술 쪽은 잘 모르지?”
“응, 그쪽은 이론과 분석 보다는 감각과 재능에 너무 의존해서 내 취향이 아니야.”
드워프 정령술사는 설명한다.
“사실, 뛰어난 오감 역시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일 수가 있거든.”
“정말? 하지만 넌 대지의 정령을 다루지만, 흙 냄새만 맡고도 이게 어느 지방의 토양인지 알아 맞추는 그런 재주는 없잖아. 흙 냄새가 다 뭐야, 와인이랑 맥주 냄새도 구별을 못 하던데.”
“···그땐 내가 너무 취했었고! 흠, 흠. 아무튼 사람들은 정령이라고 하면 땅, 불, 물, 바람··· 이런 원소쪽 정령만 생각하는데, 사실 세상에 정령의 종류는 엄청나게 많아. 그 중에는 원시적인 야만성을 대표하는 정령도 있고.”
“그래?”
셀레나가 모르던 정보였다.
그런 정령은 매우 희귀하다며 다린은 설명했다.
“야만은 다듬어지지 않은 잔인한 폭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명화된 종족들이 오래 전 잃어버린 날카로운 감각을 상징하기도 하지. 그 신입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문뜩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야.”
셀레나는 그 추측에 흥미를 두지 않았다.
“내 생각엔 정령사는 아니야. 아마 동방의 비술 덕이겠지.”
다린은 쉽게 수긍했다. 그를 곁에서 본 셀레나의 말이 맞겠거니 싶었다.
“하긴, 이 정도로 뛰어난 마법의 자질이라면··· 신이 그 녀석을 지나치게 편애하지 않는 한 자연의 축복까지 받았을 리는 없지.”
대지가 종이 조각처럼 찢긴 흔적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언니가 잘 가르쳐도 앞으로의 마법 수업이 좀 위험하지 않겠어? 라이트 마법 한 방에 태양을 만들고 에너지 볼트 한 방에 드래곤 발자국을 만들어 버렸잖아. 다음엔 뭘 가르치려고?”
“아, 그게 말이지.”
셀레나는 이미 범수에게 가르칠 다음 주문을 선택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그 주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다린은 그녀가 돌벽을 만들어달라고 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
공국, 타실리아.
기사단이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 뒤, 맥케인은 두 사람과 함께 식당 테이블에 앉았다 .
크리스는 겁을 잔뜩 먹은 여관 주인을 위로해주었다. 저 기사가 협박한 내용이 현실화 될 리 없다고 말하면서, 팁으로 동전 몇 닢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여관 주인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안정화 된 것에 위로의 말과 동전 중 무엇이 더 역할을 했는지 범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네. 대체 오감이 어디까지 예민해지려는 거야.’
평상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사람의 심장 박동 같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방금 전처럼 급격한 변화가 있으면 자연스레 인지하게 된다.
위험의 감지 역시 이런 작은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리라.
“좀 늦으셨네요.”
마탑에서 돌아온 길이라는 맥케인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셀레나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그곳을 방문했다.
“그렇게 되었네. 마법 전언을 보내려면 받는 사람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거든.”
“···대장이 늦잠을 잤군요.”
“어제 또 과로한 모양이야.”
범수는 창밖을 보았다. 사실, 점심 메뉴에 대한 맥케인의 고민만큼이나 셀레나의 기상도 늦은 감이 있었다. 해의 위치를 보니 시간은 이미 오후로 접어들었다.
“대장은요?”
“오늘 출발한다고 하니 내일 도착할 걸세. 마침 유적 탐사를 갔던 길드원들이 돌아와서, 개중 한 명과 같이 온다더군.”
“으잉? 벌써요? 너무 빠른데.”
아, 맞다. 유적 탐사.
범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셀레나와 크리스 외 다른 길드원들을 한 명도 못 만나 본 이유를 떠올렸다. 그들은 던전을 탐사하러 갔다고 했었다.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사실 센츄리온의 전문 분야는 그쪽이고, 이번 임무가 마무리 된 후 범수의 다음 미션 역시 던전 탐험이 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탐사 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그래서 빨리 돌아왔다더군. 덕분에 마차를 몰 사람이 생겼어.”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소비하는 묘인족이기에, 귀족처럼 마차까지 동원하는 여정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까 그 기사들. 저런 식으로 쫓아내도 괜찮겠어요?”
크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지금이라도 미행한 다음, 몬스터의 습격을 가장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후환을 없애려면요. 아무래도 단단히 원한을 품은 것 같은데.”
공국 최정예 기사단 일원을 암살해버리자는 계획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
범수는 크리스의 말에 반대했다.
“그랬다간 우리가 용의자로 몰리지 않겠습니까? 이미 여기서 실랑이가 있었던 걸 많은 사람들이 봤는데요.”
반대 이유는 물론, 암살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시체를 안 남기면 되지 않을까? 황산같은 걸로 녹여버리면 깔끔해.”
“크리스는 앞으로 공국을 계속 왔다갔다 해야 한다면서요. 이 이상 문제가 커지면 안 될 것 같은데.”
맥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아마 그 녀석들은 곧 내게로 돌아올 거야.”
“돌아온다고요?”
“그나저나,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군. 이 도시에 원래 은사자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나?”
도시 곳곳에 정보원들을 뿌려 놓은 크리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사단이 후퇴한 뒤 애매한 입장이 된 경비대원들과도 짧게 대화를 나눴다.
“아뇨, 어젯밤만해도 저들은 근처의 타실라칸 유적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사이 말을 달려서 갑자기 타실리아에 온 겁니다. 하필 이 타이밍에요.”
타실라칸은 범수도 이름만 알지 들어가 본 적은 없는 던전이다. 범수가 마지막으로 게임을 한 날까지 플레이어들에게는 공개가 안 된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The LIFE]에는 그런 식으로 유저들의 출입을 막은 다음 추후에 천천히 개방하는 필드나 던전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대수림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금역’ 같은 곳이 그러했다.
‘그 던전이 오픈되면 엄청난 무기도 함께 공개될 거라고 운영진들이 스포를 흘려서 다들 기대하고 있었지. 정작 그 시점은 계속 미뤄졌지만 말이야.’
그것은 유출된 정보만 봐도 모든 플레이어가 욕심을 낼 만한 무기였다. 본캐가 손에 넣었다면 아주 유용하게 잘 써먹었으리라.
맥케인이 말했다.
“타실라칸이면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 유적지군. 그런데 거기 있던 기사들이 왜 갑자기 뱀파이어를 인도받으러 왔지?”
크리스는 셀레나가 도착하기 전까지 기사단의 움직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제안했으나, 맥케인은 그 역할을 자신이 맡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기사단 내에 정보통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 된 뒤.
“아, 참!”
어쨌든 임무 하나가 거의 마무리 된 것은 맞기에, 범수는 미뤄뒀던 부탁을 그제서야 꺼낼 수 있었다.
“저기, 맥케인.”
“음?”
“뜬금 없는 소리인 건 아는데··· 저번에 저한테 그러셨지요? 싸우는 걸 보니 검 같은 건 기초도 못 배운 게 확실해 보이는데, 일단 배우고 나면 빠르게 성장할 거라고.”
“그래, 그랬지.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네.”
“그럼···.”
범수가 두 눈을 반짝였다.
“동방에 가시기 전에, 그 짧은 시간 동안에라도 저한테 검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으음.”
맥케인은 즉답하는 대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범수도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서 크리스가 끼어든 것은 의외였다. 외눈의 청년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저기, 나한테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범수, 너 꼭 검을 배워야겠어?”
“왜요? 배우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무기 중 가장 효율적인 건 검이니까요. 활 같은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제 장점에도 맞지 않고. 확실히, 제겐 활보다는 검이 더 어울립니다.”
“음. 네 특성이자 장기인 그것 때문에 하는 말인데.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러더니, 크리스는 범수에게 어떤 말을 자신감 있게 뱉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침묵하던 맥케인이 고개를 젓게 만든 말이었다.
“범수, 네게는 검보다 둔기가 더 어울려.”